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 미녀들

중국 역사속의 미인들

오늘의 쉼터 2011. 1. 14. 20:32

 

중국 역사속의 미인들
 

견황후
위문제황후. 와락. 조비가 황제가 된후 곽황후의 총애하게 되자 조비한테서 실총하고 죽음.

문소황후(文昭皇后). 본명 복(宓). 원소의 아들 원식의 처였다가 후에 조비의 처가 되었다.삼국지 등장 여인중 미색으로 치면 초선 다음이요, 재주로 치면 따를 이가 없었다고 한다.
(초선은 삼국연의의 허구의 인물이기 때문에 폐월은 견씨를 칭하는 말이라는 설도 있다.)
어려서 집안의 뜻에 따라 원소의 집안으로 출가를 했고자라서는 단지 아름답기 때문에 마치 전리품처럼 조조의 집안으로 끌려간 비운의 여인.의처증이 심했던 조비는 아들 조예와 딸 동향공주가 평범하게 생긴 자신과는 달리 너무 아름다워 자식들의 모습에서 그녀를 흠모하였던 동생 조창과 조식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을 박해하더니 조창은 독살을 하기에 이르렀고 후에 첩인 곽씨의 모함에 혹해 그녀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조식은 사랑하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강에 뛰어들려고 하였는데그 때 홀연히 여신의 모습을 한 그녀가 나타나 조식을 말리는 환상을 겪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노래한 시가 바로 조식을 이백,두보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시성으로 만든 낙신부(洛神賦)다.
원제는 감견부(感甄賦 : 견씨를 느끼며 지은 부)였으나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의심으로 죽임을 당한 어머니를 항상 애통히 여겼던 조예가 어머니의 명예를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낙신부(洛神賦)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遠而望之 皎若太陽升朝霞  멀리서 바라보면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 하늘처럼 빛나고,
迫而察之 灼若芙?出?波  가까이서 보면 흰 연꽃이 녹빛 물 위에 피어난 것 같네.
?纖得衷  修短合度   몸매는 날씬하고 키도 적당하며
肩若削成 腹如束素    어깨선은 깎은 듯 매끄럽고 허리는 흰 비단을 두른 것 같다.
延頸秀項 皓質呈露    목덜미는 길고 갸름하며 흰 살결을 드러내고 있다.
芳澤弗加 鉛華弗御     향기로운 연지를 바르지도 않고 분도 바르지 않았다.
雲?峨峨 修眉聯娟       구름같은 모양으로 머리는 높직하고, 길게 그린 눈썹은 가늘게 흐른다.
丹唇外朗 皓齒內鮮     빨간 입술은 선연하게 눈길을 끌고 하얀 이는 입술 사이에서 빛난다.
明眸善? ?輔承權       맑은 눈동자로 때로 곁눈질 치고 보조개는 귀엽기 그지없도다.
'침어낙안 폐월수화'와 더불어 미인을 칭하는 단어인' 명모호치(明眸皓齒 :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곽애
 명조때 궁녀.

비운의 여인 이랄 수 밖에 없는 가엾은 여인이다. 궁녀인 그녀는 어느 시기나 그렇지만 궁녀들은 일단 입궁하면 생사는 영원히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명대 초기의 궁정은 원대의 참담한 순장제도를 답습하고 있어서 선종이 붕어하자 그녀도 명(明) 선종(宣宗) 순장을 위해 입궁 20일만에 간택되었다. 절명사는 임종전에 지은 것으로 글자 하나하나에 부모와의 결별의 슬픔을 담고 있다. 《절명사(絶命辭)》 修短有數兮 不足較也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알기에 비교하기는 어렵다지만 生而如夢兮 死者覺也 생은 꿈만 같다는 것은 죽은 자만이 알 수 있다.. 先吾親而歸兮 ?予之失孝也 먼저 스스로 돌아가려 하니 효를 잃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며 心凄凄而不能已兮 是則可悼也 마음이 괴롭고 괴로워도 어쩔 수 없으니 그저 슬플 뿐이네.

당완
 륙유의 외사촌동생이며 안해이다.

