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인생전략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

오늘의 쉼터 2011. 5. 23. 20:43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로 살아가는 법

 

  

  서문 '혼자'라고 느끼는 감정
 

"고양이와 돼지와 개구쟁이,  그것은 진정한 사치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
간 관계의 사치이다." -생 텍쥐페리- 
    
   타협하지 않는 고양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가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과 만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이때, 당황하지만, 바로 그 수간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나가려고 할 것입니다.
삶은 우리에게 아주  성숙한 견해를 요구하기도 하고,

이미 결론이 내려진 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또 가슴속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기도 하지요.
  어릴 때 나는  고집이 세고 사교성이 없는 데다, 아주  내성적인 아이였습니다.
가끔 나에게  "저앤, 돼지 성격이야!"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한 사람들에게 환심을 사려고 외롭게 처박혀 연구를 했지요.
그때 읽은 책들, 끝없이 이어지는 꿈과 내면에 쌓여 가는 생각들,
그리고 동물들(당나귀,고양이,돼지등, 그들 사이에서  나는 그들의 가족인 셈이었다).....

그 외에는  친구가 없었지요.
나는 커플링의  소설 중에서 <단 혼자서  가는 고양이>를 특히 좋아했습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었으니까요.
어찌보면 거기에 나오는 고양이가 꼭 나를 닮은 것같았지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가끔씩 반복해서 읽게 된 대목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대목은 "단 혼자, 나는 혼자서 그걸하고 싶어....."였습니다.
누군가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하거나 후견인 또는 선생이 되겠다고 자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선생들을 멀리한다면, 그들은 돕는다는 구실로 당신을 더욱 숨막히게 하고,

결국은 당신의 삶을 방해하게 될 겁니다.
키플링의 <단 혼자서 가는 고양이>는 인류가 처음생겼던 시절,

동물들이 인간의 지배에 순순히 복종하고
인간이 주는 안락한 기쁨에 순종하는 가축이 아닐때의 이야기입니다
. 이 중에서 개는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첫 번째 동물입니다.

그리고 망아지와 암소가 곧바로 자유를 포기하게 되지요.
이 세동물은 인간에게 아주 유용한 동물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식처와 쉽게 얻을수 있는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자유를 포기했던 것이지요
. 하지만 독립적인 생활을 하려 했던 고양이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단 혼자서 가는 고양이다. 나에게는 어느 장소든 다를게 없으니까."

고양이는 오만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기와 노는 것만은  받아들였으며, 본능에 의해 가끔  생쥐를 잡는 일에만 동의했지요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독립에 대해서 썩 만족해하지는 않았습니다

행복한 고양이를 상상해 볼까요?
고양이는 혼자이기때문에 행복한 게 아닙니다.

다만 삶의 여정에서 만나 우정을 나누게 될 존재들이 자기와 같은 고양이들이며,
그들이 결핍을  느끼거나 다른 뭔가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는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자유의휘파람을 불고 있는 온전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혼자 살아가는 고양이는 우정과 모든 진정한 관계의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커다란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얻어낼 수 있는  가치 말입니다.

우정은 누구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신의 선물이며,
그것을 주고받는 존재들간에 오가는 선물입니다.

반면에 사랑의 감정은 선량한 많은 사람들을 그 감정의 노예로 만듭니다.
나는 동물을 무척 사랑합니다.  동물들이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
도 알고 있지요. 특히  우정에 대해서....

개구쟁이들과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던 미국의 한 인류학자는,

 "모권제와 평화적인 개구쟁이들의 사회는 힘이나 능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정과 상부상조에  근거하고 있다"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하자면 가장 신중하고  영향력있는 개구쟁이는 공포를 체험하게 하는  자가 아니며,

정복적이고  공격적인 자도 아닌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회적인 관계를  잘 맺을 줄 알 뿐만 아니라 우정이 풍부한 자이기도 하지요.
 고마워, 개구쟁이들아! 너희들 덕분에 인류 사회에 대한 간략한  묘사가 이제 형체를

이루게 되었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을 벗어나서


우정이라는 것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그 결실을 맺는 일은 그만큼 인격적으로 성숙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바로 우정의 특징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독, 성찰, 침묵, 고난....

이러한 과정을 겪어나가는동안 훨씬 더 인격적인 성숙을 이루게 되지요.
우정에 대해 가장  개방적인 사람들인 독신자,

이이 없는 부모,  가족 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람...
이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우정을 만들어 나가기가 쉬운편입니다.

그리고 우정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도 가장 풍요로운 자들인 셈입니다
. 이들은 우정을 연마하기위해 애를 쓰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자신들이 부부 또는 가족  관계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람들이라면
우정의 즐거움으로 열중할 수 있습니다

우정은 혈연관계,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힌 관계와는 구별됩니다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육체적인 속박을 거치거나, 

두 사람의 인생을  결합하거나, 출산의 경험을 함께 겪을 필요가 없는 존재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정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은 길에서  찾을 수 있으며,
심지어 규율이나 관습의 벽을 깨는 파괴적인 측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우리는 보통  사랑의 열정에 휘말리게 되곤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해 방황하기도 하지요.
사랑의  감정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만족감을 느끼려 하고,

그 외의 다른 평화로운 세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은 채 스스로
자신의 그 감정에 지쳐버리지요

이처럼 사랑의 열정은 누구에게나 의무적으로 거쳐가는 단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열정에 휩싸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덧없는 욕구를 추구하게 되고,

체계화된 감정과는 다른 뭔가를 자꾸 발견하려 합니다.
  그런데 우정은 사랑의 열정에 휩싸여 있을 때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찾게 하는 어떤 요소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열정을  쫓는 일에 비해 우정을 만들어 가는 일이 훨씬 더  쉬울 수가 있습니다.

우정은 육체적인 외양을 중시하는 다른 관계들에서보다 더 미묘한 어떤 것들,

더 감춰져 있는 인간의 여러 가지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랑의 신화


  오늘날에는 사랑의 감정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온갖 부정적인 비판이나 역효과를 낳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신화는 언제나 동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아름다운 꿈을 꾸게 하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게 하고, 달려가다가 넘어지게도 합니다.
  사랑의 감정은 곧  하나의 신화이기 때문에,

 이  신화를 쫓는 사람들은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도 잘 버텨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일상적인 실체는 아니니까요.
그래서 신화의 의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자아의 한계를 넘어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감정에 도달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원탁의 기사 시대에  숙명적인 사랑을 나누다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함께 죽은, 트리스탕과 이죄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의 신화 대신에 아름다운 우정에 접근한다면, 

진실한 감정을 주고받으며 상대방과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만나려 한다면,

우리는  사랑의 신화를 추구하려 했던 바로 그 대상과 또다시 새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랑을 체험한다는  것은 대부분 사랑을 받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랑받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 사이에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은

사랑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드문 편입니다.

우정은 몽상이나 상상, 환상, 신화에 근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것들에서 시작되지도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대인들이 옳았습니다. 그들은  우정을 '선한 사람' 또는 '덕이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귀족적인  감정으로 생각했으니까요. 왜냐하면 우정은 삶의 의무이며,

정신을 고양시키는 것이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대우를 하면서 애타주의에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열정은 그 열정이 식었을 때 더 이상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고, 열정이 식지 않았다 하더라고

품위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정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 사랑의  열정에 모든 것을 바치는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보다 푸르고 넓은 세계를 경험하려는  생각도 희망도 없이,

즉 우정이 있는 새로운 세계에 접근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육체의 본능과 쾌락에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애초의 감정에 균열이 일어나 실패를 경험하거나, 애써 쫓은 사랑의 결과에 낙담하게 되거나,

결혼 후의  이혼 등을 경험할 때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제기합니다.

다른 유형의  인간 관계들의 실체 사이에, 즉 애정, 우호적인 관계, 존경하는 관계,  신뢰하는 관계 등에서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않는 독립적인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우정과 비교하여 다른 그 무엇을 찾을 수 있는지 말입니다.

 

    우정의 힘

 

  우정은 불행한 사랑에 대한 보상이나 위로가 아닙니다.

또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선택할 여지가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정은 상대방을 독전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존재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낭만적인 사랑을 포기하는  대신에 우정의 힘을 입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끝없는 욕구, 육체적인 속박, 가정에 얽매이는삶, 아이의 삶, 아이의 탄생과 교육,

그러한 과정들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질문을 하다 보면 사랑과 결혼의 연결은 하나의 형식이며, 사회적인 협약이며,

달콤한 꿈을  추구하는 인간의 문화적인 유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일 들 때가 있습니다.
우정은 삶의 연륜을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한 개인이 진보함에 따라 그 깊이나 폭도  변해 갑니다.
유년기를  벗어나 사춘기에 접어들고, 한창  청년기일 때의 우정은

꽤나  단순하고 직접적인 감정에 불과합니다.
서로에 대한  애정, 함께 있겠다는 약속, 시간과 여가를 함께 나누려는  약속 등을 하지만,
사실상 이러한 약속은 우정을 빼앗아갑니다.

고등학교 시절의 우정과 휴가철에 얻게 된 우정도 잠깐의 그 시기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그러나  삶의 여러 단계를 통해서,
우정은 예기치 않았던 만남에서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표출될 수 있습니다.
우정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힘이며 행복이기도 합니다.
어떤 때엔 우정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주  잘 결합된 부부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성숙할수록 도덕적, 정신적인 사랑의 방법과  그 지표를 보여줍니다.
우정은 한 개인의 온 존재를 감싸주며,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 함께 동반하는 것이니까요.
반면에 감상적인  사랑, 육체적인 사랑은 그 관계가 최대한  수십 년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인간이 누구나  느끼는 욕구와 쾌락, 사랑의 감정, 사회생활,

정신적 삶과의 만남 등이 될 것입니다.
내가 만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모든 사례들에대해서 증언을 듣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나는 나의 경험 속에서 깨닫고 느낀 것들을 통해서  이 문제를 논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모든 경험이 특수한 것처럼, 여기서  나는 우정과 사랑에 대한 진실을 이끌어낼 의도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알게  있는 것을 말할 뿐이며, '인간에게는 우정이 깨달음의 훌륭한 도구'인 셈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1. 불확실한 경계


  "인생에서 우정을 빼앗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태양을 빼앗는 것과 같다." -키케로- 
   
    간단한 애정 표현


  인간의 모든 만남은 무한한 가능성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에서 생겨나는 감정은

사실상 불확실하여 친화력, 호감, 친절,액착, 사랑의 감정, 애정, 편애, 우정  등의 확실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상대에게 어떤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어느 쪽으로 쏠릴 것인가를 전혀 예측 할 수 없는 걸까요?
  그러나 애정의 관계에서 경계선을 긋는 일이나 이와 관련된 규범은 도덕적, 사회적인 질서를 위해서 

필요할 뿐입니다. 이러한 질서는 개인을 보호해  주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한  주인은

자신뿐임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정과 사랑은 어느 지점에서 분리되는  것일까요?

그 두영역 사이의 경계는 어떤 걸까요?

사람들은  이것이 구별되는 지점에 대해 알고 있고, 그것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정은 성관계, 즉  사랑의 행위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정은 일종의 성행위가 없는 감정으로 정의 할수 있습니다.

물론 우정의 관계에서도 간단한 육체관계(애정의 몸짓,  입맞춤, 감미로운 말,포옹등)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하는 사랑의 욕구이며,
인간적으로 느끼는 갈증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우정은 상대의 육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육감적으로 상대에게 이끌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의 육체로부터 어떤 즐거움을 끌어내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정은 상대의 몸을 존중하고, 그것에 관해  깊은 생각에 잠길 수는 있지만 상대방을 반드시 나의  것으로

소유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끝까지 자기 옆에 붙들어두려  하거나

상대의 육체에 탐닉하도록 자신을 방치해 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보다 그 감정이 깊고  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우정은,

상대방의 전부를 사랑하고 상대의 독립성을 존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에 무관심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수도자가  아니므로, 억지로 금욕하거나 무소유의 경지를 훈련해야 할 때  많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우정은 중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별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진정한 도전을 요구하고, 그 관계의 성격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갖게 합니다.
 
    연인 사이의 구름다리


  중세의 켈트족 이야기에서, 특히  페레뒤르의 켈트족 이야기에서 두 연인이 나누는 완벽한 사랑은

설교와도  같은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영웅 페레뒤르의 모든 운명을 나타내는 갈색 머리의 지고한

여성은 이렇게 밝힙니다.
  "그대는 내가 사랑하는 유일한  남자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예요."
  그녀는 페레뒤르에게, 그가 세상의  그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두 연인은 곧 사랑의 증표를 교환하게 되지요.
  우정은 서로간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애정이나 사랑에 약간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우정은 어느  날뜻밖의 상황으로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그건 행복한 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모든 사랑의 감정, 배려와 헌신을 억지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능력과 마음을 열어나가는 능력을 좋아하는 일입니다.
  페레뒤르의 그의 연인사이에 교환된  증표를 통해 우리는 사랑의 열정,

그리고 완벽한 사랑 사이에는 천성적으로 또는 계급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설적인 이야기나  훌륭한 세계 명작들 속에서  사랑의 감정을 잇는 연인 사이의 구름다리는 

많이 존재하지만, 우정은 일반적인  사랑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정은 에로스적인 사랑이나 성행위를 중시하는  관계보다는 진정한 인간의 사랑에 더 가까운 관계입니다.

17세기의 도덕주의자들에 이어 정신분석학자들은 이 두 관계를 끈질기게 '증오'와 '사랑'이라고 지칭하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들은 증오와 사랑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유사성에 대해 강조한 것입니다.

욕구로 인해 발휘되는 힘과 정열의 강도는  가끔씩 모든 감정이 결핍된 채 폭력으로  끝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켈트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들, 궁정의 여인들,

그리고  고대 프랑스인들은 우정과 사랑의 차이를 거의 두지  않았습니다.

이 두 용어는 가끔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말이었지요.
  어느 기사는 자신의  무훈담을 귀부인에게 들려주면서,

그 귀부인을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죄는  자신의 애인 트리스탕을
'멋지고 부드러운 친구'라고  불렀지요.

