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실크로드

쿠처와 한반도의 오랜 인연

오늘의 쉼터 2011. 4. 26. 14:38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쿠처와 한반도의 오랜 인연

» 쿠처 시내에서 북동쪽으로 20여㎞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고대 불교 유적지 쑤바스 고성. ‘물의 원천’ 이란 뜻의

쑤바스는 톈산산맥에서 녹아내린 얼음물이 강줄기를 타고 와 성 한가운데를 관통한 데서 비롯됐다.

성은 문화혁명 때 대부분 파괴되고 지금은 외벽만 남아있다.

 

 

오후 6시 10분 투루판을 떠난 열차가 밤새도록 달려 쿠처역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아침 6시였다. 거리 상 별반 멀지 않지만, 텐산 산맥의 남쪽 기슭을 구비구비 돌아가다보니 꼬빡 하룻밤이 걸렸다. 기차가 떠난 지 30분쯤 지나자 갑자기 바람 소리가 윙윙거리며 철로 옆에 늘어선 갈대가 심하게 휘적거린다. 지도를 찾아보니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노풍구(老風口)’다. ‘늘 바람이 부는 어귀’라는 글자 뜻처럼 이곳에서는 보통 초속 20~30m, 심할 때는 사람까지 날려보내는 초속 60~80m의 강풍이 몰아치곤 한다. 텐산 산맥에서 일어난 서북풍이 허허벌판 사막에 이르러 무시무시한 강풍으로 돌변하는 자연현상 때문이다. 옥문관 지나 맞닥뜨리는 ‘악마의 늪’ 백용퇴나, 둔황에서 하미 가는 길에 펼쳐지는 ‘죽음의 사막’ 막하연적과 필적되는 험지다. 오아시스의 한때를 편히 보낸 길손들에게 다음 오아시스 안착을 위해 신이 내린 시련의 ‘통과의례’다.

한여름인데도 고산지대라 산기슭에서 흘러내린 시냇물엔 살얼음이 끼고 차창가엔 서릿김이 감돈다. 고산지대를 지나면 초원지대가 펼쳐지고, 이어 백양나무 우거진 오아시스들이 점점이 눈에 띄는 텐산 남도는 자고로 서역을 가는 주 통로다. 시간에 쫓겨 밤 기차 여행을 하다보니 모든 비경들을 맛보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다. 이윽고 어스름 속에 쿠처 시가지가 드러났다. ‘왕궁의 화려함은 신의 거처와 같고’, ‘외성은 장안성과 흡사하고 가옥은 장려하기만 하며’, 1천 넘는 행상(行像: 불상을 모신 행렬)이 구름처럼 몰려들던 옛 명성에 비해 작은 현 소재지인 오늘날 쿠처는 너무나 초라하다.

 

 

 

혜초, 고선지 그리고 악무의 전래로 쿠처는 겨례사의 일부라 하겠다

 

쿠처(庫車)는 한나라 이래 줄곧 ‘구자(龜玆)’로 불리웠다. 원나라 때 회골어 역음으로 ‘곡선(曲先)’이나 ‘고선(苦先)’ 같은 이름이 생겼고, 청나라 건륭제 때 지금 지명으로 바꿨다. 중국 사서에는 기원전 1~2세기께부터 ‘구자’란 이름이 등장한다. <한서>‘서역전’을 보면, 구자는 인구 8만 1천여명에 군사 2만여명을 보유한 서역 36개국 중 9대국의 하나였다. 장안에서 7480리 떨어진 연성(延城)에 도읍한 이 나라는 일정한 국가체제도 갖추고 쇠를 녹여 야금하는 법도 알았을 정도로 발달한 나라였다. 오아시스 육로의 지정학적 요지에 자리잡은 까닭에 한 왕조는 시종일관 이곳을 중시해 왔다. 흉노가 이 지대를 위협하자 기원전 60년 동쪽으로 350리 떨어진 오루성에 첫 서역도호부를 설치해 내침에 대비했다

 

 


» 고선지 장군이 서역으로 출정하기 전 통과했던 ‘구자고성’이 옛 영화는 사라지고 잡풀만 무성한 채 달랑 ‘구자고성유지’라는 비만 남아있다.

 

 

신의 거처 같다던 왕궁의 옛 명성은 가고

 

그 무렵 오손으로 시집간 한나라 공주의 딸과 정략결혼을 한 왕 강빈은 1년 동안 장안에 머물며 한의 문물과 제도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쿠처가 후한 초 혼란기를 틈타 흉노에 붙으며 한을 이반하자 후한 화제는 73년 반초를 파견해 서역을 평정하고 구자를 다시 복속시켰다. 위진남북조 시대에도 경제적 부를 누리다 당대에 이르러 안서도호부가 설치되면서 쿠처는 서역 경영의 핵심부 구실을 했다. 동서문명 교류에 크게 기여한 쿠처의 역사와 문화는 멀리 떨어진 한반도까지 밀려갔다. 혜초와 고선지를 비롯한 선현들이 그곳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고, 그곳 악무가 동방으로 전해졌으니 쿠처야말로 우리와 오랜 인연을 맺고 겨레사의 외연권(外延圈)에 들어있는 일원이라 하겠다.