송대 시인 육유(陸游)의 사촌여동생이자 처. 원래 육유와 금슬이 좋았지만, 시어머니의 미움을 사, 서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훗날,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옛지명 : 회계(會稽))의 심원(沈園)을 들렸다가 둘은 우연히 해후를 하여 서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육유는 96세까지 장수하였으며 만년에 이 심원에 들러 그녀를 그리는 수많은 글을 지었다고 한다.
육유는 수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시만도 9,200여수나 된다고 한다.
그 중 그녀를 기린 시는 얼마나 될련지....다음은 심원에서 육유가 지은 시에 그녀가 회답한 시라고 합니다.  世情薄, 人情惡, 雨送黃昏花易落. 曉風干, 淚痕殘. 意緘心事, 獨語斜欄. 難, 難, 難! 人成各, 今非昨, 病魂常似秋千索. 角聲寒, 夜?珊. ?人詢問, 咽淚?歡. 瞞, 瞞, 瞞! 세정은 야박하고, 인정은 악합니다.
비는 황혼의 꽃을 쉬이 떨어뜨리고,새벽바람 불어와 눈물자욱을 남기네요.
마음을 적어보내고 싶지만 난간에 기대어 혼잣말만 합니다.
힘들고, 힘들고, 힘듭니다.
감추고, 감추고, 감춥니다.

사람은 각각이 되었고, 오늘은 어제가 아닙니다.

병든 마음은 그네끈처럼 길고, 뿔피리 소리 차가워 밤을 깊어가게 하네요.
누군가 물어볼까 두려워 눈물화장 삼키고 기쁜 척 합니다.

도온
사도온. 사안질의 딸

사도온은 중국 동진시대  사람(약 서기 376년 전후)으로
동진시대의 저명한 여류작가이기도 하다.
사안의 질녀, 사혁의 딸로서
유명한 서예대가 왕희지의 아들
왕응(王凝)의 아내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의 재주가 뛰어 났는데 한번은 삼촌 사안이 서당에서 강의하는데 함박눈이 내리는 지라
"함박눈이 흩날림은 어쩐 일인고?"라고 하면서 학생들보고 대구(대구)를 쓰라고 했다.
이에 사도온은 "버들꽃 마냥 바람에 춤을 추네."라고 했는데,
후에 이 글귀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기 399년 남편 왕응이 반란군에 의해 살해 된 뒤 사도온은 홀로 여생을 보냈다.
지금까지 전하는 작품으로는
"논어찬"이라는 산문 한편과
"태산음(泰山吟, 태산을 읊음)" 시 2수가 있다.
동진시대, 왕씨(왕희지)와 사씨(사안)의 가문은 거족으로 "옛날 왕사 처마 밑을 날던 제비가
오늘을 평범한 백성의 집에 날아드네." 라는 글귀에서 "왕사"란 바로 왕희지와 사안의 가문을 놓고 하는 말이다.

류려
 명청시기 이름난 가수 재녀다.

개성이 강하고 정직하고 총명했는데 지혜가 뛰여났으며 인기가 대단했다.

 하동군, 비무군이라고 불리였다.

그녀는 중국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기녀로 성격이 매우 도도하고, 강직하여 매력적인 여자였다고 한다.
본명은 유애류(柳愛柳)로 여시(如是)는 자(字)이다.
이는 그녀가 다음과 같이 읊은 데서 연유했다고 전해진다.
 我見靑山多?媚,料靑山見我應如是
내가 청산을 보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
 
우리나라에서는 명나라가 망하자 남편인 전겸익(錢謙益)에게 자살을 권한 것과 허난설헌의 작품에서 표절한 부분을 지적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리사사
 리사사는 변경의 염방의 왕연의 딸이였는데 세살때 아버지가 그녀를 불사에

맡겼는데 늙은 중이 그의 머리를 만지자 그녀가 불시로 크게 울어 늙은 중이 그녀를 중감이라여겨

사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송휘종이 그녀의 이름을 흠모하여 그녀와 즐겼다는 고사가 있다.

 

 

반소
 한조때 반고와 반초의 녀동생.

