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 윤덕희(駱西 尹德熙)
1685(숙종 11)~1776(영조 52)
천재 예술가들이 불꽃처럼 살다 요절하는 것처럼 공재 윤두서 또한 파란 많은 생을 살다 48세라는 비교적 짧은 생애를 마친다. 당시 조선시대인의 삶에서 이 정도의 나이는 아주 짧다고도 할 수 없지만 공재의 증조부인 고산이 85세까지 살았고, 공재의 어머니인 심씨 부인이 80세 넘을 때까지 살았으며 공재의 아들인 낙서 윤덕희 또한 82세까지 살았던 것을 보면 아쉬운 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남 윤씨가의 인물들은 이처럼 아주 짧은 생을 살다간 사람도 있지만 지금 나이에 견주어 보아도 장수를 했던 인물들이 있어 극과 극을 이룬다.
‘자화상’이라는 불멸의 작품을 남긴 공재 윤두서는 일생동안 그의 명성에 걸 맞는 대우를 받거나 관직생활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는 당시 복잡한 정치적 당쟁 속에서 소외당한 남인집안의 처지임도 한몫 했다 할 수 있다. 그는 화가로서의 꿈을 현실적으로 펼쳐 보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데 오랫동안 서울에서 생활을 하던 그가 향리에 내려간 지 얼마 못되어 쓸쓸히 죽는다.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절친한 사이였던 심득경의 죽음과 어머니 심씨 부인의 죽음 등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과 향리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것들이 얽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공재는 오늘날의 몸살감기 같은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홀연히 세상을 떠난다.
공재의 아들인 낙서 윤덕희가 기록한 ‘공재공행장’을 보면 유독 인간적인 그의 면모가 곳곳에서 엿보인다. 자신의 부친에 대한 애정으로 기록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의 죽음은 그가 남긴 족적을 생각하면 애석한 것이었다.
공재의 대를 이은 낙서 윤덕희
공재의 이러한 짧은 생을 그대로 계승이라도 하듯이 대를 이은 인물이 장남인 낙서 윤덕희(1685~1766)다. 해남 윤씨가는 공재에서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1708~1740)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화가를 배출하는데 공재에 버금가는 명성을 가졌던 인물이 낙서 윤덕희다.
공재의 그늘에 가려서인지 낙서의 이름은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48년 숙종어진중모(肅宗御眞重模)에 참여했을 만큼 당시 인정받은 화가이기도 하였다. 낙서는 아버지 공재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라도 하듯이 그의 회화관을 그대로 이어가는데 최근 그의 회화세계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윤덕희의 생애에 대해서는 녹우당에 소장되어 있는 유고집인 <수발집>(溲勃集)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의 나이 21세에서 82세까지의 시문이 연대기로 쓰여 있어 그의 생애와 교유관계, 회화관을 살필 수 있다.
윤덕희는 30세가 다 될 때까지 서울 낙봉(駱峰)의 서쪽에 위치한 회동(會洞)에 살았으며, 옥동 이서(1662~1723)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부친인 공재의 영향으로 서화에 입문하였다. 서울에 살던 낙서는 30세가 되어 고향 종택인 백련동에 내려와 살게 되는데, 그는 이때 선대로부터 내려온 가전유물을 정리하고 서화를 수련하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남 윤씨가 인물들은 서울과 지방의 생활이 따로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낙서 또한 47세 무렵에는 다시 향리 생활을 접고 서울로 올라가는데 그가 화가로서의 삶과 인생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진 것이 이때라고 할 수 있다.
낙서는 1748년에 숙종어진중모(肅宗御眞重模)에 감동(監董)으로 참여하며 이로 인해 6품직인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를 제수 받고 2년 동안 관직생활을 하기도 하는데 얼마못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말년인 68세에 다시 해남 백련동으로 낙향하여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게 된다.
낙서의 회화세계
낙서 윤덕희는 초기에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아버지인 윤두서의 화풍을 충실히 이어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아버지인 공재의 영향이 그만큼 컸다고 할 수 있으며 낙서 또한 집안의 가풍인 박학(博學)과 기술정신을 밑바탕으로 하여 그의 회화관을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낙서는 1709년 자신이 백운대(白雲臺)를 그린 부채 그림에 대해 쓴 시에서 ‘진경’에 대해 언급하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기록 중 ‘진경’이라는 용어를 가장 이른 시기에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윤덕희의 산수화는 초기에 이상경을 소재로 한 정형산수화를 선호하고, 안견파(安堅派)와 절파화풍(浙派畵風)등 전통화풍의 계승과 남종화풍을 익히는데 몰두하여 18세기 우리나라에 남종화풍을 정착시키는데 이바지했다.
그는 공재로부터 배운 전통화풍을 가미하여 후기에는 독자적이고 개성 있는 화풍을 형성하였는데, 관수도 ․ 관월도 등 산수인물화와 함께 원숙한 남종산수화들을 그렸다. 인물화에서는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를 많이 남겼으며 풍속화도 여러 점 남겼다. 이와 함께 동물화는 인마도(人馬圖), 수하마도(樹下馬圖), 용도(龍圖)와 같은 작품을 남기고 있어, ‘진경’을 통해 서양화법, 남종화법, 도석인물화, 풍속화 등 공재로부터 전승된 화법을 잘 계승하여 나름대로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킨 화가라고 할 수 있다.
윤덕희의 이름은 화가로서의 행적이 크지만 오늘날 해남 녹우당에 이처럼 많은 고적들이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은 낙서 윤덕희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선대부터 집안에 전해져 오는 수많은 고적들과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인물이 윤덕희다.
가장 오래된 문서로 고려 공민왕 때 만들어진 ‘지정14년 노비허여문기’또한 윤덕희가 ‘전가고적(傳家古蹟)’으로 꾸몄는데 발문에 보면 ‘중종대에 보관되어 있던 것을 다시 첩으로 꾸며 놓았으니 후손들은 전가지보(傳家之寶)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집안의 많은 문집과 고적들을 잘 묶고 정리하여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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