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서울민속문화재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31호 조경묘출토유의일괄 (趙儆墓出土遺衣一括)

오늘의 쉼터 2011. 10. 3. 10:33

 

 

 

종 목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31호
명 칭 조경묘출토유의일괄 (趙儆墓出土遺衣一括)   
분 류 유물 / 생활공예/ 복식공예/ 의복 
수량/면적 일괄(27점)

지정(등록)일

2002.08.16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2-1 서울역사박물관 
시 대 /
소유자(소유단체) 서울역사박물관
관리자(관리단체) 서울역사박물관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공보과 02-731-1171

 

일반설명

 

조경(趙儆)(1541~1609)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어 한양 탈환의 계기를 만든 인물이다. 임란(壬亂) 이후로는 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과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을 역임하였고, 선조 37년(1604)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공적을 인정받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等)에 책록되고 풍양군(豊壤君)에 봉하여진 바 있다. 조경(趙儆)의 분묘에서 출토된 본(本) 유의(遺衣)들은 묘주(墓主)의 생몰 연대가 임진왜란 전후인 바 전반적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의 과도기적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러한 양상은 액주름포의 주름 형태 및 전삼(展衫)의 존재,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및 경국대전(經國大典) 상에 대사헌(大司憲)이 착용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 해치 흉배가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을 지낸 조경(趙儆)의 묘(墓)에서 출토된 사실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전 시기와 동 시기 기타 분묘의 출토(出土) 유의(遺衣)에서 나타나는 특징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단령(團領)과 답호의 무에 있어서 뒤돌림의 안자락 상단이 겉자락보다 짧으며 그 짧은 만큼의 분량을 소매 겨드랑이 밑에 붙인 것도 매우 특이한 점이다. 복건(幅巾)은 머리를 포함하여 어깨 위 상체까지를 덮는 기능을 갖춘 것인데 다른 분묘 출토 유물과 달리 매우 크다는 점에서 특이한 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현재까지 발굴된 분묘 유의(遺衣) 중 처음으로 출토된 해치흉배(??胸背)는 얇은 옷감에 금사(金絲) 등으로 매우 정교한 수를 놓아 완성한 것으로서 보존상태도 매우 좋아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지금까지 발견된 조선 전기(임진왜란 이전)의 유물과 비교할 때 본 유물들은 전반적으로 옷의 질감이 곱고, 바느질이 정교하며, 마름법도 독특하다. 본(本) 유의(遺衣)들은 출토지(出土地)와 연대(年代), 묘주(墓主)의 인적사항이 분명하고, 조선 전기와 후기 복식의 과도적 변화 양상을 확인하는 기초자료가 되며, 특히 오늘날 서울특별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을 역임한 인물의 유의(遺衣)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경 묘출토 유의일괄 시도민속자료31호(종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