반소의 자는 혜반이요 또 희(姬)라고도 한다.
"전한서(前漢書)를 최초로 집필했던서한의 대 문호 반표(班彪)의 딸로 14세에 조세숙에게 시집을 갔던 관계로 사람들은 그를 "조대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선한 대 문호반고(班固)의 여 동생으로 반고가 사망한 뒤
그 뜻을 이어 "전한서"를 완성했는 바 "전한서"의 편찬에서 가장 복잡했던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와 천문지(天文志)"는
반소가 완성한 것이다.
"전한서"는 중국 첫번째의
"기전체단대사(紀傳體斷代史)" 사서로 새로운 역사기록의 방법을 개척한 사서이다.
반소는 또 반초(班超)의 누이로
반초는 중국 고대 유명한 군사가요 문호로서 "붓을 꺾어버리고 전장에 나가다"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고 어찌 범을 잡을 수 있으랴!"라는 말들은 모두 반초에게서 비롯된 말이기도 하다.
반소는 중국 고대 10대 미녀 중
재주가 가장 출중한 미녀이기도 하다.

반여첩
반첩호. 한성제비로서 서한시기 녀문학가. 반고의 고모이다.

첩여(??) : 중국 한대(漢代) 궁녀의 관명.반첩여(班??)와 조비연(趙飛燕)은 한(漢) 성제(成帝)의 후궁으로,성제는 처음에는 반첩여를 매우 총애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조비연에게로 사랑이 옮겨 갔다.

사랑을 잃은 그녀는 임금과의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는데

문득 가을이 되면 쓸모없게 되는 부채와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원가행(怨歌行)(혹은 단선시(團扇詩)라고도 함》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중국 육조문화(六朝文化)를 대표하는 시문선집인 《문선(文選)》에 전해지고 있다.

新裂齊紈素  새로 자른 제나라 흰 비단이 鮮潔如霜雪  서리나 눈과 같이 선명하고 깨끗하여
裁爲合歡扇  재단해서 합환선을 만드니 團圓似明月  고르게 둥근 것이 보름달과 같구나
出入君懷袖  님의 소매 속에 드나들며 動搖微風發  흔들려져 미풍을 일으켰지만
常恐秋節至  항상 두려운 것은 가을이 되면 凉飇奪炎熱  차가운 바람이 더위를 앗아가
棄捐??中  대나무 상자 안에 버려져 恩情中道絶  은정이 도중에 끊기는 것이다.

여기서의 부채는 임금의 총애를 잃은 반첩여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신의 처지를 철이 지나 쓸모없게 된 물건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후로 '추선(秋扇 : 가을철의 부채)'은 남자의 사랑을 잃은 여자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설도
설도. (770~832) 자는 홍도이다. 안사의 란 이후 성도에 거주 당대종대력 3년에 출생.

장안(長安)의 양가에서 출생하였으나 14세 때 아버지가 별세하고 패가하자 기녀(妓女)가 되었다. 시(詩)를 잘 짓기로 유명해 시기(詩伎:시에 능한 기녀)라고 불렸다. 후에 검남절도사(劍南節度使) 위천(韋泉)이 그녀의 소문을 듣고 그녀를 대면하였는데 그 기량이 너무 출중하여 관기로 삼았고, 후에 그녀에게 교서(校書)라는 관직을 내리니 이후로 그녀는 여교서(女校書)라고 불렸다고 한다. 만년에 완화계(浣花溪) 근방으로 은거하였는데, 이 곳은 양질의 종이가 생산되는 곳이어서 그녀는 특히 작은 심홍색 종이를 주문하여 이 종이에 시를 써서 지역명사들과 주고 받았다. 후에 이런 식의 종이를 ‘설도전(薛濤箋)’ 또는 ‘완화전(浣花箋)’이라 하여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다음은 그녀가 8세 때 아버지가 시를 하나 짓자, 이에 대응하는 시를 연이어서 지은 것이라 한다. 설도 아버지 : 庭除一古桐,聳干入云中 정자 계단에 한그루 오랜 오동나무, 높게 치솟아 구름 속으로 들어갔네 8세의 설도 : 枝迎南北鳥,葉送往來風 가지는 남북의 새를 맞이하고, 잎사귀는 오고가는 바람을 보내는구나 이를 8세 때 지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혹자는 이 시가 그녀의 일생을 대변한다고 한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일을 겪지만, 특별한 사랑을 만나지 못 하고 한 그루 외로운 오동나무처럼 살아갔다고 말이다.