이것은 상대방을 자신의 친구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정 또는 사랑을 일치시킨다는 것은 상대방을 온전히 다 사랑하는 단계에 들어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남자 친구이든 여자친구이든, 적어도  친구라면 상대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비용은 친구들간에 나누었던 우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오로지 한 마음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몽테뉴는 우정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각각 상대방이 지닌  모든 것의 절반입니다.

나는  그녀에게서 그녀의 몫을 훔친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남자 친구, 여자 친구


  17세기에는 사랑과 우정이 여전히 밀접한 관계로 혼재되어 쓰이고 있었습니다.
스퀴델리 양이 썼던 [사랑의 나라 지도]는 '새로운 우정'이라는 특별한 명칭이 붙은 곳에서 시작되는

사랑 여행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남자는 자기 아내  또는 딸을 '마미(나의 여자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마아미(ma amie)'가 마 미(ma  mie)'로 줄어들었고, '(m'amie)'로 짧게 발음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은 '아미(amie)'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흔히 친구 관계를 지칭하는 말과, 결혼하지 않은  어느 여자가 자신과 함께 사고 있는 남자를 의도적으로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결혼하지 않은 남자가 함께 살고 있는 여자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이지요.

그것이 '내연 관계'라는 말보다 더 품위 있어 보이고, '내 남자(떠는 내 여자)'라는 말보다 우아하며,

'나의 동반자'라는 말보다는 남들에게 더 젊게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청년들은 그 관계가 수년간 지속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  그 소년 또는 소녀가 자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되었을 때도 '친구'라는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합니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나의 친구(남자  친구 또는 여자 친구)'라는 말은 일시적인 측면,

또는 막연하거나  은밀한 측면이 있는 듯합니다. 부담없는 사랑의  관계 같기도 하고,

스스로 감추고 있는 감정 같기도 하지요.
 반면에 '나의 남편'또는  '나의 아내'라는 표현은 여전히 보다  더 진지하고 심오한 것처럼 들립니다.

즉 친구는 바꿀수 있지만,  남편과 아내는 바꿀수 없는 존재가 되지요.

여기서 흔히 남편과 아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전통적인 가정의 굴레를 강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영원성의 취향을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요?
  친구라는 말은 사랑의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 공식적인 호칭을 바꿔 달았지만,
동료의 영역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남녀 사이의 친구라는 말은 감정적이고 성적인 관계를 내포하지만 

사회적인 규범(공식 결혼)을 무시하고 있으며, 

그 상징(종교적인 성례,  정신적인 결혼)을 배제하고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불확실한 사이를 규정짓기 위해, 그것을 폄하하는 태도로 우정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우정에 관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싶어하는 걸까요? 자신이 직접 느끼는 것이든 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듣는 것이든, 사람들은 사랑의 감정과 열정에 대해서 격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를 만들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 감정을 즐기고, 그 사랑  때문에 말문이 막히고,

정신이 혼란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그 관계속에 자신이 빠져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나머지를 발견할 시간도 ,  호기심도, 에너지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그 나머지'의 의미는 모두 우정으로 생겨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성이 배신당한 날


  17세기 남부 프랑스 지방에서는 사랑의  감정을 자신들의 세련되면서도 까다로
운 감수성을 통해 표현한  음유시인들이 형성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랑의 세계와
그 여성성-여자와  마찬가지로 남자에게도 '마  아무르(나의 사랑)','마 무르(나의
사랑)'라고 노래부르곤 했다-을 표현했는데, 이러한 것들이 당시의 언어 편찬자와
검열관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을 겁니다.
  1718년에 프랑스 학술원은 사랑이란  단어를 남성 명사로 쓰도록 했습니다. 결
국 이 중요한 주제는 남성들의  몫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성 명사로 쓰이기 시작
한 사랑은 이제 모든 여성의 날개를 자르고, 그 신비를 갉아먹게 하는 좋은 수단
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변화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사랑의  세계에서 남성다
움이 확대되었다는 사실일까요? 남성들이 자신의 마음에  일고 있는 뭔가를 알고
있으며,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일까요? 그런데 여기서 형태 그대로 있었다
는 것입니다. 마치  우정은 시샘을 하거나 무관심한 것도 아닌,  하나의 대지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남성들은 우정을 굳이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우정은 남성적인 모델에
비해 열등하고 무능력한 여성의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성들은 프레시오지테(17세기 프랑스  문학에 있어서 우아한 몸가짐과
예절, 지적 능력, 세련된 취미  등으로 타인 또는 여성들의 환심을 살줄 알고, 유
머와 재치가 뛰어나며 상대의 심리적인 변화까지 통찰  할수 있는 능력을 가질수
있도록 추구하는  사교인들의 정신)시기 동안 우정으로  여성들 상호간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너무나 여성다운  접근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들은  정신적인 측
면에서 우정을  이끌어냈는데, 이것은 남성들이 우정을  단련하게 되는 전쟁터나
체육관과는 동떨어진 측면이라 하겠지요.
  우정은 아직 여성  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자, 그 사실을  이용해 볼까요? 미
지의 땅에서 피어난 우정의 가장 감미로운 맛을 이끌어내 보기로 하지요.
   
    단짝 친구들이 빠질수 있는 함정


  수세기 동안  프랑스에는 친구라는 단어가  '귀여운 친구'또는  '착한 친구'라는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은 본래의  의미를 잃게 된 채, 떼려야
뗄수 없는 관계를 지칭하기 위해서 비유적으로 쓰인 표현들입니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친구 관계를 '떨어질 수  없는 사이', '나쁜  짓을 하려고
작당하다'라는 의미에서 사용했고, 19세기에는 '절친한 친구(본래 의미는 '돼지 같
은 동료들'이라는 뜻이며,  19세기에 동료라는 말은 '단짝  친구'라는 뜻으로 쓰였
지만 그 의미는 똑같다)'라는 표현들을 유산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후 다시 돼지
(cochon)라는 단어를 등장시켜'선량한 짐승'이라는  뜻으로 우정을 나타내게 됩니
다.
  사실 프랑스어의 돼지라는 단어는 '협력자,  동료'를 의미하는 라틴어' 소시우스
(socius)'가 변형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정을 선량한 짐승과 맺고 있는 어떠한 관
계로 표현했다 하더라고,  이것이 돼지의 얼굴을 장밋빛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결국 이러한 표현들은 남성들의 우정을 규정하는 것이었고, 그 관계 역시 아리스
토텔레스, 키케로, 몽테뉴가 생각했던 것처럼 덕성에  대한 찬사와 대항심에 근거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질그릇이 '도자기'라는  말과 동의어이듯, 친구라는  말은' 단짝'과 같은 의미로
쓰입니다. '단짝 친구들'이라고 하면 일단 한가롭고 재미있는 관계를 유지해 나가
는 무리를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무리 속에 섞여 서로간의 개성
이 뒤섞이거나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함께 모이고 헤어지기
때문에 서로 가까워지게  되며, 이 무리속에 연대감이  있다고 스스로 믿게 됩니
다.
  그런데 단짝  친구에 관해 솔직히 따져보면,  그것은 진정한 우정이라기보다는
약간의 정치성을  띤 관계입니다. 또  말하는 방식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민중을
선동할 때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예수는 물론 이보다  더 좋은 말을 했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단짝 친구로 표현되는  관계는 진정한 우정의 세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친분 관계를  뜻할 뿐이며, 혼재되어 있는 모든 개인들을 뒤섞여
버리고 맙니다. 반면에 우정은  자신에게 유일한 어느 존재를 선택하는것에 근거
하고 있습니다.
  흔히"우리들은 단짝 친구"라고  말할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모두  같은
갤리선(사실 이것은 비참한 형태일 수도 있다)에 타고 있다"라고 밝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인을  단짝 친구로 간주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자신
과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상대방의 특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
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통해  타인에게서 인류애를 느끼는 것과 같은 감동을 느
끼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단짝 친구는 서로 가까이 있으므로 같은 사실을  느끼고 있다는 점을 상상하도
록 되어 있으며, 서로 반말을 나누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려는 차원 사이에 양다리
를 걸치고 있는 셈입니다.
  이에 반해 우정은 귀족적인 감정에 머물러 있으며, 타인을 존중하는 신성한 공
간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과 존댓말을 쓰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도덕적, 정
신적인 이상을 내포하고 있는 관계입니다.
  우정은 자신의 개성이나  특성이 상대방과 적당히 뒤섞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
습니다. 서로 도저히 양보할  수 없는 차이를 인정하게 하고, 대체될  수 없는 이
타성을 참조하게 합니다. 우정은 보다 많은 의무와 진 정성을 위해서 일 대 일로
대면할 것이 요구되며,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를 더 중요시합니다.  친구들은 여
러 번 이동하며, 그 과정에서  단짝 친구는 성격이 모호한 하나의 군을 형성합니
다.
   
    대가 없이 마음을 주는 것


  역사 속에 남겨진 업적들  가운데 우정에 대한 부분은 보잘 것  없는 가문처럼
취급된 채, 유명인사가  된 부부들과 위해한 사랑  이야기에 특혜를 주고 있습니
다.
  기원전 6세기에 씌어진 도덕론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절]이란 책이 있습
니다.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아들  니코마크에게 헌정한 것입니다. 여
기서 그는 선, 행복,  덕성, 정의, 우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철학
은 자유인, 교양인,  성찰인, 덕을 실해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그
리고 그가 말하는 우정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덕'이며, 어쨌든
'우정이 미덕을 동반하게 될 때 유용성과 매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정은 애정, 기쁨, 도움 협동심을 바탕에 깔고있습니다. 만일 도덕적인 감정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정은 곧 사라져버릴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
정이라는 말로 표현될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우정은 상호 관계 또는 상호성 속
에서 두 사람의 인격적인 동등함을 전제로 하고  있고, 권리가 내포돼 있는 정의,
의무, 의연함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흥미 없는 것이기도 하지요.
우정은 자신의 친구를 위해  선행을 하거나 어쨌든 그렇게 해 보이는  것을 원합
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진실한 친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것을 위해  살아 있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원전 1세기경 키케로는 정치에서 은퇴한 후 딸  튈리아의 죽음을 접하게 되
었습니다. 이때 그는 까다로운 여인 테랑시아와의 어려운 부부 관계에 대해 철학
적인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마음을  달랬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우정론]에서는
렐리우스가 등장해서 말을 합니다. 이  책은 인간의 삶에 활력을 주고 몸을 따뜻
하게 해주는, 태양에 대한 진정한 찬가입니다.
  키케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시각을 뒷받침하면서 "나의 견
해는 선한 사람들  사이에만 우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미덕만이 두 명의
진정한 친구를 만들어주며, 그 들 사이에 우정이 지속되도록 해준다"라고 주장합
니다.
  키케로는 혈연 관계보다 우정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에 의
하면, 우정은 예의와  애정 없이는 생길수 없습니다. 반면에 혈연  관계에는 마치
반감, 악의,  증오 등이 그속에 들어  있기라고 한 것처럼 이러한  감정이 머물러
있습니다. 키케로는 덕성의 세계에서 우정을 너무  높게 위치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우정의 최고 경지에는 최고의 선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이것은 때
에 알맞고 부담이라고 없는, 우아함으로 가득 찬 관계입니다.
  우정에서  존경을 따로 떼어낸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를 빼버
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정은 점착력이며, 경쟁심이며, 서로간의 '완전한 일치'입니
다. 키케로는 이것이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길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
한다는 건 누군가에게  대가 없이 자신의 마음을  주는 것이지, 필요에 의해서나
그로 인해 이익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라고말입니다.
   
    그 사람 때문에, 나 때문에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이 중에서 일부분을 우정에 힐애했습니다. 그는 보편적인
우정과 완벽한 우정을 구별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여성들은 완벽한 우정을 나누
기 어려운 것으로  평가되는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우정의 아름다움
은 정신적인 질서에 있으며, 우정은  영원과 절대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여성은 완벽한 우정을  나누기 어렵다는 것인데, 여성은  정말로
이러한 경지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걸까요?
  철학자가 알고  있는 '진귀하고 품위 있는'  우정이란 같은 이상,  지적인 교류,
생동감 있는 애정의 공유로 자라납니다. 연인들이 사랑을 나눌 때 오로지 육체적
인 결합에만 열중하고  있다 하더라도, 진정한 친구들은 '두 몸으로  이루어진 한
영혼'으로 살아갑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몽테뉴가  말하는 우정은 다른 감정과  비슷하게 우정
이 심리학의  영역에 가지런히 놓여지는  대신, 도덕의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즉 우정은 영혼의 고양이며, 완전한 인격을  추구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정은
결코 다른 것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우정은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는
것이며, 잔인성이나 비속함들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이지요.
  우정은 방황이나  편류를 배제합니다. 정신의 세계보다  상위를 차지하고 있으
며, 특별한 대우를 보장받고  있습니다. 우정을 나누는 것, 우정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근본적이고  의식적인 일치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특별하고
영웅적인 우정이 있을 뿐이지요.
  역사, 신화, 문학 등에서 그 사시리을 잘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
훈, 자신에 대한 초월, 지혜의 탐색, 이해 관계를 떠난 행동, 애타주의적 행동, 예
술적인 착상, 철학적 성찰,  신성에 대한 사랑에 의해 두사람이 만났습니다. 그들
은 아쉴르와 파트 피카소,  햄릿과 호라티오, 생 텍쥐페리와 귀요메, 카프카와 막
스브로 등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랜 친구


  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고대 수메르에서 생긴  문명이 우리가 사는 지구
의 최초  문명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놀랍게도  [길가메시의
서사시]가 두 남성간의 아주 아름다운  우정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
다. 우 두 친구는 길가메시와 엔키두이지요.
  여신의 아들인 길가메시는 유명한 건축가인데, 그는 우루크(Uruk)의 도시를 다
스리고 있었습니다. 한편 엔키두는 여신의 명령으로  점토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무꾼과 유사하여 외딴 곳에서 살았으며, 미개인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엔키두를 찾아온 한 시녀와의 만남이 그를 연마시켰고, 그를 다
스렸습니다. 그는  곧 사랑의 기술에  눈뜨게 되지요. 시녀는 그에게  길가메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그대는 또 하나의 다른 그대처럼 그를 사랑하
게 될 것이오" 라고 예언하면서 말입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위엄 있는 도시  우루크에서 엔키두는 처음으로 길가메시에
게 말을 걸려고 다가갑니다. 비슷한 힘을 두  남자는 맞닥뜨려 싸움을 합니다. 하
지만 싸움의 결과는 우정을 향해 문을 열게 됩니다. 이 우정은 상대의 강한 힘을
인정하는 것이며, 상대와 자신의 동등성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또 갈등과 장점을
초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후로 엔키두와 길가메시는 서로  떨어질수 없는 형제가 됩니다. 그들이 함께
하는 첫 모험은 '지상에서 악을 쳐부수는' 고상한 구상으로 시작됩니다.
  5,000년이 지난  후에도 이 우정은 지혜,  불멸성, 선, 아름다움  진실의 추구를
통해 두 인간의 존재를 결합시키는 관계의 원형으로 남아 있습니다.
  길가메시와 엔키둥의 우정은 찬사와  초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변
류하는 힘입니다. 우정은 각자를 더 훌륭하게 해  주었고, 그들 두 사람 모두에게
세상을 더 좋게 만들도록 부추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악은 지상에서 계속  번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정은 우리에게 내면
의 정원에 자라는 잡초를 뽑게 하거나, 사막에 꽃을 피우게 할 기회를 주고 있습
니다. 타인들과 세상에 대해 우정 어린 시선을  던진다는 것, 그것은 이미 지상에
서 악을 물러나게 만드는  방법입니다.이러한 우정의 경험은 우정이 매력으로 인
한 것이라기보다는 화합으로 맺어지는  관계임을 알게 합니다. 곧 우정은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진실한 친구는 정신적인 여정에서 큰 도움을 줍니다. 이것은 우정의 심오한 의
미이기도 하지요. 석가모니는 우정의 역할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만일 그대와 삶의 여정을 함께할 현명한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대
는 정복을 끝낸 후에 할 일 없는 왕처럼, 또는 숲속의 코끼리처럼 계속해서 고독
하게 될 것이오."
   