개원 15년(727년) 11월 상순, 인도에 구법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중이던 신라승 혜초는 쿠처에 도착한다. 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 중에서 유일하게 행적의 시간을 밝힌 곳은 이곳 뿐이다. 스님은 여행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소륵(오늘의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구자국에 이른다. 안서대도호부가 있는, 중국 군사의 대규모 집결처다. 절도 많고 승려도 많으며 소승 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는다. 중국 승려들은 대승법을 행한다.” 그는 이어 당시 안서도호부 절도사가 조군(趙君)이며, 중국인 승려가 주지로 있으면서 대승법을 행하는 절이 두곳밖에 없음을 전하고 있다. 간략한 기록이지만 혜초의 여행기는 8세기 쿠처에 관한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 ‘서역정벌의 영웅’ 고선지 장군 유적은 어디에…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쿠처와 한반도의 오랜 인연

쿠처는 기원전 1세기 전한 때 불교가 들어온 이래 서역에서 불교가 가장 흥성한 나라였으며,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도 기여했다. 초기 포교시대인 2~5세기 주로 북인도에서 소승 불교가 들어와 유행했으나, 7세기부터 점차 사라지고 대신 대승법이 들어와 중국에 전파되기에 이른다. 혜초의 기록에서 하나 밝혀야 할 점은 조군에 관한 사실이다. 당시 안서도호부 절도사(종2품)는 친왕인 두섬(杜暹)이었으나 명의일뿐, 현지에 부임하지 않고 부도호인 조군이 대행했다. 그래서 혜초는 조군을 절도사로 알았던 듯하다. 어쨌든 기록상으로 혜초는 이역만리 쿠처에 간 최초의 한반도 사람이다.

혜초와 거의 동시대 인물로 한반도와 쿠처간의 인연을 맺어준 사람은 고구려 유민 출신의 장군 고선지다. 그 인연은 혜초보다 더욱 끈끈하다. 고선지가 어디서 출생했는가는 미지로 남아있으나 어릴 적 안서군 중급 장교였던 아버지 고사계를 따라 3만 안서군이 주둔하던 쿠처에서 시간을 보낸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약관 20세에 아버지와 관품이 비슷한 유격장군에 발탁된다. 중국 사서는 음보(蔭補:조상 덕으로 벼슬 자리를 얻는 일)에 따른 발탁이라고 기록했지만, 실제로는 그의 출중한 용모와 무예, 지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판단된다. 고선지는 불과 11년 사이(740~751년)에 절도사로 승격해 다섯 차례 대군을 이끌고 전쟁사에 보기 드문 서역원정을 단행한다. 그런데 그 출발지와 개선지가 그가 패전한 탈라스 전쟁을 빼고는 모두 쿠처다.

 

‘왕오천축국전’ 에서 유일하게 시간 밝힌 곳

고선지는 명실상부한 ‘파미르의 주인’이었다. 그의 서역원정으로 파미르 고원 이동에서 당 제국의 경영권이 확보됐다. 원정을 계기로 오늘날 중국 서부 변경이 확정되는 역사적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제지술 전파를 비롯한 동서문물 교류가 촉진된 것도 고선지 원정이 낳은 불후의 산물이다. 여기에 더해 겨레사에서도 그 지대한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게 된다. 고선지는 당의 무장이기에 앞서 고구려 땅에 태를 묻은 고구려인의 후손이었다. 망국유민의 한과 설움을 오직 무를 닦는 정열로 승화시켜 마침내 당대 으뜸가는 용장으로 성장했다. 몸은 비록 이역땅에 두고 있었지만, 위대한 고구려인의 얼과 슬기를 세계 만방에 드날린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신라 유물 곳곳 교류 흔적

 

» 당나귀는 쿠처 사람들의 주요교통수단이다.

 엄마가 모는 당나귀 수레 위에서 옥수수를

먹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목가적이다.

지금 이곳 어디에도 이 절세의 위인을 기억하거나 기리는 징표는 없다. 그저 흔적 한 점이라도 찾아보는 것이 이번 쿠처 답사의 첫째 바람이었다. 그래서 쿠처의 옛 성벽이 확인되었다는 안내원 말에 솔깃해 이곳의 첫 행선지를 그리로 잡았다. 고선지는 출정 때마다 그 성벽을 넘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숙소인 고차 반점(庫車飯店)에서 15분 거리의 성터에 도착했을 때 실로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려했던 궁성이 남긴 성벽 유적이 이토록 허술하다니. 길가에서 5미터쯤 떨어진 수풀 속에 ‘구자고성유지’(龜玆故城遺址)라고 쓴 푯말이 꽂혀 있을 뿐, 아무런 관리시설도 없다. 2~3미터 높이의 흙무지가 옥수수 밭 한가운데로 300미터쯤 뻗어가다가 꼬리를 감춘다. 일행의 인기척에 성벽 옆 풀숲 이곳저곳에서 ‘볼일’보던 사람들이 엉거주춤 머리를 내민다. 그래도 장군의 족적을 되밟아 봤다는 일말의 긍지 하나로 이 모든 허전함을 털어버리고 발길을 돌렸다.