 

위자부
한무제황후 위자부. 위황후, 자는 자부 서한때 한무제의 황후이다.

산서성 림분사람이다.위청의 누이.

 

우현기.
(844~868) 자는 유휘 혹은 혜란이라고도 불리웠는데 섬서성 서안 (장안)사람이다.

 

 

화목란.

 

부친을 대신하여 종군한 화목란은 고대의 하남성 로성 영곽사람이다.

여반남장을 하고 부친을 대신하여 종군한 그녀는 수차례 전공을 세운다.

개선해 돌아오자 황제가 관직을 내리자 목란은 받지 않았고 입궁시키려하자 그녀는 죽음으로 거절한다.

당조초기 효렬장군으로 추봉하고 화목란사를 져 그녀를 기념했다.
 

 

조비연
조비연(趙飛燕) - "작장중무(作掌中舞)"
"가볍기 그지 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를 지칭할 때는 항상 4대 미인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된다. 바로 "연수환비(燕瘦環肥)"라는 성어인데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조비연(趙飛燕)은 말랐으나[瘦] 미인이었고, 양귀비[본명: 양옥환(楊玉環)]는 뚱뚱했으나[肥] 미인이였다. 또한 흔히 일컬어 조비연(趙飛燕)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임풍양류(臨風楊柳)형 미인, 양귀비(楊貴妃)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모란(富貴牡丹)형 미인. 이라 한다.

좌분
진무제 사마염이 시인 좌사의 녀동생 좌분의 재주가 뛰여났다는 말을 듣고 후궁에 불러들인다.

덕재가 출중하여 제왕과 대신들이 혀를 두르자 후궁의 뭇 가인들의 질투를 받는다.

좌분은 귀비로 봉해졌지만 쓸쓸하고 따분한 생활을 하다가 죽는다.

 

주숙진
 송대의 저명한 녀사인. 이름난 재녀다. 시사에 능했으며 단장집이라는 문집이 있다.

그녀 나이19세때 부모님의 중매로 어떤 상인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남편은 오랫동안 외지을 돌아다녔기에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사를 짓고, 편지를 보내며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느날 남편은 그녀의 편지를 받고  봉투를 뜯어보았는데
편지지에 글자 대신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만 가득했더랍니다.
남편이 그 의미를 알 수 없어 고심하던차, 때마침 바람이 불어 편지지가 바닥에 떨어지자
편지지의 뒷면에 조그맣게, 그리고 또박또박 적힌 글자를 발견하게 되었다네요.
바로 동그라미 편지에 대한 해석이었는데, 바로 <권아사(圈兒詞)>라는 사라고 합니다.
얼마후 그녀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남편은 그녀의 묘비명에 이시를 새겨 넣었다고 합니다.
훗날에 후인들이 그녀의 작품 200여편을 모아 <단장집(斷腸集)> 이라는 시집을 내었다고 합니다. <권아사(圈兒詞)> 혹은 <상사사(相思詞)> 相思欲寄無從寄, 畵個圈兒替. 話在圈兒外, 心在圈兒裡.
그리운 마음 기댈 곳 없어, 동그라미 그리며 달래봅니다.
하고픈 말 동그라미 밖에 있고, 드리고 싶은 마음 동그라미 안에 있습니다.
 
單圈兒是我, 雙圈兒是?. ?心中有我, 我心中有?.
동그라미 하나는 저이고, 동그라미 두개는 당신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저에게 있고, 제 마음은 당신께 있습니다.

月缺了會圓, 月圓了會缺. 整圓兒是團圓, 半圈兒是別離.
달은 기울었다가 다시 차고, 찼다가는 다시 기웁니다.
완전한 동그라미는 우리가 만난 것이며, 반만 그린 동그라미는 헤어진 것입니다.
 