    우정에 접근한 여성들 


  지금까지 여성들은 우정을 유지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처럼 소외되어 왔고, 점
처럼 우정에 끼여들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관계가 요구하는 위대함과
고귀함, 완성미의 추구에는 참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여겨졌지요.
  실제로 남성들은 전쟁터에서 그들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가졌고, 그러면서 자
신들의 영역을 확대하고 넓혔습니다.  그러는 동안 여성들은 뒤에 숨어서 익명인
채로 생을 살아왔습니다.
  남성들은 피의 의식에 의지함으로써(각자의 피를 섞거나 마심으로써)우애 관계
의 협약을 교환합니다. 반면  육체와 관련된 사랑의 이야기는 여성들에게 귀속되
었습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남성들은 영웅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에서 우정을 보유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끔  여성들과의 관계에서는 우정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면서, 일부다처제로 인한 의심, 증오, 질투의 감정이
여성들간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기도 합니다. 남성들이  오래도록 세상을 지배해
왔던 이유는 이처럼 여성들을  세분화해 왔기 때문입니다. 여성들이 서로 다투면
서 적대감을 느끼는 동안 남성들의 힘은 더욱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성들은  수세기 동안 여성들이 우정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시켰
던 걸까요?  남성들은 여성들이 지닌 감성,  감정의 최상권을 공감하고 있었습니
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혁명을 이루지 못하며, 감동이나 애정, 모성적 사랑으로
는 인간이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남성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혈연관계와
생식의 필요성으로 인해, 남성들은 규방에 빗장을 지름으로써 남은 일을 했던 것
입니다.
  우정이 만일 영웅적인 특성과 다른  그 무엇이라면, 그리고 애정 또는 다른 사
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 불과하다면, 여성들은 보다 일찍 우정에 참여했을 것
입니다. 또 여성들이 족장사회, 계급사회에서 우정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면, 그것
은 동등성의 본질에 의해 그 관계가 자유(또는 반항)의 요인을 구성하고 있기 때
문입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여성들이 교양 있고 지적이며, 독
립적이고, 남성들보다 상위에  있으며, 또 남성들을 초월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중세의 궁정 귀부인들, 17세기초에 글을  쓰거나 살
롱을 운영하던  귀부인들, 철학자, 과학자, 작가들로  둘러싸여 있던 18세기의 그
유명한 귀족계급 부인들이 그녀들입니다.
  라 브뤼에르는 "중세에 태어난 사람들의 순수한 우정에는 어떤 취향이 있었다"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사실상 여성들은 지식에 접근하듯이 우정에도 접근했습니
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성들에 의해 지켜지고 있던 이중의 보루(자유,저항,  교리
등)을 비난했던 것이지요.  남자와 같은 능력을 갖춘,  자신의 여성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들은 우정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세는 사랑을  포르네이아,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등 네가  지 단
계로 구분했습니다. 그것이  저속한 성욕이든 사랑의 욕구이듯, 우정이듯, 순수하
고 보편적인 사랑이든 말입니다. 그런데 우정은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고, 인간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진정한 사랑과  가장 근접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필리아는 아가페의 시녀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아가페의 대사라 해
야겠지요.
  필리아는 에로스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욕구,
육욕에 대한 갈증,  융화와 대상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취향을 가진 에로스는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앙양시키는 교육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정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필리아에서 아가페에  이르는 것에 비하면
에로스에서 필리아에 이르는 것이 더 쉽습니다.

 

    2. 자유롭게 존재하는 기술


  "나는 그것을 예술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녀는 끊임없이 자문하고,  정정하고,
사랑의 전쟁을 피하는 평화에 조인하기 때문이다."

 

    감상적인 사랑, 자유로운 풍속


  인간은 조화와 평온을 꿈꾸면서도 황홀한  사랑의 열정에 잠기도록 만들어졌거
나 그렇게 계획되어진  존재입니다. 고요한 평온보다는 흥분, 혼란,전복,  고뇌 고
뇌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더 느끼게 되는 걸까요?
  사랑에 빠진 여인은 욕망의  대상을 위해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기꺼이 말
합니다. 이  세상 끝까지라도 갈  것이며, 에디트피아프의  노래에서처럼 "당신이
나에게 사랑을 요구한다면 나는 친구들을, 나의 조국을 모른다고 부인할 거에요"
라고 강조합니다. 열정은 아주 강하고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폭풍을 체험하
기 위해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우정의 깨끗한 강가를 포기할 준비가 되
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정은 선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개인을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경우도
없습니다. 우정은 지혜의 길처럼, 지혜의 사랑을 담은 요정처럼 찾아옵니다. 그래
서인지 낭만적인 사랑보다 고객이 적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의 실패를 경험할 때, 절망에 빠져 진통제를 먹거나 정
신병원으로 서둘러 가게  되지요. 그러고 나서 그들은  더 이상의 설명도 의문도
없이, 이미 경험했던  일이면서도 또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들은 영원
히 갈망하여 세상을 유람하게 만드는 사랑의 이름으로  모든 관계를 다시 시작하
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마치 인간의 존재를 자신을 초월하기보다는 상황에 의해, 감정에 의
해 쫓겨가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처럼 일어납니다. 인간은 그 감정에 따라 살기
를 더 좋아합니다.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린 적도 없고 그것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 도무지 알수 없는, 검정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지요. 우
정은 나중의 일입니다.
  우정은 감정이 흘러가는 만큼의 세월과 함께, 혹은 그 환멸과 함께 오게 될 것
입니다. 그래서 우정은  가끔씩 평가절하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정을
사랑의 음역, 또는 열정의 음역과 비교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감상적인 사랑에 빠질수  있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마치  사랑과 우
정의 관계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그
리고 그중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흥미 있고 강하기라고 한 것처럼 배타적이며,
우정을 방해하며, 친구들을 배척하거나 저버린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결정은 타인을 향해 마음을 여는  모든 일과 모든 이행 과
정을 금지시킵니다. 이것은 자발적이면서도 감미로운  일종의 풍속이지만, 거기에
는 오로지 불행만이 생길 뿐입니다. 이러한 감정적인 혼란으로부터 찾게 되는 우
정은 그저 일시적인  구명대가 아니라 대기를 향한 창이며, 그  호소들입니다. 태
양 아래에는 이토록 발견해야 할 다른 것들도 많고, 사랑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사랑의 감정은 선택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어떤 목적을 위해 사랑의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며, 조심성없이 거기에 탐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엄격한
데카르트의 말을 부정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데카르트는 생각에 의해서만 인간이
존재한다고 여겼으니까요.
  가끔 준칙들이 미리 정해지고, 사회와 가정,  대중매체가 우리를 사랑의 감정에
몰두하게 할 때 우리는 스스로 그 감정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용이한
길,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그길... 이  너그러운 여행자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알
려고 애쓰게 될까요? 그들은 스스로를 망각하려 하며, 자신에게서 벗어나려고 애
쓰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그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여깁니
다.
  60세의 정신요법  의사인 주느비에브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우정보다 더 용이 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우정
에 대해서는 빨리 포기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본능에 따라, 사회적, 문화적 관
습에 따라, 대중매체의 이미지에 다라, 그 사랑을 위해 처신할 수 있으니까요. 반
면에 우정은 보다 더 창의적이고 능동적인 것들을 요구하게 되지요. 친구에게 신
실한 도움을 요구할 수도 있고,  도움 줄 수도 있지요. 사랑은 불가해안 요인, 눈
에 보이지 않은  요인들로부터 생깁니다. 반면 우정은 서로를 찾고,  서로를 유지
할 수 있게 해주지요. 우정은 두려움을 넘어 대담성과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우정의 관계는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남녀의 사랑 관계는
일종의 향수일지도 모릅니다. 이 향수에서 시작된 사랑 관계는 반복(서로  싫증을
느끼지 않고), 과거로의 희기와 같이  행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정은 새로운 것
을 만들어 내고, 자유를 만들어내게 될 것입니다.
  우정에 의해 우리는 결국 이 미묘한 구습, 고집스러운 이 향수병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것입니
다. 하지만 그 진부한 옛날 장난감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육체로부터 시작되는 감수성


  의사로서 융을  연구한 정신분석학자인 피에르  솔리에는 우정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과 우정에 대한 감수성은 육체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의 첫 교류는 유아와
어머니와의 사랑이다. 갓난아기의 어머니에  대한 첫인상, 첫 접촉, 애무 등은 아
주 중요하다. 어머니는  그 순간에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아이와 관련된
모든 미래는 그 첫 교류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첫인상을 플라톤
의 [향연]의 <대화>에서는 '에로스'라 부르고 있다. 에로스는 육체와 영혼 속에서
사랑의 계단을 허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철학,  아름다움에 대한 관념으로까지 고
양된다. 유아는 어머니의 시선에서 정신적인 아름다움의  반영을 보게 된다. 만일
이 접촉이 잘  이루어지면, 그 감수성은 심령현상적인  모든 능력을 보유하게 될
것이다. 즉 미의 관념을 향한 접근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나는 프로이드에 의해
정립된 무의식의 3단계(구강기, 항문기, 생식기)를 정신적  3단계(에로스,카리타스,
아가페)에 대응시키려 한다. 그래서  생식기는 남녀간의 일반적인 사랑(에로스)으
로 대체할  수 있고, 항문기는 이웃간의  사랑(카리타스)으로 변형시킬수 있으며,
구강기는 세계에 대한  사랑(아가페)으로 변형시킬수 있다. 이 세가지  단계에 일
반적으로 '사랑'이라 부르는 세 가지 유형이 부합된다. 이 세가지 유형은 그 자리
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으므로  육체적인 사랑, 소유적인 사랑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정신적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을 열게 하거나(카르타스) 세계에 대한 사랑(아가페)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이 <향연>에서의 에로스이며, 우정이다. 우리가  자애의 우정이라 부르는 정
신적 우정은 아가페의 신비적인 차원을 포함하고 있다."
  한편 정신적분석학자인 미셀 몽트를레이는 인성으로  구성되는 우정에 관해 말
했습니다. 여기에  만일 우정이 부족하거나  균열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분석을
요구하도록 하는 심각한 혼란을 유발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두 종류의 우정을 알고 있습니다. 15세에서 20세 사이의 몇몇 소년과 소
녀들의 우정은 애정과 성적  방식에 대해 극도로 단호하고 체험적입니다. 남성들
의 우정은 부성애적 관계와 형제애적인 관계 사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
지만 아주 강하게  이끌리는 성적인 상황속에 존재하는 여성의  유형이기도 합니
다.... 남성들에게 우정이 없다면  그들은 불안정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박애
적이고 부성애적인 관계가  중요하고, 보다 사회화된 우정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동일화의 지표를 이용하는 근본적인  우정입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대
칭 관계는 없습니다. 남성은 자신을 정립하기  위해서 우정을 필요합니다. 남성적
인 이미지를 띤 관계속에서만 자신을 정립할 수 있으니까요. 남성적인 인성의 구
성 요소는 다른 남성들(아버지, 선생님, 아저씨등)과의 애정적인 관계를 강압적으
로 요구합니다. 만일 다른 남성들과의  관계에서 남성적인 장점을 발견 할 수 없
다면, 남성들은 동성애적인  빛깔을 띠고 있다 해도, 여성과의 사랑으로  인해 남
편과 아버지로서 구성되게 마련입니다. 역으로 소년에게  남성들이 없다면, 그 결
핍은 적극적인  동성애로 변할 것입니다.  그 소년은 다정하고, 가깝게  느껴지는
아버지가 그리워 질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의 특성은 아들이나 딸의 정신적 구
성에서, 성적인 부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너그러움, 아
버지의 우정은  환경, 세대, 계속되어온  현존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가
존재한다는 것, 자신의  아이와 함께 하기를 좋아하는 것, 그리고  가정의 전통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의 교류


