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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03호 영양 석간고택 (英陽 石澗古宅)

오늘의 쉼터 2013. 5. 11. 09:09

 

 

 

 

종 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03호
명 칭 영양 석간고택 (英陽 石澗古宅)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1곽 3동
지정(등록)일 2013.03.18
소 재 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20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이장희
관리자(관리단체) 이장희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영양군 문화관광과 054-680-6063

 

일반설명

 

영양 석간고택은 19세기 후반에 학문소인 정사를 가옥 내에 별동으로 지은 흔치 않은 예로 정침은 생활기본시설을 설치하기 위하여 일부 변용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침은 건립 당시보다 앞선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설가 이문열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지역의 역사문화환경적인 측면에서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 건축 이야기
석간정사(石澗精舍)와 정침은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이 살았던 집으로, 현재는 소설가 이문열의 생가로 더욱 유명하다.
이수영이 1832년(순조32)에 석보면 화매(花梅)에 뛰어난 경치를 갖고 있는 매계(梅溪) 부근에서 사촌형제들과 유람하며 시를 짓고 훗날 이곳에 학문을 갈마하고 몸을 닦을 곳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생활이 궁핍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는데, 1852년(철종3) 태백산에서 돌아온 이수영을 위해 사촌 형제와 문중, 친구들이 돈을 모아 화매의 용담(龍潭) 북쪽에 8칸 규모의 집을 지어주었다. 당시 집은 앞에 4칸 규모의 서실과 뒤에 4칸 규모의 살림집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859년(철종10)에 산불이 나서 불타버렸다. 그 뒤 1883년(고종20)에 제자들이 이수영을 위해 원리리 집 근처에 강학할 수 있는 공간을 짓고 ‘여산정사(廬山精舍)’라고 이름을 지었다. 여산정사는 뒷산인 광려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문열의 조모가 이철호(李哲浩, 1901~1985)에게 집을 팔고 난 뒤, 여산정사는 석간정사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 건축 특징
석간정사는 서실의 기능을 하고, 정침은 생활공간으로 두 건물은 약 15M 대각선으로 떨어져 배치된 독립된 공간이다. 특히 석간정사에는 이 지역의 여느 서실과는 달리 지붕의 좌우에 방풍판을 설치하였다.

 


 

 

 

※  건축 구성
석간정사는 사랑채인 정사와 정침인 안채, 고방채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좌측 전면에는 석간정사가 자리 잡고 있고, 정사 우측의 마당 뒤쪽에는 남향한 ㅁ자형의 정침과 서향한 일(一)자형의 고방채가 배치되어 있다.
석간정사는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든 위에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평면은 가운데 마루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이었다. 대청에는 문짝을 넷으로 만들어 여닫을 수 있도록 한 사분합문을 설치하였다. 전면과 후면의 마루방 부분에 헌함이 없이 쪽마루를 설치하여 검소함을 보였으며, 삼량가의 홑처마집이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중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온돌방 1칸을, 우측에는 마구와 사랑방을 연접시켰다. 안채는 안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안방과 건넌방을 두었으며, 안방의 전면으로는 부엌을 이어서 좌익사를 이루게 하였다.
고방채는 정침보다 앞쪽으로 건물을 내어서 동쪽의 유우당과 자연스럽게 경계를 만들었다.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이고, 맞배지붕을 얹었다.

 


 

 

 

※ 현판
석간정사(石澗精舍)
정사년(1977)에 우림거사(雨林居士)가 썼다는 낙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