我密密加圈, ?須密密知我意.
제가 두 개의 동그라미를 아주 가깝게 그렸기에, 당신은 저의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還有數不盡的相思情, 我一路圈兒圈到底.
말로 다하지 못하는 그리움에 저는 그저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그립니다.
 

진원원
 형원원이고 자가 완분이였으나 어머니가 사망후 성을 고쳐 진원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소주의 이름난 춤노래기생이였으나 하도 뛰여나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숭정황제의 장인인 전완이

만금을 들여 그녀를 사서 황제한테 바치려 했으나 오삼계가 가로채여 자기의 첩으로 삼았다.

그녀는 가난한 노점상인의 딸로 태어나 겨우 7살에 은전 2냥에 기루로 팔렸다고 한다.
원래 성은 형(邢)이고 이름은 원(沅)으로
진(陳)이라는 성은 기루로 팔려 갔을 때의 양모인 진씨(陳氏)로부터 물려 받은 성이라고 한다.
 
그녀는 명말청초의 오삼계(吳三桂)가 명을 배신하고 청이 중국을 통일하는데 협력한 이유가
바로 그녀에게 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명나라 말기 최고의 명장 오삼계는 북경 방문 도중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첩으로 들였다.
그러나 청과의 관문인 산해관으로 파견된 오삼계는 그녀를 북경의 집에 나둔 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농민반란을 일으킨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이자성 휘하의 장수 유종민이 그녀를 가로챘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혹은 이자성이 그녀를 차지했다고도 전해진다.)
이에 격분한 오삼계는 청나라에 투항하여 이자성을 공격하는 데 선봉에 나선다.
오삼계는 그 공으로 청나라의 제일 가는 공신이 되었고
그리하여 명나라는 그녀 때문에 망했다고 사람들은 말하게 되었다.
 
오삼계가 왕으로 봉해졌을 때 그녀를 왕비로 삼으려 했으나 거절하고 절로 들어갔으며,
훗날 오삼계가 숙청 당했을 때 절에 있는 연못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고 전해진다

재문희
채염, 즉 채문희 동한 채읍의 딸

채문희(蔡文姬)의 이름은 염(琰)이요, 자는 문희 도는 명희라고 한다.채문희는 동한시기의 대 문호이자 서예가인 채읍(蔡邑)의 딸이다.

동한 말기, 동탁(董卓)은 자기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채읍을 하루에 연속 3급이나 올려주어 중랑장에 까지 올랐다가 급기야는 고향후로 봉을 받았다.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 된 뒤채읍은 동탁이 주는 벼슬을 받았던 관계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데사람들은 이 같이 세상에 드문 인재를 죽이는 것은 가슴아픈 일이라며 천방백계로 구하려고 했으나결국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를 "문장은 굴원과 비할 수 있고,효도는 증삼(曾參, 즉 공자의 학생)을 다른다"고
평가했다.


동탁이 멸망한 뒤, 흉노와 강/호의 군사들이 중원을 엄습, 많은 사람들이 흉노로 끌려가게 되었다. 채문희도 다른 여인들과 마찬가지로 흉노에 끌려갔다. 

정권을 잡은 후 조조는 스승인 채읍에게
딸이 하나밖에 없음을 생각해서황금 천냥과 백벽 한쌍으로 채문희를 찾아왔다.
이 전에 채문희는 흉노의 좌현왕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다.

그러나 채문희는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또 두 아들과 헤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채문희가 35세 되던해 바로 "적벽대전"이 일어났던서기 208년, 채문희는 조조의 알선으로 장군 동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재주와 인물이 뛰어 났던 동사는 채문희를 별로 달갑지 않게 대했다. 그러나 어느 한번 어떤 차실로 동사는 사형을 당하게 되었는데이때 채문희가 나서 조조를 찾아가
자기의 신세를 하소연 하는 바람에조조는 자기와 채읍의 인정을 생각해동사를 용서해 주게 되었고,그랬던 관계로 동사는 채문희에 대한 마음을 달리하게 되었다.