  우리는 사랑을  하며, 더러 사랑의  감정으로 회귀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세계는 항상  위태롭습니다. 그 무엇도 얻어진  것이 없는 것 같고,  항상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야 하며, 상대방을 감동시켜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기
를 바라는 동안 상실과 고통의 번민이 있기도 합니다.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안정
한 것으로  느껴지는 사랑의 관계에서 우리는  의심과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불확실을 예방하기 위해 미래를 구상합니다.
  우정은 상호성을 갖는  것이므로, 서로의 정신과 영혼이  교류됩니다. 친구들은
오랫동안  혹은 평생토록 서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갈색 머리이며 언제나 미소를 띤 시골 태생의  처녀인 모니크는 이렇게 증언합
니다.
  "우정은 처음에 대상에 대해  그다지 착각을 하지 않습니다. 서두를 필요도 없
고, 그러면서도 서로에 대해 더 분명해집니다. 그건  이미 좋은 토대가 되는 것이
죠. 그리고 보다 진지한 자세로 상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갈색 머리이며 언제나 미소를 띤 시골 태생의  처녀인 모니크는 이렇게 증언합
니다.
  "우정은 처음에 대상에 대해  그다지 착각을 하지 않습니다. 서두를 필요도 없
고, 그러면서도 서로에 대해 더 분명해집니다. 그건  이미 좋은 토대가 되는 것이
죠. 그리고 보다  진지한 자세로 상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넌  내 친구야'라고 말
할 만큼 되었을 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 같은게 전혀 없지요. 그런데 성공하기가
더 어려워요."
  한 남성은 자기를 전혀 모르는  여성, 또는 아주 냉정한 여성에게 반할수 있습
니다. 한 여성은 자기를 모르고 있는 남성,  또는 자기를 무시하거나 우습게 여기
는 남성을 깊이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인 사랑의 관계는 고뇌와
고통을 계속 안고 있게 됩니다.  반면에 우정은 결코 일방적인 관계로 시작될 수
없습니다. 우정은 처음부터 서로 공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관계에서 느낄수 있는 위태로움은 언제나 상대를  잃게 될 것 같은 두
려움 때문에 생겨납니다. 우리는 상실에 의한  고통을 두려워하고 있으니까요. 이
것은 상대를 차지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상대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욕망 탓이라
고 할 수 있습니다.
  우정은 그런 식으로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상대에게 의존하는 것도 아
닙니다. 각자는 자율성과  이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보다 더  평온하며, 협박
이나 격한 파괴,  경멸의 감정, 증오, 질투 등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아주 다
른 두 사람을 결합시키고, 그들을 동등하게 해주는 것이 우정입니다.
  우정을 돈독히 한다는  것, 그것은 번갯불을 훔치는  것보다 더 강렬한 일입니
다. 시간과 육체의 한계, 죽음 등을 포함하여  그 모든 한계를 거부하기 때문입니
다. 우정은 사냥금지  구역을 감시하는 대신에 그곳의  문을 열고 통행로를 트는
일이며, 경쟁과 질투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국경없는 관계


  우정은 사랑의 감정에서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들을 뛰어넘게 합니다. 즉 나
이 차이, 상냥스럽게 생기지 않은 외모, 또는 병약함 같은 장애들을 말입니다. 또
사회환경, 가문, 종교, 정당, 국적등을 고려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마음의 문을 엽
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영화속의 E.T에  대해 다정하고 따뜻한  우정을 느낄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이하게 생긴 생물체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우정은 모든 벽과 경계를 무너뜨리며, 구멍난  곳을 메우며, 불구대천의 원수지
간에도 싹틀수 있습니다. 1937년이라고 날짜가 적힌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그
위대한 환상]만큼 우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을 없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국경'과  '적'이라는 개념을 의식하는 프랑스  공무원과 독일 장교간
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이들은 서로 적대적
인 관계이면서도 상호간의 존중과 지적인 공유를 할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를 만든 장 르누아르  감독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일인 칼 코치와의 우
정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그의  독일인 친구는 그 영화에서 독일에 관한 부분을
확실하게 수정해 주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적대 관계인  두 진영에서 전쟁을 처렀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우리를 맺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적인 관계에서 싹튼 우정이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평화주의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정치제도도 같은 인간 존재
들간의 평등을 제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원래 귀족적인
우정은 민주적입니다. 반대로 두  존재간의 우정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이데올
로기는 수상하고 몰인정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우정은 타인과의 구별을 분명하게  합니다. 반면에 사랑의 관계는 동의를 얻게
되거나 항복을 받게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나는 아주 중요한 방식에 관해 이야
기 할수 있어요. 그들이 나와 전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해도, 나는 그것 때문
에 화를 내지는 않아요. 정말로 친구들을 신뢰하고  있거든요. 또 내가 실수할 수
도 있는 일이고요. 우정에는 판단도 선입관도  없어요. 그렇다고 해서 관대하다거
나 의견 충돌이 전혀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고요"라고 두 아이의 아버지인 로
랑은 말합니다.
  우정은 세대차이가 있는 사람들을 연결해 줍니다. 그래서 노화에 대한 가장 확
실한 치료약으로 여결질  때도 있습니다. 나는 내  프랑스 문학을 수강하고 있는
학생들을 친구로 삼고 있다는 것이  기쁩니다. 물론 더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내
가 딸일수도 있지요. 우정의 관계에서는 나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
입니다.
  몇 년간 나는 스위스에 살고 있는 잔느와 펜팔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잔느는 내
저서 중 한권을 좋아했는데, 우리는 정신적으로 오가는 어떤 일치감을 느끼고 있
었지요. 그녀의 글은 너무도 젊고 쾌활해서, 나는 그녀를 내 또래로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그녀의 오두막집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지요. 그녀가 나에
게 자기 집의  사진을 보내왔거든요. 그때 한 편지에서, 그녀는  우회적인 표현으
로 곧 80세가  될거라고 알렸습니다. 그리고 역의  플랫폼에서 나는 그녀를 쉽게
알아보았지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나는 그 키 작은 두 노인보다 더 개방적이고  발랄한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습
니다. 그들은 결코  서로를 원망하는 일이 없었고, 현 세계의  인간에게 열정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또자신들이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어떠한 판
단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호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나
를 위해 그들이 절대적으로 조부모의 역할을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
는 친구였으니까요.
  그들의 삶의 경험은 나보다 훨씬 길지만, 아주 솔직하게 자신들과 타인들의 경
험을 공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보통의 우리조부모들은 어떤가요? 신중한 태도를
취하면서 자신들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만 나눕니다. 또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일
과 가족관계, 재산 문제 등에 관심이 많지요.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 그다
지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조부모로소만 존재할 뿐입니다.
  가족 관계는 가끔 세대간의 단절을 낳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정은 세대간의 연
속성을 보장해  줍니다. 동등성의 공유는  친구 사이에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지나가는 시간의 개념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해가 지나면 솔직하
게 두 사람중 누가 그 관계를 시작했고, 누가 그 관계의 첫발을 내디뎠는지를 생
각할 수없습니다.
  만일 사랑을 이루려는 욕망이  죽음과 맞바꿈할 만큼 강렬하다면, 우정은 불가
사의한 그 욕망을 분리하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장애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아르노는 수년 전에 그에게  일어났던 일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일
은 아직도 그에게  충격으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아르노는 그때 30세의 나이였
고, 독신이었으며, 친구도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느 가족 관계와는 달
리 아주 나이 많은 여인과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
은 어느날 병이 들었고, 꽤 심해져서 양로원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어느 여름날, 아르노는 휴가를 떠나기 전에  그녀를 방문하러 갔습니다. 그녀는
아주 기뻐했지요. 병세도 호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르노는 며칠  후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휴가를  떠났지요.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우표도  주소도 없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편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됩니
다. 가늘게 떨리는 글씨로 쓴 간단한 내용의  편지였지요. 그가 병원에 방문한 것
이 얼마나 기뻤는지, 그 이야기를 되풀이한 그녀의 편지였습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아르노는 부모들로부터 그녀가 방금 세상을  떠났다는 사
실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 편지가 우표도 주소도 없이 그가
있는 곳까지 도착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거룩한 사랑과도  같은 우정은, 이처럼 이성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울타리를 뛰어넘게 합니다.
   
    피그말리온의 아름다운 여인


  사랑과 관련된 모습들은  어떤 것인가를 대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유혹, 권
력, 독점, 질투 등을 얘기합니다. 여러 나라의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있는 에스텔
을 이렇게 요약하더군요.
  "유혹하는 감정과 유혹받은  감정, 상대와 어울린다는 감정과 상대에 속한다는
감정, 소유욕과 독점욕.... 이것은 사랑의 문제에서 도저히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우정은  유혹하는 감정과 소유욕 등의 요소가 없어요.  우정은 이
해관계를 떠나서 자유롭게,  너그러우면서도 고통 없이 표현되지요.  사랑의 감정
이 열정이라면 우정은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파괴할 수
도 있어요."
  우정은 스스로 선택하고, 그 주체가 되기도  하지요. 사랑의 열정은 서사시와도
같습니다. 그 열정은 믿어지지  않는 것, 경이로운 것, 사실을 확장시킨 아름다움
에 관해서 서사시를  쓰게 하지요. 이러한 서사시의  두 주인공은 자신들과 함께
지구가 태어났으며, 자신들이 없다면  지구의 자전과 공전도 있을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  열정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그들이 없
다면, 그들 이후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우상숭배와도 같지만, 우정은 명철함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은 전율, 두
려움, 공포를 동반합니다. 그러나 우정은 신뢰,  평온과 함께 찾아옵니다. 남자 친
구나 여자 친구라는 개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든
상대를 돕고 후원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는 잘못된 길에서 상대를 구원해
낼 수도 있지요. 여기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나 애인은 어떤 도움도 줄수가 없습니
다.
  사랑의 감정은 상대를  아름답게 미화하기 때문에 많은 매력과  장점으로 상대
를 장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미화시키는 감정은 가슴속에 일종의 환희
를 품게 해줍니다. 이러한 환희를  느끼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사랑의 대상인 단
한 사람뿐이지요. 그리고 환희의 그  대가를 다른 누구로 대체할 수 없음을 느끼
는 것은 너무도 즐거운 일이어서, 그러한 순간에 머물러 있기 위해 모든 것을 버
리기까지 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화된  그 대상에 대한 질투로 빨리 그를 차지하
고 싶어지며, 그를 가두어 놓고 혼자 즐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정은 자
세히 보면 자기 도취적인 면이 강합니다.
  우정은 자신과 타인의  자유를 소중히 여깁니다. 질투나  배척이라는게 없지요.
그래서 상대와 기쁨을 공유하게 해줍니다. 물론 우정은 사랑의 관계를 통해 얻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를 배신하지 않고도 말입니다.  솔랑주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
습니다.
  "우정은 나는  상호간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자유롭게 자신을 나타낼  수 있게
해주는 객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랑의 이야기에서 나는 자유의 상실,  즉 내가
지니고 있는 애정에 비례하는 만큼의 상실이 두렵다."
  사랑의 열정은 왜  이토록 두려운 걸까요? 그런데도 남성과 여성들은  왜 머리
를 숙이고 왜 열정에  깊이 빠지려 하는 걸까요? 사랑의 열정은 그  열정이 뜨거
우면 뜨거울수록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게다가 열정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대를 보려고 하니까요.
  우정의 세계에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 왕과 그가  사랑한 여인의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피그말리온이 상아로 조각된 여인상을 사랑하여 그
와 똑같은 여인을 자신에게 달라고  빌자, 조각된 여인이 살아 있는 여인으로 바
뀌었다는 이야기 처럼 말입니다.  우정의 세계에선 오로지 자유를 향한 줄다리기
가 있을 뿐입니다.
   
    사랑의 열정과 그 환상


  모리스는 자연과학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많은 독서와 성
찰을 했습니다. 지금 노인이 된 그는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한 채
은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의 미화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상대방에게서  발견할수 없는 완성미를
계속 추구하므로 애초의 환상이 점차 흐려지게 되며, 결국은 그것이 훼손될 것입
니다. 그리고 사랑이 우정으로  변하기 어려우면 어려워질수록 더욱더 증오와 무
관심을 불러 일으키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는  자연스럽지 않게 시작되지만, 상대
적으로 빨리  진해됩니다. 반면에 우정은  완전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호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할 뿐이니까요. 그러면서도 다양한 감정에서 일어나는 특성
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음에 간직하게 됩니다. 그 다양한 검정이란 감탄, 연민, 보
호의 욕구 등이지요...사랑은  에로틱한 감성과 심리적인 감성이 결합되어 유례없
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불명예와  거짓말,
무기력과 배신이 내 사랑을 종종 더렵혔노라고 나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열정에 싸여 우리는 불가능한 것, 비현실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정
에서는 진실을 추구합니다. 이것은 광기에서부터 지혜까지의 거리라고나 할까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은  열광적이고 자극적인 어떠한 사실도 없지만  종속적인 속
박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랑의 이야기가  생겨나고 그것이  우리를 권태롭게 할
때, 거기에 우정이 머물게 됩니다.
  낭만적인 사랑에서 우리는 흔히  상대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내
가 곧 상대가  되거나, 상대를 흡수하고 싶어집니다. 그와 함께  융화되어 하나로
합쳐지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우정에선 상대와  나를 분명하게 구분합니다. 그렇
다고 자신의 의견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요.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대부분 상대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종
교를 바꾸고, 의복이나  기타 취향을 상대에게 맞추려 합니다. 정치적  견해도 상
대를 따라가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워지려는 이유로  자신의 고유한 것들을
바꾸고, 많은 이들이 사랑이라는  구실로 기본적인 자신의 가치를 포기하고 굴복
해 버립니다.
  이처럼 환상은  많은 것을 파괴시킵니다. 우리는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상대로부터 사랑받기  위해서, 그를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이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관계는 재빨리지배와 의존의 관계로  전환됩니다. 지배하
는 입장에선 어느 순간에  이르면 상대를 교체하고 싶어지고, 의존하려는 입장에
선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려 합니다. 우정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아
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워 보일뿐입니다.
   "나는 사랑의 감정보다 더 안정된, 더  확고한 우정을 알고 있어요. 우정은 사
랑에서처럼 소유하려고 애쓰지 않지요. 그러면서 상호간에 확립되는 일종의 신뢰
가 있어요. 친구간에는 뭔가 숨긴  채 진행되는 사랑의 관계에서보다 더 깊은 대
화와 신뢰감을 나눌수  있거든요. 연인과 함께 있을  때보다는 친구와 함께 있을
때 훨씬 더 자신을 드러내게  되지요. 사랑하는 사람보다도 친구가 더 나를 전진
하도록 돕거든요"라고 32세의 독신남 베아트리스는 말합니다.
  신뢰는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가 다른 사람을  만나도록 내버려둡니다.
또 부부관계에서도 두 사람의 관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존
재하게끔 해줍니다. 신뢰는 상대를 믿으면서 서로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
가를 돕지 않고 위로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
닙니다.
  남성과의 감상적인 관계를  나누는 많은 여성들이 시련을 당하는  순간에 다른
여성 또는 남자 친구들로부터 정성과 애정으로 도움을 받고 보살핌을 받지만, 애
인으로부터는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애인은 돕거나 위로
하는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슬픔, 아픔, 추함, 병약함  등을 좋아하지 않
으니까요. 정확히 말해 그 순간에는 애인이 거기에 없다고 말해야겠지요.
  나는 2년동안 한 남성과의 위대한 사랑을 체험했던  40세 가량의 한 여성을 생
각해 봅니다. 그녀의  상대 남성은 아주 자주적인 삶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
떤 계기로 멀어져서 결국은  결혼하기를 거부했다는군요. 얼마 후 그들은 헤어졌
고, 그 남자는 큰 사고를 당해 여러 달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그 사
실을 알았지만, 그에게 닥쳐온 불행이 당연한 형벌처럼 보여서 그러한 운명의 장
난이 기뻤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의 불행을 오히려  줄겼으므로, 그가 있는 병원을 알면서도 방문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열정이 식자 그것은 증오, 무관심, 또는 후회로 남게 되
었지요. 여기에 동정이 신뢰, 사랑이 있는 걸까요?
   
