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고미술

안견 / 소상팔경도.사시팔경도.몽유도원도

오늘의 쉼터 2011. 1. 20. 20:27

 

 안견(安堅) : 조선전기

   안견의 본관은 지곡(池谷), 자는 가도(可度)·득수(得守), 호는 현동자(玄洞子)·주경(朱耕)입니다.

정확한 출생과 사망년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1400년경을 전후하여 태어나 세종대에 활동하고 세조연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화원으로 종 6품 선화(善畵)를 거쳐 정 4품 호군(護軍)에 올랐습니다. 

안견파를 이룬 조선시대의 4대 화가

1442년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초상을 비롯하여 "이사마산수도(李司馬山水圖, 1443)", "팔준도 (八駿圖, 1446)",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1447 ,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대소가의장도 (大小駕儀仗圖, 1448)", "동궁의장도(東宮儀仗圖, 1448)"  등을 그려 세종대 화단의 제 일인자로 활약했습니다. 사람됨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했으며,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옛 그림들을 많이 보면서 그 요체와 여러 대가들의 좋은 점을 취하고 절충해 자신의 화풍을 이룩했습니다.

   인물, 화훼, 매죽(梅竹), 노안(蘆雁), 누각(樓閣), 경작(耕作), 말(馬), 해청(海靑) 등을 잘 그렸으며, 특히 산수화에 빼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당시에도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북송(北宋) 때의 화가 곽희(郭熙)의 화풍을 바탕으로 여러 화가의 장점을 절충하였으며,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안견은 소나무 그림을 잘 그리기로도 유명합니다. 이를 비롯하여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던 그의 화풍은 일본의 수묵 산수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화풍은 이른바 "안견파"라고까지 불리울 정도로 조선시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늘의 화가, 안견은 정선, 김홍도, 장승업과 함께 조선시대의 4 대 화가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전해지고 있는 그의 작품으로는, 가장 유명한 "몽유도원도>" 외에, "안견 사시팔경도", "안견 적벽도" 등이 있습니다.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

중국 후난 성[湖南省]양쯔 강[揚子江]남쪽의 샤오수이 강[瀟水], 샹장 강[湘江]이 합류하는 지점의

아름다운 경치를 8폭에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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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청람(山市晴嵐)-1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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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사모종(煙寺晩種)-2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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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야우(瀟湘夜雨)-3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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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포귀범(遠浦歸帆)-4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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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사낙안(平沙落雁)-5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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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洞庭秋月 동정추월)-6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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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촌낙조(漁村落照)-7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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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모설(江天暮雪)-8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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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




초춘(初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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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춘(晩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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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初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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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晩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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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추(初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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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추(晩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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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初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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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晩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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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도원도[夢遊挑源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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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 쓴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된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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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20일 밤에 바야흐로 자리에 누우니 정신이 아른하여 잠이 깊이 들어 꿈도 꾸게 되었다.

그래서 박팽년과 더불어 한곳 산 아래에 당도하니 층층의 멧부리가 우뚝 솟아나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한 채 아름다우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고,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르자,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서성대며

어디로 갈 바를 몰랐었다.
한 사람을 만나니 산관야복(山冠野服)으로 길이 읍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휘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도원이외다.” 하므로 나는 박팽년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여 찾아가니, 산 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길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한다.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마을이 넓고 틔어서 2, 3리쯤 될 듯하여, 사방의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 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르고,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토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신선의 마을과 같았다.
이에 주저하여 둘러보기를 오래 하고, 박팽년한테 이르기를, “바위에다 가래를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더니, 어찌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정말로 도원동이다.” 라고 하였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으니 바로 최항, 신 숙주 등인데, 함께 시운을 지은 자들이다.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깨었다 …중략…그리하여 가도 안견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였다. 다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은 내가 알지 못하니, 이 그림과 같은 것일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보는 사람들이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 본다면 반듯이 무어라 할 말이 있으리라.

꿈꾼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림이 다 이루어졌으므로 비해당 매죽헌에서 쓴다”




박팽년의 몽유도원도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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