후에 동사와 채문희는 세상사를 간파하고
산좋고 물맑은 곳을 찾아 은거하게 되었는데,수렵을 갔던 조조가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조조는 전에 채씨가문에 수만권을 헤아렸던 장서에 대한 말을 꺼냈다. 채문희는 전란 가운데 다 타버리고 남은 것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400권을 기억에 살아남은 대로 외웠다.

이에 크게 감탄한 조조는 사람을 보내 베끼도록 했으나,채문희는 남녀가 유별하다는 구실로 거절하고 자기가 직접 400권을 기록하여 조조에게 바쳤다.

채문희는 일생에 세 남자에게 시집을 갔었다. 흉노로 잡혀가 좌현왕에게 시집가기 전에 그는 하동 위씨집에 시집을 갔었는데부부는 금슬좋게 지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채문희의 남편은 결혼 1년만에 각혈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탁문군
탁문군. 한나라때 사마상여의 안해.

원산미(遠山眉 : 먼 산의 능선 같은 눈썹)

연화협(蓮花頰 : 연꽃 같은 뺨)

부용부(芙蓉膚 : 부용꽃 같은 피부)가

그녀로부터 비롯되었을 정도로 절세미인이자

당시의 도덕률과 체제를 뛰어넘는 분방한 행동과 글재주로 유명한 반체제 여류시인이었다.

 

한나라 제일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사마상여(司馬相如 )와 사랑의 도피행각으로도 유명하다.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17세 청상과부가 된 그녀는

아버지 탁왕손(卓王孫)이 열었던 잔치의 손님으로 온 사마상여와

사랑에 빠져 성도(成都)로 도망친다.

이를 반대하는 아버지는 그녀에게 한 푼의 재산도 주질 않았으나,

그녀는 가난을 면하기 위해 시장바닥에서 주막을 차려놓고 손님들에게 술을 따르며

아버지에게 보란 듯이 체면 깎이는 일도 서슴지 않으니,

그녀의 아버지는 이를 보다 못해 결국 훗날 재산을 나누어주어 그들을 용서했다고 한다.

그녀의 행위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파격적이고 용감무쌍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일설에는 남편인 사마상여가 훗날 첩을 들이려고 하자,

변심한 남자 곁에는 있을 수 없으니 떠나겠다는 내용의

《백두음(白頭吟)》이라는 시를 지어 남편의 뜻을 꺾었다고도 한다.

훗날 사마상여가 당뇨병으로 병사하자 그녀는 손수 남편의 조문(弔文)을 작성하였으며

마지막까지 정절을 지쳤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화예부인
화심부인..(화예부인이라고도 함) 후촉후주 맹욱의 비귀비.

혜비(慧妃) 서씨(徐氏).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후촉(後蜀)의 왕 맹창(孟昶)의 처.
시사에 정통하였고 재모겸비하여 화예부인(花?夫人)이라 불렀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충무절도사(忠武節度使) 왕전빈(王全斌)으로 하여금
군사 6만을 이끌고 촉으로 진공하도록 명령하였다.
14만이나 되는 군대를 지닌 촉이었지만 맥없이 지고 만다.
이에 맹창은 화예부인에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우리 부자가 사십년을 풍족하게 병사를 길러왔지만
 일단 적을 만나니 동쪽을 향해 화살 한 발 쏘지 못하는구려!"
 
맹창이 죽자 송태조는 화예부인이 사작(詞作)에 능함을 전해 들었기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게 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망국의 한을 읋었다고 전해진다.
 
君王城上樹降旗 군왕이 성 위에 항복 깃발 세웠다지만
妾在深宮那得知 첩은 깊은 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네.
十四萬人齊解甲 14만명이 모두 갑옷을 벗었다 하니
寧無一個是男兒 남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오히려 굳은 충정에 크게 감명한 송태조는 그녀를 비로 삼았는데
후에 그녀는 조광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실패하자 스스로 자진하였다고 한다.
 

 

황아
명대 녀 문학가. 자는 수미이고 사천성삭녕사람이다.

양심의 안해 세칭, 황안인. 황부인이라고도 불리였다

 

후부인
 수양제 재위기간 천하의 미인들을 끌어들였는데 후부인은 수천명의 미인들가운데서

한번도 황제와 자보지 못한 녀인의 하나이다. 자결했다.