    사랑의 탐색보다 까다로운 일


  "우정은 지속성과 성실성을 필요로 하므로,  시간이 필요하지요. 왜냐하면 우정
은 상대에 대한 점진적인 발견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산업설계사인 장 루이는 밝
힙니다.
  지속성을 필요로 하는 것인 만큼, 우정은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이루어집니
다. 친구들 사이에는  서로 만난 기념일을 축하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월이 지나
면서 함께 늙어갈  것임을 서로 알고 있으니까요.  성실과 끈기로 이루어지는 이
관계는 서로에 대한 성실함을  약속할 수 있는 개인들 사이에서만 전개될  수 있
지요.
  모험, 또는 한때의 기분으로 어떤 여성과 사귀다가 그것이 충족되면 그 여성과
의 관계가 계속되는 것을 피하는 남성은 진정한 우정을 가질수 없습니다. 그들은
즐거움과 쾌락 이상의 것이  요구되는 관계를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우정으로 발
전할 수 있는 즐거운 사랑의 관계를 억제합니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우정을 더  즐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들은 현실적으로 필
요한 우정을 가꾸어 가며, 권태를 느낄 때면 자신의 애인을 버리기도 합니다.
  남성은 자신의 지적 생활을 위해 한 여자와의 사랑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신문
기자인 제라르는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에 눈이 먼 악마는  여성을 사랑하는 남성의 가장 충실한 동료입니다. 성
적 매력은 우리에게 저항  할수 없도록 하고 애무할 마음이 생기게  만드는 남성
적 본능과 밀업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여성이 지적이면서 교양까지  갖추고 있다면, 남성에겐 더할 나위 없
이 성적 매력을  느낄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남성이 사랑에
빠질 때는 반드시 그런 특성들이 다 갖추어진 여성을 찾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여성은 감수성, 창의성, 지성 또는  유머로 자신을 감동시키는 남성에게
서 매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성들은 남성을 처음볼 때 그 남성을 눈을 쳐다봅
니다. 반면에 남성들은 여성의 다리나 가슴을 곁눈질해 보는 경향이 있지요.
  어쨌든 우정은 여성이나 남성이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람에 대해 더 총체적이
고 폭넓은 접근을 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한눈에 반하는 사랑처럼, 혹은 사랑의
유혹을 느낄때처럼  상대의 매력, 감동, 감정에  제한되지 않는 것이 우정입니다.
또 상대의 내면적  특성, 지적인 특성, 창의적인 삶, 내적인  삶을 고려합니다. 그
러므로 우정은 모래위에 건축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술사인 질베르는 다음과 같
이 표현합니다.
  "우정은 사랑의 탐색보다 더 까다롭습니다. 그래서 고백할 수 없거나 비밀스러
운 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요. 어떤 우정은 예상을 하지 않았던 순간에 갑자기 생
겨나기도 하고요."
  47세의 발레리는 "각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사
랑보다는 우정에서 더 잘 실행할 수 있습니다. 우정은 상대의 온 육체에 대해 의
미를 갖고 있는 것이지요"라고 말합니다.
   
    고독, 자유로이 행동하는 것


  단지 혼자 갈 뿐이라는 고양이, 그 고양이의 여정은 우정이 고독하다는 감정의
체험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합니다. 반면 사랑의 감정은 가족의 유산과
연관되어 있고, 다양한 삶으로부터 생깁니다.
  많은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만들면서 자신의 부모로부터
해방됩니다. 이것은 이미 습득된 관습을 반복하게  할뿐이며, 가정을 건강하게 하
고 안정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혼자 있고자 하는 욕구는 그같은 가족  관계에 의해서는 충족되지 않습
니다. 그토록 많은 청년들이 빠지게 되는 사랑의  감정, 연인과 단둘이 살고자 하
는 욕구는 부모에게 어떠한 반향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우정은 독립정신으로 획득됩니다.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므로 고독과 함께, 우
리는 사랑의 관계에 머물러  있는 대신 낯선 대지를 쇄신하고 개척해  나가는 것
입니다. 고독은 정말로  자신을 자각하게 하고, 고독한 다른 개인과  만나게 되는
유용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여는 기회를
줍니다.
  가정생활과 마찬가지로 학교생활은  결코 고독의 순간들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가정생활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만 하며,  같이 놀
고 같이 먹어야만  합니다. 어떻게 보면 독서만이 여기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그
것은 바로 자율을 향해 열려진 첫 번째 문이니까요.
  자율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그 스스로  책임이 있는 것을 말합니
다. 또한 상대에 대한 기대도 없는 만큼 상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온전한 존
재라는 것도 명백합니다.
  고독한 존재는 삶을 살면서 많은 친구들을 맞아들일수  있는 관계를 맺게 됩니
다. 왜냐하면 한  사람만을 향해 마음을 열어두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므
로 고독은 사랑의  원천일 수 있으며, 또한 사랑의  요구일  수도 있다는 중요한
발견을 하게 해줍니다.
   
    속박으로부터의 자유


  우정은 가끔 혈연 관계를 저버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러는 신분이 낮은 사람
과 결혼하는 것보다 더 선동적인 것으로 보일수 있습니다. 우정은 개인이 가정이
라는 누에고치 속에 있는  것과는 달리 가정을 벗어난 곳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
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정은 정신의 가족을 가족정신으로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은 축제, 기
념일, 크리스마스... 등의 시기에  반드시 모여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마음내키는  대로 서로 만납니다. 얼마 동안 서로  연락이 없었
다 해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힐책이나 재촉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정에는 감정적인 협박,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 징계등이 생길수 없
습니다.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가정'이라는  종교를 숭상하는 개인은 친구
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고 아주 극소수인 경우가 많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우리
는 가족으로부터 의존적인면만 기억하게 됩니다. 가족정신은 소유와 의존의 정신
(애정이란 이름하에 숨겨져 있으므로)이 있을 뿐입니다.
  가정이 없다면 의지할 대상이 없으며, 가정이 없으면 저주받은 것과 같다고 말
할 정도로 가정에서 벗어나면 각자 고립된 개인이라는 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
서 가정이라는 바위에 40여세까지  붙어 있지 않는다면, 서둘러서 함께할 사람을
찾게 되고 상호 의존하는 관계를 다시 만들어내게 됩니다.
  쉬잔느는 가정이라는 울타리와 그 의무에서 벗어나 혼자살기로 마음먹고, 50세
가 넘도록  직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가  아름답고 풍요로운 우정을
알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입니다. 지금 62세인
그녀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인생이 나에게  부여해준, 그 가느다란 기회를  이용했지요. 그후 사람들
을 만났고요. 나는 편지를 썼어요. 내가 좋은  책이라고 여겼던 그 책의 저자에게
말예요. 또 라디오에서  소개된 적이 있는 누군가에게  쓰기도 했고.... 하지만 내
인생의 혁신은  우정을 넓혀갔다는데 있어요. 사회적으로  이미 만들어진 윤리가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나는 사람에 대해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았죠. 그러
면서 평화로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증명할 수 있었어요."
  그녀는 여성들의 모임과 종교  모임에 참여했고, 직업적인 모임의 회원이 되기
도 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나 우정이  생길수 있도록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친구들을 인생의  선물이라도 되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그녀를 자기만의
집으로 이끌어주는 자유로운 감정입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아는 특별한 사람들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나에게도 가족  구성원으로서 구속과 소유의 개념을  강요하지 않는, 현실적인
부모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비록 나의 독창성이 그들을 실망시켰다
할지라도 나의 자주적인 성격,  직장생활에서의 선택 등을 간섭하지 않고 용인해
준 그분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이에게 가슴을 에는 듯한 고통을 주는
어머니, 또는 권위적인 아버지를  갖는다는 것은 진정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
다.
  그러나 가족 구성원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성숙한 시도입니다. 또 반항, 질투, 원한 등의 소송을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고, 자신의 독립을 획득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지요. "줄을 끊는다
는 것'은 개인이 더 이상 가족 관계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것('나는 ~의 딸이
다','나는 ~의  아버지이다'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가정에 관계에  따른
행동이나 반응으로 처신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부모가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했고, 지금껏 길러주었다는  그 사실을 '고
맙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실수와  불충분함을 그
들의 관점에서 인정할 때, 비로소  어머니와 아버지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습
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나의 부모이든  아니든, 당신처럼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을 보는
것이 기쁘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거나 자유로이  이야기하는 것이 즐거워요. 나는
존경, 두려움, 복종 등을  강요받고 싶지는 않아요. 나에게 생명을 주었다는 이유
로, 재정적인  도움을 준다는 이유로 그러한  것을 강요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
모든 애정, 그  모든 속박에서 자유로워진다면 나는  진정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고, 당신의 친구가 될 수 있어요."
 
    3. 남자의 우정, 여자의 우정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족하다. 그들과  이야기하고, 꿈을 꾸
고, 그들과 말하지 않고도 그들을 생각하고, 더욱 흥미 없는 사별을 생각하고, 그
러나 그들 옆에서는 모두가 동등하다." - 라 브뤼에르-
 
    존재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찬양과 오만함, 대단한  열정과 그것이 식어 나타나는 무관심, 또는  증오와 저
급한 복수에 이르기까지,  사랑은 수세기 전부터 인류에게  많이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도 왜곡되어 오용된 나머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샘물을 찾
아 갈증을 풀고 싶어합니다. 또한 누구도 가보지  못한, 거의 탐험되지 않은 대륙
을 발견하고 싶어합니다. 열정으로 인한 실망, 욕망에 대한 광기와 불안, 두 사람
이 한  인생을 살아보려는 타협, 반면에  서로에게 감옥과도 같은 애착,  그 모든
것은 지나칠 정도로 많은 차들이 오가는 고속도로와 같습니다.
  우리가 열정이나 감상적인 사랑에 빠진 듯한 인상을  가질 때 우정은 처녀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정에  있어서 그 지표는 불안정하고, 규범 또한  간신히 초
안이 잡힌 것처럼 보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규범이나 체계의 모든 가능성을 대수
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진정한  우정일지도 모릅니다. 진정한 우정이란,  자유의
거대한 숨결을 타고  나아가는 것일 테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우정의 대지 위로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들은 선구자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더욱 순수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우리는 남자들의 우정과  여자들의 우정을 다르게 인식합니다. 이것을 체
계적으로 비교하지 않는다면,  남자들의 우정은 '함께 만들어가는 것'으로 특정지
을 수 있고 여자들의 우정은 '함께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된다는 것을 확인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자들의 우정은 신뢰,  말을 들어주기, 마음을 여는 것등
에 가치를 두는 것처럼  보이고, 남자들은 용기, 연대의식, 사상의 교류등을 기본
으로 하는 우정을 중요시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용기와 고귀한 감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존경받는 관계의 우
정을 꿈꾸고, 그래서 더욱  상처받기 쉬운 우정을 실현하려 하는 것일까요? 오늘
날에는 남녀의 차이가 줄어들고  있지만,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것은 여자들 사이
에서 더 많이 표현되며 지적이고 활동적인 교류는  오히려 남자들 사이에서 오래
지속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자들의 우정은  함께 경험한 시련이나  활동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정치적,
사회적, 인도주의적인 사상의 공유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함께 공유한 활동을
근거로 하고 있다면 남자들은  친구들의 부류가 다양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위
에서 친구를 모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2자들의 우정은 고통스러운 군대
체험이나 단체활동, 조합활동 등에서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반면 여자들의 우정
은 직업과 나이, 정치적 견해와 관계없이 각 개인의 개성에 의해 작용하는 것 같
습니다.
   
    극단적인 위험 앞에서


  모험이나 전쟁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화합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각자
의 인간성을 시험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영원한 우정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영웅적 행위보다  그룹이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더  크기 때문입니
다.
  남성들의 우정을  그린 대부분의 영화들은 전쟁영화가  많습니다. 즉 탈옥하려
애쓰는 죄수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지하에서 항독운동을 펼쳤던 레지
스탕스 활동 등을 통해 남성들의 우정이 드러나게 됩니다.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실한 우정을 잘 드러낸  영화 중에서 [상
처]라는 것이 있습니다. 캄보디아인과 영국인 사이의 진실한 우정을  드러내고 있
는 이 영화는 크메르  루즈의 붉은 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집단학살을 배
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집단학살이라는  상황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를  노출시키고, 그 존재를
더욱 본질적으로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더 이상 속임수를 쓰거나
적당히 지나갈 수  없는, 생명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기에 우리를 긴장시키는
것입니다.
  이때 극단적인 위험  앞에서 그것을 함께 모면한 사람들은  어떤 통과의례와도
같은 우정을 체득하게 됩니다. 이것은 조상 때부터 원수였던 자와 함께 대면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것과 같은 타고난 연대의식이며, 이때 타인을 구하는 것
은 자기 목숨을 구하는 것과 동일한 가치로  여겨지는 운명공동체 의식인 셈입니
다.
  중동에서 현지보고 기사를 보내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했던 쥐스탱의 경우, 우
정은 극도로 비참했던 몇몇  장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우정은 '사
막 또는 광활한 공간에서 함께 살아나가는 일'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들이 죽음의 고비를 넘길 때, 또 다른 사람들과 그러한 어려움을 나눌 때,
우정은 어떤 말도 필요없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일종의 계약과도 같지요. 죽음을
무릅쓰고 함께 살아가는 일을 아주 절박하게 연결시키는 듯합니다."
  극한 상황속에서 두 사람은  가장 고귀한 우정을 의미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보호하고,  후원하고, 그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생명을 바
치기까지 합니다. 이렇듯 개인을  초월하는 경험 속에서 상호간의 존중과 경탄을
체험하게 되는 이런  우정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용기와 성실에
기인하는 남자다운 우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남성적인 미덕은 처음에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이야기로부터 유명해
진 것입니다. 팀을이룬 몇몇 스포츠와 위험을 무릅쓴 임무(등산, 비행 등)를 완수
해낼 때도 매우 자연스러운 관계로 우정이 생기게 됩니다.
  누구에게나 상대방이 없는 유대감은  생겨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최선
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유대감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 속에
서 우리는 타인데 대해  무관심할때가 많으며, 연대감이나 공적인 미덕에 대해서
도 자주 잊어버리곤 합니다.
 