쿠처와의 인연 속에는 문물의 오감도 한 몫을 했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나 신라의 유물 중에서 쿠처와 공유하고 있는 몇 가지 문명요소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악무다. 중국 수나라 때의 구부기(九部伎)나 당나라 때의 십부기에 사용되는 악기들 중에는 서역 악기에 속하는 5현이나 요고, 동발, 공후, 피리, 저, 소 등의 악기가 고구려기와 구자(쿠처)기에 공통으로 등장한다. 그밖에 고구려의 장천1호분 벽화에는 오현이, 고구려의 집안4호분 벽화와 신라의 비암사 아미타불삼존석상에는 요고가, 신라의 상원사 범종 종신에는 공후가, 고구려의 장천1호분 벽화에는 피리가 그려져있다. 이 모든 것은 두 지역간의 활발한 악무교류를 말해주고 있다.

» 투루판을 저녁에 떠난 열차가 출발한 지 12시간

남짓만인 이튿날 새벽 쿠처 역에 도착하자

중천에 뜬 달이 먼저 반겼다.

또 9세기 대문호 최치원이 저술한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에는 신라 때 유행한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 등 다섯 가지 놀이를 소개하고 있는데, 모두가 서역계통의 것이다. 그 중 오늘날까지도 전승되는 산예(?猊)는 다섯 마리의 사자들이 추는 해학적인 춤으로 쿠처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최치원의 묘사에 의하면, 멀리 서방 사막을 지나오느라 털옷은 다 해지고 온몸엔 티끌만 뒤집어쓴 사자가 인덕(仁德)이 배어있는 머리와 꼬리를 흔들면서 영특한 기개와 재주를 자랑한다. 이런 사자춤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무형문화유산인 ‘북청사자놀이’ ‘봉산탈춤’, ‘통영오광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쿠처와 우리는 다같이 춤과 노래를 즐기는 한동아리의 문명인들이다.

 

글 정수일 문명사 연구가, 사진 이종근 기자

 

 

 

 

양귀비 홀린 북소리·관능적 무희 실크로드 휩쓴 ‘7∼8세기 한류’ 서역 악무의 본산, 쿠처

 

 

 

» 키질 석굴 77굴 벽화에 그려진

비단을 휘감고 춤추는 여인상.

쿠처는 고래로 서역 음악의 본산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선율과 리듬감각이 남달랐던 쿠처인들의 음악과 춤은 중앙아시아는 물론 중국 중원까지 풍미했으며

우리 전통음악의 산조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미 7세기 인도 구법 여행 당시 쿠처를 방문했던 승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의 관현 기악 수준은 어느나라보다 명망이 높다”고 칭송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실제로 쿠처 키질 석굴 벽화에는 숱한 악기 연주장면이 200군데 이상 묘사되고 있어서

이 지역의 풍부한 음악 전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쿠차 악은 현란한 타악 리듬에 맞춰 비파 등의 현악기와 종적 소 등의 목관악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선법은 중국 당나라 시대 폭발적인 ‘쿠차 신드롬’을 낳았다.

당시 왕실과 귀족들은 쿠차악을 듣는 것이 필수적인 풍습이었는데, 특히 받침대 위에 쿠차의 작은 북인 갈고를

두드리는 것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양귀비와 염문을 뿌린 현종도 갈고 연주의 명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사서기록을 보면 현종은 궁정에 3만명 이상 악사와 무용수를 두었는데,

대부분 쿠차에서 왔거나 쿠차 음악을 연주하는 이들이었다고 한다.

당대 일곱가지 외국음악을 칠조라 일컬었는데, 쿠차악이 가장 번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음악 못지않게 사마르칸드 무희와 쌍벽을 이루었다는 쿠차의 무용수들도 각광받았다.

엉덩이를 비롯한 몸 각 부분의 관능적 이미지, 강렬한 눈매를 부각시켰던 쿠차 춤은 원래 인도의 무용에 바탕한

것이 었으나 점차 율동감이 격렬한 이란풍 호선무를 융화시켜 복합적인 실크로드 춤문화의 주역이 되었다.

7~8세기에는 장안, 사마르칸드 등 실크로드 연변의 주요도시마다 쿠처 궁정에서 파견된 가무단의 순회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쿠차의 가무는 오늘날 한류처럼 실크로드 교역에서 강력한 문화상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