(王凝之 : 왕희지(王羲之)의 차남)의 처로 총명하고 재변이 있기로 유명하였다.《진서ㆍ왕의지처사씨전(晋書ㆍ王凝之妻謝氏傳)》의 고사를 따르자면, 친척들이 모인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눈을 보고 사안(謝安)이 묻기를 "쉴 새 없이 내리는 흰 눈은 무엇을 닮았는가?(白雪紛紛何所似)"라 하자 사랑(謝朗)은 "공중에 소금을 뿌린 듯 하옵니다.(散鹽空中差可擬)"라고 하였으나, 그녀는 "(하지만) 바람에 일어난 버들개지만 못 하옵니다.(未若柳絮因風起)"라고 하여 사람들이 크게 탄복하였으니 이후 그녀는 영서재(?絮才)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시(詩)·송(頌)·부(賦)·뇌(?)등을 지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물어 《등산(登山)》, 《의혜중산영송(擬?中散詠松)》등의 시만 전해진   버들개지 : 버드나무의 꽃. 솜과 비슷하며,바람에 날려 흩어짐. 柳絮 : 한문으로 직역 풀이하면 '버드나무(의) 솜'으로, 중국어로 버들개지라는 뜻이다. 영서재(?絮才) : 버들개지[絮]를 노래한[?] 재녀[才] 라는 뜻.

 

리청조. (1084~1155)호는 익안거사. 제남사람.

 

녀황제 무측천. 중국력사상 유일한 녀황제다.

무측천은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담이 컸다. 일찍이 무측천의 아버지는 그녀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녀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무측천은 13~14세 때 이미 많은 서적을 박람하여 견식을 넓히고 시사(詩詞)의 기초를 닦았을 뿐만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636, 당 태종 정관(貞觀) 10,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황후 장손씨(長孫氏)가 병사한 후, 그 이듬해에 무측천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황궁으로 불러 재인(才人: 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 무측천은 불과 14세의 어린 소녀였는데 태종은 그녀에게 무미(武媚)라는 칭호를 내렸다.
 
무측천은 황궁에 들어간지 12년이 지나도록 태종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태종을 위해서 단 한 명의 자식도 생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재인의 직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무측천이었지만 오히려 태종의 아들 이치(李治:고종)는 일찍이 태자 시절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아버지 태종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던 그녀는 태자 고종과 은밀한 사랑을 불태운 도덕적으로는 패륜을 즐긴 여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여인이면서 아들과 놀아난 여인이었으니.
 
태종의 기일(忌日)에 황제가 된 고종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다가 홀로 쓸쓸히 지내는 무측천의 모습을 보고 옛정에 사로잡혔다. 이에 고종은 예교의 속박을 벗어던지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갔다. 무측천이 다시 황궁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28세였다. 보통 그 나이의 여자라면 열 몇 살의 젊고 싱싱한 다른 후궁들에 비해 신선미가 다소 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무측천은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고종의 12명의 자녀 중  뒤의 6(4 2)이 모두 무측천의 소생인 것을 보면 당시 무측천에 대한 고종의 총애가 어느 정도였던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상관완아. (664~710) 섬주섬현사람.당고종때 재상 상관의의 손녀.

측천무후의 폐위를 도모하려다 살해된 상관의(上官儀)의 손녀.
시적 재능이 풍부하여 측천무후가 종종 시제를 내어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그 우열을 정하게 하였는데 여기서 심사를 담당한 이가 상관 완아였다고 한다.
시적 재능과 함께 정치적 재능도 뛰어났던 그녀는
측천무후의 조카인 무삼사와 애인 관계였다고 하며 둘은 함께
측천무후의 좌우를 맡아 당대의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된다.
 