    원초적인 공감대


  여성들은 우정을 확인하기 위해 시련을 체험할  필요를 덜 느끼는 것일까요?만
일 여성들  중 몇몇이 공동으로 하는  경기나 사회참여를 통해  우정을 체험한다
해도, 여성들끼리의 우정은 대부분  정신적 교류, 대화, 속내를 털어놓는 일에 근
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바른 길을 가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그 과정에서 쉽게 포
기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남성들은 우정에서 점진적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
(극심한 위험, 전쟁, 스포츠 묘기의 경우를 제외하고)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전세계의 다양한 여권운동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사실들은  민족성, 세대,
문화, 사회적 수준이 어떠하든  간에 여성들간의 공감대에서 오는 사회적 관계입
니다. 그렇지만 '여성만의  클럽'은 새로운 정서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정서
는 여성해방운동에 힘입어 근래에 인정되었습니다.
  사실여성들만의 공감대는 처음에  여성들의 자유를 시도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남성들에 대해 적의를 품은 운동으로 나타나기 훨씬  전에 여성들을 위한 광대하
고도 확고한 결합을 나타내주었습니다.
  그런데 남성의 보루 속에서 만들어진 틈새, 여성과 남성의 불화나 경쟁으로 강
화된 실제적인 틈이 여기에 있습니다. 더 강하게 군림하기 위해서 만들어지는 남
성의 권력에 맞서는 동안,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감은 여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굉장한 힘을 구축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대부분의 남성들이 여성들 사이
의 우정에 대해 난처해하고  부러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비밀병기, 즉 빼앗기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던 비폭력의 병기를 깨달은 셈입니다.
  여성들 사이의 많은 관계는 여성들의  생활과정에서 생기는 비밀스러운 것들과
얽혀져 있습니다.  주기적 월경, 성, 경험,  임신, 출산, 양육 등에  대한 속사임과
외침 속에서 여성들끼리의 진정한 공감이 생겨난 것은 그 이유 때문입니다. 육체
의 변화로 인해,  봉건시대의 영주의 아내는 확실히  그의 남편보다는 하녀를 더
가깝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의 여성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육체-쾌락, 몸치장, 나약함과  관련된-를
화젯거리로 삼습니다.  우정이 만일 생명과  피에 대한 확인에 근거하고  있다면,
여성들의 우정은 항상 육체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의
형제애의 관습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성들은 피의 복잡성에서 반격을 시도하는 것
입니다.
  여성은 생명을 탄생시키고  양육하는 역할을 맏아왔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더
개방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여성은 긴 속박의 과정에서 모욕, 폭력, 훼손
을 당하는 가운에 자신들의 자유는 여러 가지의 도움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우
정과 부합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여성들이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적어도 몇
몇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평등과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여성들은 그들의
긴 이야기의 자료를 이루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경쟁사회와 우정


  남성들은 사회생활 능력,  경제적 수입, 직업적 성공에 대해 강요받는  풍토 때
문에 항상 경쟁하고 있게 됩니다. 서구 사회의 영향으로 강요된 남성상은 정복적
이고, 야망있고, 승리자가 되어야 하며, 개인적인  성공 여부는 돈과 권력, 명성으
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성에게 있어서  타인은 잠재적인 경쟁자이기 때문에 우정을  위한 어
떠한 여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흠 하나 없는  딱딱한 보호껍질을 만들게 되며, 진
실된 모든 인간 관계를 단절시키게 됩니다.
  우정은 상호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경쟁 위주의 사회체
계속에서 우정이 겨우, 가까스로 생겨날 수 있습니다.
  정보처리 전문가인 폴은 "일을 하는  가운데 우정을 얻는게 가능해지는 것같습
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기본적인 조직(부서, 작업팀)을 벗어
나서 같은 수준의  계층, 즉 동료들 사이에서 우정이 싹트는게  보통입니다. 그것
은 때로 표면적인 관심과  우정을 발전시키도록 만들어주는 일과 관계 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 자체가 우정을 필요로 하는 힘의  갈등을 향상야기하고 있기 때문
입니다.
  기업에서는 점점당면하게 되는 문제가 기술이나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
적인 문제라는 것을 지금에  와서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의사소통을
잘하고 갈등 해소를 더 잘할수  있게 하기 위해 연수를 제안하게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 속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업은 박애적인 차원의 배려가  없으며, 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
다. 그래서 기업에서  제공하는 연수는 '서로 통하는 직원들은 더  유능하게 일하
고, 결석이 적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볼수 있습니다.
  나는 기업내에서 자기 표현과 의사소통에 대해 여러  가지로 실습할 수 있도록
활기를 주었습니다.  나의 가장 보람된 일은  같은 부서에서, 때로는  3~5년 동안
계속 같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른 측면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며, 그들이 우
정으로 맺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실의 동료인 남성 또는 여성은 같은 직장  내에서의 유일한 능력에 국한된
익명의 개체가 아닙니다. 그들은 호감의 대상이자  친절의 대상이며, 우정의 대상
이 되는 하나의 인간적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직장생
활과 사생활을 관련짓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35세인 카트린느는 이렇게 말합
니다.
  "영리적 영역인 업무  관계에서 우정은 나와 공감대 형성이  가능한 사람과 같
이 일하기를 좋아하는  그 느낌 속에서 생길수  있습니다. 성격이 서로 맞는다면
거기서 우정이 생겨날 수 있고, 더욱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건축 회사 직원이며 설계사인 25세의  사빈느는 "좋은 분위기속에서 서로 이해
하는 가운데 하는 작업은  언제나 싫증도 덜 나고, 덜 풍부해지지요"라고 말합니
다.
  그러나 은행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마리 프랑스는, 업무 관계에서는 우정을
키워나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나의 행동, 사생활의 자유를 꼭 지키고 싶습니다."
  바로 여기에 역설이 있습니다. 일은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대부분의 사
람들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사무실과 회사 외에 어디서,  어떻게 친구를 만나는 것일까요?
또는 가족과 이웃집 사람들, 휴가 때 만나게 된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
을까요? 어찌 보면 이러한 삶은 얼마나 삭막한지 모릅니다.
  또 다른 역설은 남성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들에게 우정이 싹트는 계기는 무엇
보다 같은 일을 하거나 같은 목적을 추구하는데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
상적으로 계속되는 협력  관계에 우정의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
다. 마치 우정이  직업적인 관계에 누를 끼치게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때 신성한 업무 관계에 의해 끊임없이 침해되는 것이 바로 우정입니다.
  우정 관계를 맺으며  열정적으로 같이 일하는 남성과 여성들은  대체로 자유직
업이거나 각기  다른 두 장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설계사나 학생, 사진사,
광고업자, 언론인, 배우....
 우정또한 자유롭게 선택할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활동 과정에
서 승진하는데 그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자 않습니다. 그들은 존중해야 할 상사나
부서장, 관리자, 사업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잘 보여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
닙니다.
  나는 나의 직업적인 활동 덕분에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
라 일과 진실, 우정과 창의력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정의 풍요로움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나는  항상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계
획을 세우려고 애썼습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나에게는  진정한 우정의 표시로 여겨집니다. 그것이 더러
싫증나는 때가 있다 하더라도, 우정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
다. 그리고 나는  칸칸이 나누어진 칸막이 속에서 배타적인 사생활을  하거나, 직
업생활 속에서 현재의 나의 좋은 관계들을 평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우정은 움직이고, 변하고, 만드는 창의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간, 존재, 관
심, 상상, 연구  등을 요구하는 예술적 창조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우정에서 각각의 재능과 지식을 제거하려 할까요?
  지배욕구와 훌륭한 성과에  대한 욕구는 상대의 내부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존
재를 볼 필요가 있는 우정을 방해합니다. 열등감에  빠진 사람, 위협받는 것을 느
끼고 타인의 판단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실한 우정을 경험할  수 없
습니다.
  타인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확신, 속아넘어가지  않는다는 확신이 필요하지요. 물
론 이러한 표현들은 모든  인간 관계에 있게 마련인 불신과 경쟁에  의해서 생겨
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을 이해합니다.
   우정은 모든 관계 밀림의  법칙(다른 존재를 잡아먹거나 잡아 먹히는 법칙)을
적용하는 오래되고도 끈질긴 이  도식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애정 관계가 싸움의
규칙에 대해 아직도 제기능을 다하고 있다면, 우정은 다른 존재의 순결성과 이타
성 속에서 그 존재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타인은 자신에게 위험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상대를 유혹하거나, 쟁취하거나,
굴복시키거나, 쓰러뜨려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존재는 당신을 풍요롭게 합
니다. 또한 상대와 교류하는 동안 당신은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습니다.
 
    동굴에서 탈출하기


  어떤 일을 하든,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아무런  수확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것
은 우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타인에게 가다가지  않는다면, 그들의
미소나 제안에 대답하지 않는 다면 , 우리는 삭막한 기다림 속에 머물러 있게 됩
니다.
  우정을 체험하는 것은 개인적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그것이
'잘 구워진 빵'이기를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또  가문이나 권력, 돈으로 우정을 획
득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날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 음식으로 식생활을 쉽게 해
결하고 있듯이 말이지요.  돈과 권력으로 쾌락을 얻는  것은 마치 소비할 각오가
되어 있고 자신을 내팽개칠 각오가 되어 있는 이 시대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우정은 이런 치사한  변수와 관계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돈
이 많고 최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진실한 사랑과 우정, 아름다움, 영혼, 영원
성의 아주 작은 부분조차 쉽게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저속한 세상에
도덕성이 살아 있으며, 적어도 정의와 조화를 이루려는 인간의 의지가 있다고 인
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잘못 구성된 사회에 갇혀 있는 죄수와도  같기 때문입
니다.
  자신의 직업, 은행 거래, 명성, 영향력보다도 자아를 우선시하는 사람들은 자신
들이 선택했던 것들을 삶속에서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권력, 돈, 명성등을 소유
한 사람들과 비교할 때 훨씬 더 값진 것을 말입니다.
  개인의 소극성을 부정하면서  현대 사회를 항상 비난하는 것은  일면적인 논리
입니다. 도시생활, 경제체계,  신기술, 발전의 신화, 현대성,  중앙집권적인 도시계
획, 대중교통기관, 텔레비전과 워크맨...등은  분명 인간들 사이의 우정과 진정 어
린 관계를 용이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삶에  있어서 타인과의 만남 또는
대화로 대체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차이는 각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
다.
  그리스도가 말하기를 "너의 보물이 있는 바로 그곳에 너의 마음이 있느니라"라
고 했습니다. 우정,  사랑, 애정, 선행, 친절,  상호부조가 나타내는 인간 관계, 즉
비물질적이면서도 매우  귀중한 재산들을 보물로  선택하는 것은 각자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온 존재를 이끌어가고, 모든 주의를 불러일으키며, 시간과
힘을 이용하여 모든 노력을 바치는 사람은 목적했던 것은 반드시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바라던  것, 자신이 생명을 바쳐서까지  얻으려 했던 그 무엇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우정은 일시적인 오락이 아니며, 부차적인 여가를  즐기는 것도 아닙니다. 우정
속에 자신의 보물을  자리매김한 사람은 친구들을 통해서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정을 소중히 가꿀줄 아는  사람은 확실히 다른 범주의 사람들보다   더 진귀
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은 이상주의자라고 부르게 되지요.  그들은 보답없
는 도움에는  앞장서고, 경제적인 거래는  하지 않으며, 개인적인  사소한 흥미는
무시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정은  현실에서 별로 쓸모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저  삶을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더 깊이 있게 할뿐이니까요. 그러나 우정을 중시하는
이 애호가들은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모든 관계들,  위선으로 가득 찬 만남들
속에서 생겨나는  일반적인 생각과 행동에 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상업적이고
세속적인 사회,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팔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우정은 우리들이  갇혀 있던 캄캄한 동굴에서 앞으로 나가도
록 도와주며, 그 어두운 곳을  집요하게 계속 뚫고 나가는 명쾌한 지표로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은


