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경북민속문화재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 대산동북비고택 (大山洞北扉故宅)

오늘의 쉼터 2011. 10. 14. 18:41

 


 

종 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44호
명 칭 대산동북비고택 (大山洞北扉故宅)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일곽

지정(등록)일

1983.06.20

소 재 지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421
시 대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이수학
관리자(관리단체) 이수학
상 세 문 의 경상북도 성주군 새마을과 054-930-6063

 

일반설명

 

사도세자를 호위하던 무관 이석문이 살던 곳으로, 이석문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 세자를 그리워하여 조선 영조 50년(1774)에 북쪽으로 사립문을 내고 평생을 이곳에서 은거하며 살았다.

 

순조 21년(1821)에 손자 이규진이 안채와 사랑채를 새로 지었으며, 사랑채는 고종 3년(1866)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는 안채와 사랑채를 비롯하여 장판각, 안대문채, 마굿간, 아래채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사랑채와 안채가 ㅁ자형을 보이고 있으며, 솟을대문이 남아 있어 당시 고관가옥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대문간(大門間) 안쪽 바로 우측(右側)에 북비문(北扉門)이라 편액(扁額)된 일각문(一角門)이 있는데 낮으막한 간장(間墻)의 이 문(門)을 들어서면 반듯한 마당이 있고 그 마당 남(南)쪽에 북향(北向)한 4간(間) 건물(建物)이 고졸(古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호위무관(護衛武官)이었던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가 세자(世子)의 참사후(慘死後) 1760년경(年頃)에 입향(入鄕)하면서 결구(結構)하여 우거(寓居)하게 되었는데,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사모(思慕)하여 아예 집을 북향(北向)해 짓고 대문(大門)도 북(北)쪽에 내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북향재배(北向再拜)하였다 한다.

 

이로 인하여 후일(後日) 북비공(北扉公)이라 칭(稱)하게 되었다.

 

가전(家傳)에는 1810년경(年頃),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규갱이 정침(正寢)과 사랑채를 신축(新築)하고 북비문내(北扉門內)의 맛배집은 서재(書齋)로 개수(改修)하였다 하는데, 정침대청(正寢大廳)의 상량(上樑)에「금상이십일년(今上二十一年) 신사이월초구일(辛巳二月初九日) ………」란 묵서명(墨書銘)이 있으나 끄으름에 끄슬려서 다 읽어 내려가기 어렵지만 금상이십일년(今上二十一年) 신사(辛巳)는 순조(純祖) 21년(年)으로 서기(西紀) 1821년(年)에 해당하니 묵서명(墨書銘)에 신빙성을 더 둔다면 가전(家傳)의 1810년(年)이란 기록(記錄)은 21년(年)의 오류(誤謬)로 볼 수밖에 없다.

 

순조(純祖) 기사년(己巳年)(1809년(年))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한 이원조(李源祚)는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고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를 역임(歷任), 정헌(定憲)의 시호(諡號)를 받았는데, 1866년(年)에 이 집을 중수(重修)하였으며 이때 완성(完成)된 건물(建物)이 현재(現在)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장판각(藏版閣)1동(棟)과 안대문채는 없어지고 남아있지 않다.

이 집은 비교적 연대를 믿을 수 있는 건물로 한옥 주택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좋은 자료이다.

 

 

 

대산동 북비 고택

 

대산동 북비 고택 시도민속자료44호(성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