  나에게 질문을 받은  여성들에 의하면 서로 사이  좋게 지내며, 함께 이야기하
고, 웃고, 꿈꾸고,  자연을 명상하고, 여행하고, 음악을  듣는 것등이 바로 우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또  여성들은 우정으로 존재의 방식과 존재를 음미
하는 방식을 찾는다고 합니다. 엘렌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정은 건초 향내를 맡으며, 산을 마주 보면서 테라스에 함께 있는 두 여인과
같습니다. 긴 여름밤 동안 입가에 미소를 띠게  하고, 날마다 우리의 가면을 벗겨
주고, 관습의 굴레를 벗겨주며, 씁쓸한 웃음을 몰아내면서 부드럽게 감싸주는 곳,
거기에 우정이 있습니다. ...어느날 밤  우리는 서로 잠을 못 이루고 있었어요. 새
벽 3시에, 우리는 무수하게 나타나는 별들을 함께  보려고 테라스로 나갔지요. 마
술에 걸린 것 같은 시간이었죠."
  친구로 있다는 것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 가
까이 머물러 있음을 뜻합니다. 마리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정은 자기의 마음속에, 자기의 영혼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게하는 능력
을 주지요. 공동으로  이러한 능력을 갖게 되므로, 우정은 일종의  선택된 쌍둥이
인가봐요!"
  여성들의 우정은 각자의 사회참여 정도와 생활방식이 다르다해도, 무엇보다 서
로 마음을 나누는 데서  시작됩니다. 프레드 지네만은 [줄리아]라는 영화에서, 사
람의 방식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경과 갚은 애정으로 맺어진  두 여
성의 우정을 훌륭하게 표현했습니다. 한 여성은  릴리앙으로 결혼을 한 작가이고,
다른 여성 줄리아는  릴리앙에 비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과격한 반파시스트
입니다.
  이 두여성은  예술가와 투쟁가로 만나게 되지만,  각자의 사회활동과 인간적인
성실함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혼란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교제하기에 이르렀습
니다. 우정과 감사의  최후의 상징은 줄리아에 의해 나타납니다. 즉  릴리앙은 줄
리아의 죽음을 알게 됨과 동시에,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다는 것과 그 아이의 이
름이 릴리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성들간의 우정


  장 콕토는 "나는 사랑보다 우정을 나누는 것이 더 좋다"라고  토로합니다. 남성
들은 식사하면서,  장난치면서, 휴일에 자전거를  타고 미친 듯이  함께 달리거나
함께 테니스를 치면서 우정을 만들어 나갑니다.  때로는 선반수리를 하면서, 다른
사람이 이사하거나 거처를 정할 때 도와주면서 우정을 쌓기도 합니다.
  "남성들간의 우정은 약속과 정직으로 맺어지고, 어떤 겨우엔 아주 쉽게 이루어
지기도 합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내가 잘 알고 있는  네 명의 남성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파리의 같은 고등학교에서 '수학반'에  속해 있었을 때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베르트랑이 앙투안느를 도와주
거나 수학문제를 풀수 있게 해주었을 때 이들 사이의 우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각자는 상대적으로 다른  분야에서 (이공과대학, 해군사관학교, 대중예술,  고등
상업전문학교)우수한 성적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들은 항상 교제를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7년째 되던 해에 그들은 1주일간의 휴가를 같이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들 중 세  명은 결혼을 했고, 나머지 한명은 독신이었습니다.  아내들은 남편과
친구들간의 모임을 무척 잘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자유스런 직업으로 인
해 몇 가지 계획에 대해  같이 추진하기도 했으며, 서로 다양한 충고들 주고받기
도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즐거움으로 기억됩니다. 그러나 공고한 우
정은 계속 만들어지고 진전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네 명의 친구들은 각자의 사생
활이 어떠하건 항상 서로 같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오랜 우정은 매우
드문 경우이고, 서로를 용기를 북돋워주는 일입니다.
  가엘과 로댕은 헬리콥터 조종사라는 직업 때문에 맺어졌습니다. 그들은 기술이
나 기상 문제의  어려움에 맞섰고, 사고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둘이  교제를 시작
했을 때, 그들은 자신아 하는 일에 열중해  있었습니다. 또한 불안이나 항상 도사
리고 있는 위험을 몰아내기 위한 것처럼, 조종사라는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 이야
기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화려한 향연을  베풀고, 서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지적인 관심, 정치적, 철학적 사상의 교환, 새로운 기술의 발견(특히  정보에 관
하)등은 친구들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창조하고 행동하고  싸우는
것, 이 세가지는 남성들의 우정을 가장  잘 요약하는 특성입니다. 정신분석학자인
미셀 몽트를레이는 이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남성들의 우정은  공동으로 일하고, 상호 존중을  근거로 하거나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릴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어떤 남성은 그가 비록 친구들을 의식하
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일하는 곳에서 몇 몇의 친구들을 사귈수 있습니다.
밀림을 탐험하기 위해서는 친구들이 필요하지만, 남성의 우정에서는 비밀을 털어
놓거나 수다를 떠는 방법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우정의 예절은 다음
과 같이 정의 됩니다.  '나는 그에게 의지할 수 있습니다.'라고. 그것은 종종 밝혀
지는 것이 아닌 조용한 우정입니다. 그들은 함께 이야기하거나 서로의 말을 이해
하거나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벗어나서 호흡하는 것이며, 작업환경
에서 호흡하는 셈입니다.  결국, 나는우정이 여성보다 남성들은  어머니를 제외한
여성들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성애를 받는 것을 필
요로 합니다. 그래서  네 명의 남성들 중 세  명 정도는 어머니를 찾고 싶어합니
다. 그래서 네명의 남성들 중 세명 정도는  어머니를 찾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
들은 남성들과 함께 그들의 집단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되고  정신적인 동료의식 속에서 남성들간의  우정의 승화를 봅니다.
남성들간의 우정에선 서로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에 대해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그 계획과도 같은 것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에 따르면, 우정은 건축가들의 계획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남성에게  예비된 동료의식은 미덕에 근거하고  있는, 고대의
남성다운 우정의 가장 순수한 화신으로 등장합니다. 또 그것은 삶과 죽음의 울타
리를 초월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8세기초에 영국에서  결성되어 자유,평등,박애정신을 실현하려  했던 프리메이
슨단의 형제애를 생각해봅니다.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자신들의 가장  흔한 적이
여자라고 쉽게 말했습니다.  여성은 자신의 남편이 모임이나 '형제'들에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대해 질투하며,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소유욕을 가진 여성들이  있고, 그런 태도의 유형들은 우리에게 다음
과 같이 질문할  것입니다. "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만남의 장소를 특권
있는 남성에게만 제공하는  프리메이슨단을,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라고 규정
하는 건가요?"라고.
  그렇다면 왜 결혼한 남성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의 시간과 개인적인 탐
구를 희생하면서, 그의 가정에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건가요? 이러한 질문
과 반박이 오가는 이유는, 여성들은  남성들과 많은 시간을 나누지 못한 채 남성
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있음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에 여권론자의 요청에 이어,  가장인 남성의 권한에 대해 문제가 제기
되면서 남성들의 그룹들 중 일부는 소심한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마치 남성들
사이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우스꽝스럽고 이상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면에 다수의 여성 그룹들을 그 속에서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이 저명한 일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은 원을 이루어 돌아가며,  자기도취인 교류를 나누는 인
상을 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습니다.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자신들이  가장 좋은 경험을 했던  것은 바로 그 형제애
안에서 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프리메이슨단의 형제애가 우월해 보이는 까
닭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것이 초월성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들의
형제애가 지속되도록 운명지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성들의 만남과 우정을 수직화시킵니다.
  세속적인 그룹들 속에서 남성들의 만남과 우정은 심리학, 사생활, 사회적 상황,
인간적인 지지나 정치적 투쟁 등의 수평적인 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
떤 남성이 다른 남성과 진정으로 우정을 나누려고 애쓴다면, 관심을 보이면서 친
절히 귀를 귀울여주는 것과는 다른 갓을 추구한다면, 그리고 자신의 삶으로 예술
작품을 만들기를 원한다면, 그는  왜 프리메이슨단에 들어가려는 생각을 하지 않
을까요?
  
    문을 잠그는 사랑의 감정


  나는 여러번 되풀이 되는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한 여자친구와  나는 규칙적으로 서로  전화를 하고,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만남은 깊어져갔고,  서로에게 진실하며, 정답고 즐거웠습니다. 얼마 후
그 친구는 한 남성과 연인이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남성은 그 친구를 찾
는 일도 , 방문하는 일도 뜸해졌습니다.
  그 친구는 외관상으로는 우정이 들어설 수 없었던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숨기
면서 살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
게서 삶의 흐름과  영향과는 상반되는 행동을 흔히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었습니
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이 친구의 부름에 다시  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녀가 남자와 일이 잘 안되거나, 더 이상 잘 안되고 있다는 것을 재빠르게 알아
차렸지요. 실연하고 낙담하여,  얼빠진 듯한 그 친구는 그때 비로소  우정의 달콤
함들을 기억해내면서 마음을 달래려고 돌아온셈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감정은  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마음을 닫도록  유도할까요? 왜
그 커다란 꿀벌의  집을, 그들 사이에서 공유할  만하다고 느껴지는 이야기의 두
주인공들 주위를 텅 비어버리게  할까요? 만일 행복한 사랑을 하게 된다면, 나는
오히려 친구들과  그것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정은 나와 결합되고, 타인에  대해
마음을 닫는 대신에 다시 마음을 열게 할 테니까요.
  여성들 사이에서 우정을 방해하는  요인은 그들 자신이 경쟁이 아니라, 우정을
뒤로 멀리 배척하거나 거부하게 만드는 열정의 침입 때문입니다. 감정에 관한 가
치 척도는 변함  없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낭만적인 사랑은 우정보다 훨씬
평판이 좋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에 대한 과대평가는 여성들이 우정에 대해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마치  우리가 동시에 모든 삶을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러
한 관계가 타인들을 침해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우정은 더러 부차적인 감정으로  취급되곤 합니다. 그렇지만 수많은 기쁨 속에
내재된 깊은 감정과, 의식이  있고, 지적인 이성을 화합하게 해줍니다. 사랑의 감
정이 잘못된 행동으로 이어지고, 사람들이 망령으로 취급할 수 있는 것들로 통하
게 될 때도 우정 속에서 우리는 퇴보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45세
의 활달한 독신자인 다니엘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 우정은  타인과 자신의 자아 자체에 대한  갚은 존경을 의미합
니다."
  그렇습니다. 우정은 자아  자체에 대한 존중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품위, 고결
함 등인 것입니다. 우정에 있어서 여성은 겸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도 되며, 노
예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우정의 이름에는  여성이 상대로부터 상처받고, 이용당
하고, 모욕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지요.  그러나 '사랑'의 이름으로  여성은 모든
봉사와 헌신,  해롭고 간악하고 유치한 모든  행동을 강요받을 수 있고,  더 나쁜
것도 용납하게 됩니다.
  사랑의 감정으로 인하여 스스로  갚은 함정에 빠져들었던 카트린 맨스필드는 ,
여성들이 우정을 돈독히  한다는 것은 자유를 얻는것과 대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기]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매우 가혹하게 얽매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겹게 되풀이하고
미래의 여성들에게까지 되풀이되는  따분한 이론의 오류입니다. 사랑만이 중요한
것이라는 이론,  이 부질없는 얽매임에서 벗어날때에만  행복과 자유의 가능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가족의 늪, 독점계약


  무엇이 남성들의 우정을 방해하는  것일까요? 내가 조사한 앙케이트에 의하면,
확고한 세 항목이 장애 역할을 합니다. 즉 ,부부("나는 아내가 있습니다"), 일("나
는 시간이  없습니다"), 가족(가족은  신성하고, 무엇보다 중요합니다")이라는  세
가지 장애 요소 말입니다.
  질문을 받은  남성 중 몇몇은 고독과  우정의 세계에 있는  여유와 자유공간을
갖는 대신, 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심한 남성도, 희생자도 아닙
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탑 뒤에 부인과 마주 앉은 어린아이들처럼 처신합니
다. 마치 모든  시간과 모든 생각을 그녀에게 전념해야만 하며,  그녀만을 목적으
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그 여성은 남편이 다른 여성들과  생각이나 감정의 교류를 할
수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성들이 질투나 의심을 갖는 것
은 결국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노획물
을 잃게 될 까봐, 자신들이 버림받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예를 통해 가족의 늪에서 벗어나게 된 한  남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
다.
  어느 나 티에리는 프랑시스의 구조작업에 임했습니다. 프랑시스는 10년째 사귄
그의 친구인데, 부인과 아이들 옆에서 얌전하게  허약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프랑
시스는 가족이라는 틀에 묶여 자유를 잃은 채, 어쩌다 혼자 남아서 뜰을 가꿀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내와  아이가 그의 유일한세계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예전
의 친구들은 가정에 숨어버린 그의 행동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다 티에리는 체념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시스가 자기 자신의  그림자에, 그
리고 어리석은 그의 아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것
은 정말로 재난이었습니다.
   티에리는 급하게 프랑시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핑계로 그의  집에 들이닥친
후, 그를 가족의 늪에서 구조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데리고 며칠간의
여행을 다녀온 것입니다. 이탈 주 끝에 프랑시스는  원기를 회복했고, 더 이상 우
울한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남성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또 사회적,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일에 치중한 나머지, 그것에 종속되어서도 안됩니다.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을 모방하고 그녀들과 같은 방법을 취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다시 말하
면 우정의 방법을 차용하는 것입니다.
  여성들이 굴욕적인 남편의 속박과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그들의
위치를 재발견하기를 원했을 때,  그녀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녀들은 자신들끼
리 뭉쳐서  이야기하고, 반성하고, 상상하고,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편 없이도 살아갈 수 있고, 부부 관계나 출산, 육아, 가족 관계와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남성들의 우정이  일종의 여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영국인 클럽,  이혼남
들의 활동,  스포츠 모임 등)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은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의  남성다움을 확인하려 합니다. 그
러면서 친구들과 평등한 관계를  되찾으려 합니다. 반면에 그들은 친한 여성이나
다정한 부인에게 막연하게나마  이용당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감동적이고
애정적인 그들의 모든  생활이 부부 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친구를 잃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의 지표와 자신의 충실한 거울, 개인적인 자유
를 잃게 되는 셈입니다. 사랑이나 부부 문제라는 명목으로 친구를 소홀히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의 일부분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고, 감정적, 지적, 정신적인 삶의
가장 큰 부분을 포기하게 되는 셈입니다. 이것은 심각한 불성실함을 드러내는 동
시에 자시 자신에 대해서도 배신 행위입니다.
  흔히 생기는 일로,  남편의 친구들이 아내의 친구가  되거나 그 부부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친근성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우정은 사연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  특수성을 고려하게 됩니다. 마찬가지
로 아내의 친구들 역시 다른 남성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거나, 깊은 교류를 나
누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서로 친구들을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부
부간의 권태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개인적인 풍요와 동등성을 발견하는
것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각자가 기존의 틀에 박혀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
고 오는  대신, 독창적인 방식으로  친구를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부부의 친구
들'.'가족의 친구들'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실체,  상징,
그룹 또는 종족과의  친구가 아닙니다. 아주 분명한  어떤 개인과 우정을 나누는
것입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부부로서 또는 가족의  일원으로서 각 개인이 자유의 공간과
자유 시간, 즉 '자신의 방'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혼자
있거나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평온하게 마련된 자신만의 공간은 참으로 중요합
니다. 이 공간은 우정과 부부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관계에 대해 마음을 열
어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이시스 여신(이집트의 의학, 농업, 혼인의 여신)의  후손다운 품위로, 여성은 자
신을 남성의 연인, 부인,  누이, 여자 친구, 어머니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성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면 남성의 모든  사적인 관계를 금지하거나 남자
에게 아주 잔인한 여자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시스 여신이 존재하는  것, 그것은 독점계약이 아니라 다양성의 계약
입니다. 그 계약은남편의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  남편이 아내 외에 다른 친구들
을 만나는 것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 계약입니다.
 
    관능성과 성욕


  우정의 제스처와 표현은 여성들과 남성들 사이에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남
녀가 서로 다른  이상 크게 놀랄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평등과  동일성 사이에서,
혼성적 특성과 동성간의 사이에서  착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여
성들과 같으며, 그들의 감동이나  감정을 여성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행동하게 되
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착각은 남성과 여성이 우리들의 사회 속에서 평등하게 인정되고 있으며, 그
들은 자주 함께 있거나  섞여 있기 때문에 서로 동일하다고 믿고  있는데서 시작
됩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서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여성
들은 한층 더 동일성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많은 남성들
은 그러한 가면과 환상에 머물러 있습니다.
  두 친구 사이에서 부드러운 말, 상냥한 태도,  애칭이나 별명을 부르는 것 등은
예사롭습니다. 포옹, 애교  등의 육체적 접촉이 없는 우정은 여성이  보기에는 삶
을 빼앗기며, 기쁨과 진실함을 빼앗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성들은 감정이나 애
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그것을 표
현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랜 우정을 유지해 왔음에도 두 남성은
서로 키스하고 껴안는 행위를 피하게 될 것입니다.
  여성의 우정에서는 육체와 감정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두 여자 친구는
아름다운 헤어스타일, 마사지와  메이크업 등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것은 남성
들에게는 아주 엉뚱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남성들도 친구들  사이에서 셔츠, 넥타이, 모자 등의 선택에  대해 서로
를 칭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상한 길위에서 모험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외양에 대해서는  그다지 얘기하지 않습니다. 남
성들은 신중합니다. 여성에  비해 서로의 외모에 대한 관심도 적습니다.  사실 그
들은 외모를 이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정에서 외모로 인한 정당한
위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남성은 성욕과 관능성을 구별하는  것에 대해 매우 힘들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동성연애자로 오인될까봐 다른 사람의 신체적 매력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잠재하고 있는 동성애와 그 금기를 내
세우기보다는 소수의  남성만이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자신들이
유쾌하다고 느끼는 그  관계에 자연스럽게 성적인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들은 그 관계를 거부하기도 합니다.
  여성들은 감미롭거나 기분 좋은 감정을  성욕에 연결시키는데 있어 남성들보다
는 체계적이지 못합니다. 나는 가장 큰 차이점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합니
다. 관능성은  성욕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성에 의해 경험되어집니다. 엄밀히
말하면, 최소한의 범위에서 그녀들의 신체는 연인의  포옹 속에서 만큼이나 바람,
태양, 물이 가볍게 스치는 바람결에도 활짝 피게 됩니다.
  한 여성이 마음속으로  한 존재와의 성욕을 느낀다면, 남성은 그것을  침대, 사
랑의 유희, 성적인 행위 등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성은 오히려 깊은 나
눔, 침묵, 영혼과 영혼의 신뢰, 비밀스런 교류등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들은 남성과의 일상생활과 성생활을  공유하면서도 여성들간
의 친밀한 관계를 나누며 살게  됩니다. 또 여성들 사시의 진실되고 새로운 만남
에 대한 갈증을 체험하기 위해 침실이나 성욕에  한정된 친교를 소홀히 하는것입
니다. 욕망은 이 만남을 은폐하지 못하며, 성적인  쾌락도 이 만남을 막지는 못합
니다.
  남성들은 종종 자신의 능력과 힘에 대한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남성들의 성기
능과 그 쾌락은  능력과 힘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반면에 여성은 다양한
쾌락을 느낄 수 있고, 성욕이라는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을 때 다양한 기쁨을 느
낄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모방하거나 균질화되는 대신, 서로
를 발견하고 서로를 높이 평가해 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하학의 정신과
섬세함의 정신 모두가 필요합니다.
  남성들이 친구들과 다정한 제스처를  나누는 데 뭔가 주저하고 있으며, 자신들
이 여성들에게 주려고  생각하는 감미로운 말을 사용하는데 뭔가  망설이고 있음
을 느끼는 이유를  우리는 압니다. 그들은 성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관능성을
피하려 하는 것입니다. 남성들은  사랑과는 다른 관계속에서 그 관능성을 조심스
럽게 피하게 될 것입니다. 친구들은 친구로 있기 위해서 자신들간에 성욕을 금하
며, 같은 관능적인 환기를 금지하게 될 것입니다.
  남성들간의 친교에  있어 성욕-관능성-에 대한  염려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즉 몇몇은  아내 때문에, 또 는 사랑의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친구를 소홀히하거나 거부한다고  볼수 있습니다. 또 그들은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상대는  그들이 택하려 하지 않는
미묘하고 다른 어떤 의미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목욕물과
아기를 던져버리며, 광적인 성욕과 함께 우정을 던져버리고 있는 셈입니다.
 
    남성다움, 그 사용법


  우정이 조금이라도 진실하고 온전하며 변명이 없기만 하다면, 남성간의 우정은
남성다움에 대한 정의의 문제를 필연적으로 제기하거나 재발견하게 합니다. 우리
는 매우 가까운  두 친구-오레스트와 플레아드, 다윗과 요나단,  아쉴과 파트로클
등-에 대해, 그들이  동성연애자였다고 쉽게 내뱉는 표현들을  접할 때가 있습니
다.
  그런데 말과 행동으로 자신들의 우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동성연애자로 오인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내뱉게 되는 말들에
의해 남성다움의 본질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남성다움은 항상 눈물, 고통, 감동 등을 억제하는 것이며, 욕망을 통제하는 것
등으로 드러나는 것일까요? 남성다움은 사소한 애정 표현을 용납하지 않으며, 단
지 권력,  폭력, 독단을 추구할 뿐일까요?  바꾸어 말하면 그들의  내심을 드러내
보여준다면 남성은 남성다움을 잃게 되는 걸까요?
  나는 파리를 지나는 길에  정신분석학자인 귀 코르노를 만났습니다. 그는 나에
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남성들은 내면의 부드러움과  유순함이 거의 없습니다. 그들의 존재를 뚜렷이
나타내는 방식은 아직도 권력, 직업, 잘 발달된 근육 등입니다. 널리 알려진 것으
로 보면 자동차안 스포츠의 기록, 일, 경제력  등에 연관된 것이 남성다움을 나타
냅니다. 즉 남성들은  외적으로 이루어지며, 남성이라는 껍질이  단단하면 단단할
수록 그 내면은 더욱더 진부해지고 표현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것은 아무 말도
없고 표현도 없는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남성'이라는 존재는 어머니나 누
이처럼 되어서도 안되고,  울어서도 안되며, 감정이나 영혼의  상태를 드러내어도
안됩니다. 여자가  아닌 이상, 몸치장을 해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남성들이 여성들에 의해 길러지면 길러질수록  더욱더 여성들을 두려워하게 된다
는 뜻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물론 산업문명에 의해 가중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남성다움, 그것은 대단한 활력과  솔직함과 교류를
나누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감정이나 욕구를 억제하는 것이 아닙니
다. 대부분의 남성은 항상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실행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그
들은 내면적으로 교제를 하지 않고,  이런 관점에 대해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낍
니다. 나는 그들이 달라지고, 과감하게 무엇이든 하기를 바랍니다."
  남성의 우정은 적대감과  동성애 사이에서 자신들을 위한 길을  개척해야만 합
니다. 우정이  생겨나가 위해서는 상대를 경쟁자나  유혹의 대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교육에  의해서 얽매이는 남성다움, 경쟁, 실제의  성행위, 사회
적 성공 등의 측면에 의해 이끌어집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측면에 완전히 부적합
한 제 2의 성격이  부여되는 것을 스스로 보게 되는 남성에게는  제법 어려운 일
처럼 보입니다.
  청년기에 나타나는 그들 사이의  친근성과 소중한 우정은 부끄러움 없이, 혼란
없이 뚜렷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역은 곧 침식되는 것처럼 보이지
요. 젊은이들은 사랑에 관련된 문제와 친구, 직장 동료, 여가를 함께 보내는 동료
들 사이에서 평이 좋지 않은  친구와는 분명한 경계를 긋기를 더 선호합니다. 이
들에게 우정은 왕도이며, 성에 관계없이 타인이라는 한 존재와 만나는 가장 짧고
도 심오한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앙리 피레르 로세의 소설 [쥘과 짐]은 두 젊은이 사이의 우정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서 그들은 사랑과 성의 본능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쥘과 짐은 카트라는 한  여성이 자신들 사이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독창적인 해결책을 찾아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그녀를 좋
아하면서, 그들의 공통된 감정과  그녀를 매개로 한 우정을 이어가는 것이었습니
다.
  청년기에 우정과 사랑을  이루어가는 일은 까다롭고 곤란한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  시기를 벗어난 후에도 곤경에서 벗어나 우정을  유지하는 방
석을 인정해야만  하는것이지요. 카트는 쥘과 짐중에서  어느 누구와도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우정은 사랑  앞에서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마음에  품는 일
인 것입니다.
 
    절반의 우정


  만약 여성의 우정이 친근함, 사생활 ,감정 등에  근거를 두고 있고 남성의 우정
이 일, 공동으로 생각하고  활동하는 것 등에 더 근거를 두고  있다면, 여성의 우
정이 당연히 상위에 있다고 추론해야 할까요?
  "여성 사이의 교감은 폭이 넓고, 동시에 친밀하고 깊이가 있으며, 또 많이 웃지
요."라고 릴리안은 주장합니다. 내가 볼 때  남성들은 그들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
에 대해서 여성보다 더 어렵게  접근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남성들은 그 문제
들을 최소화시키려 한다는 점에 주목해 봅니다.
  남성들은 그들의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좀  굼뜨고 서투른 것 같
습니다. 우정이나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다양한 말과 의사표현보다는 오히
려 직접 보여주고 행동으로 옮기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 웃는 모습으로 말해 보자면 남성과 여성은 매우 다릅니다. 남성들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말장난, 말솜씨,  암시 등을 배우게 되지요. 그들의 웃음은 쾌활
함이나 가시  돋친 익살에서 나옵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덜 정신적이고,  덜
중요한 웃음을 나눕니다. 종종 자신들의 경박함을  비난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괴
로움이나 희극, 비극을 비웃기도 합니다.
  여성들의 내면성의 추구는  깊은 우정을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나아가게 합니
다. 남성들은 동력, 튼튼한 기둥, 자신을 초월하는 것 등으로 이 경험을 체득합니
다. 즉 이것이 우정에 대해 취하는 남성들의 태도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남성의 우정이 여성의 우정과 동일시되기를  원하는 것일까
요? 혹시 획일성의 함정에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왜 여성  사이의 우
정이 승인될 만한  유일한 표본이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그것은 타인을  다른 존
재로 인정하는 대신에 유일한 법칙으로 그 관계를 강요하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진실한 우정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을 털어놓는 동시에, 상대를 위해 자신의 온 존재와 시간을 바치며 희생한다
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절반의 우정만  나눌 수는 없습니다. 내가  보기에 우정은 일종의 양성
동체의 관계사이의  상응에 있어서 가장 순수하고  완성적인 모델로 생각됩니다.
우정은 그러한 상응에서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인  장점을 주고받으며 상호 도움
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4. 남녀간의 우정


  "그대에게 사랑보다 더 좋은 것을 드리고 싶어요. 물론 당신은 다른 이들과 사
랑을 맛볼수 있겠지요. 하지만 난  우리 사이가 더 감미롭고 강한 관계가 되리라
믿어요. 모든 연인들 중 한  여인, 오로지 그대에게만 선택권을 줄 수 있지요. 난
그대에게 그것을 줄 것이오. 우정을 말이오."-장 지로두-


    대담한 여성이 얻는 자유


  남녀간의 우정은  사랑의 실패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자유일까요? 정복, 소유,
질투, 의존 등을 피하는 이런  뉴의 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성과 여성이 자유
롭고 동등한 존재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또 여성이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 만족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일입니다.
  이것은 남성들이  여성들과의 관계를 성적인  매력뿐만 아니라 지성과  창의력
등 그 개인의 전체 속에서 여성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
습니다.
  역사적인 예들이 이를 보여줍니다. 지적으로 세련된 여성들과 18세기에 살롱을
운영하던 여성들은 학식  있고 지성적인 유명한 남성들과 아름답고  위대한 우정
을 나누었습니다. 그녀들은  예술, 지성, 학문, 철학 등에 관한  대화를 통해 우정
을 가꾸어 나갔지요. 그래서 아름다운 여인이  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으며,
시선을 끌거나 욕망의 대상이 되어 옷을 벗어야  하는 여인으로 만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여성은 오래 전부터 남성들과의 우정을 원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정이 직
업적인 환경이나 사생활의  범위에서 남녀간의 관계를 서로 진보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개인의 지위를 회복한 이후부터입니다.
  어찌 보면 남성과의 우정을  나누고 싶어하는 여성은 대담한 여성입니다. 이들
은 여성을 섹스의 동반자(욕구 또는 쾌락의 대상)로  취급하는, 틀에 박힌 사고를
거리낌없이 헤쳐나갈 줄 아니까요. 이러한 여성은  일시적인 욕구와는 다른, 보다
독창적인 차원에서 지적인 공유와 정신적인 애정 등을 바라는 것이지요.
  이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남성과의 우정으로 이어지며, 그 관계는 복종으로
얼룩지지 않게  됩니다. 또 일시적인 이해관계(관능적인  욕구 또는 금전상의  욕
구)로 남성에게 다가가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