상관 완아가 14세 때 무측천은 그녀를 불러 할아버지, 아버지를 죽인 자신을 미워하느냐고 묻자
"원망하면 불충(不忠)이요, 그러하지 아니하면 불효(不孝)가 됩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이때 무측천은 목숨을 부지하게 해주고 길러준 은혜를 모른다하여 문신의 형을 내렸다고 한다.
청사와 주사를 이용하여 볼에 매화형상을 문신으로 새겨 넣었는데
상관완아는 이 때문에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부끄러워 하는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던 모양인지
이것이 일종의 미를 꾸미는 장식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분분히 분을 뭍혀 모방하고,연지(?脂)를 이용하여 붉은 점을 찍었는데
지금까지도 시집을 갈 때 연지를 찍어 홍점을 그리는 것이 이러한 연유라는 설이 있다.

동소완.

 이름은 백, 자는 청련 혹은 완군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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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소완은 명천계4년(1624년)생. 그의 남편 冒襄은 명말 청초 저명한 문학이다. 冒襄은 명문가족 출신이고 <<명말4공자>>라고 불리우고 당시 이름있는 인물이다.

동소완은 남곡(호북성 장양 부근)의 기생집에서 태여나고 모친 진씨는 남곡의 기생이고

부친董旻은 기생집의 잘골이였다. 동소완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는데 8살때 기생집에

놀러온 문인들과 시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다뤘다. 13~14살때 탈줄모르는 악기

가 없었고 시조와 문학에 대하여 모르는것이 없었다. 더우기 이쁘게 생기고 인물이 출중해서 15살때 명성이 높았다. 순치 7년(1650년)에 병사.

장홍불.

풍진삼협중의 장홍불인데 리정의 애처로서 본명은 장출진이다.

 

하희.

 원적은 정국. 정목공의 친딸이고 정령공의 녀동생이다.

 

손상춘.

 

삼국미녀의 하나. 손견의 딸로서 손책, 손권의 동부이모의 녀동생이다.

류현덕의 아내이다. 부인도 잃고 병사도 잃었다는 고사의 주인공이다.

 

 

한장제황후-두씨.

두황후는 동한의 정치를 간섭한 황후. 아름답게 생겼으며 수단이 있었다.

 

 

한화제 황후---등수. (81~121)

등수는 동한호강교위 등훈의 딸이다.

화제가 죽은후 20여년간 집정한바 있고 자기 오빠를 요직에 등용하고 대권을 휘둘렀다.

  


 

리향군.

기재에 의하면 리향군은 진회하상의 명기로서 노래와 춤을 팔았으나 몸은 팔지 않았다고 한다.

동소완, 류여 등과 함께 명말청초에 이름을 빛낸 미인이다.

홍승(洪昇)의 《장생전(長生殿)》과 함께 청대 희곡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진다. 1690년(康熙 29)부터 1699년까지 세 차례의 개작 끝에 완성된 작품으로 명말(明末)의 공자(公子)인 후방역(侯方域)과 기생 이향군(李香君)의 사랑의 파란을 줄거리로 하고, 여기에 명말(明末)의 부패한 사회상을 풍자한 작품이다.

후방역은 이향군을 기루(妓樓)에서 건져내고 부채에 시(詩)를 써 준다. 그 후 후방역은 완대월(阮大鉞)의 중상모략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난징[南京]을 떠난다. 완대월과 고향이 같은 전앙(田仰)이란 자가 이향군을 첩으로 맞아들이고자 하나 향군은 정조를 지키며 필사적으로 반항한다. 혼절하여 머리를 땅에 부딪혀 이마에 상처가 나고 부채는 피로 물든다.
며칠 후, 향군이 낮잠 든 사이에 양문총은 부채에 묻은 피를 복사꽃으로 여기고 가지와 잎을 곁들여 그려서 도화선을 만든다. 후방역이 난징에서 돌아왔으나 향군은 이미 대궐에 불려 들어간 후여서 만나지 못하고 체포된다. 그 후 청(淸)나라 병사에 의해서 난징은 함락되고 후방역은 옥에서 탈출하여 산으로 피신하는데, 여기서 도교(道敎)에 귀의한 향군과 재회하게 된다.
두 사람은 부채를 바라보며 서로 그립던 얘기를 주고받는데, 이것을 본 장도사(張道士)가 부채를 찢어 팽개치며 나라가 위태로운 이 시기에 아직도 정근욕종(情根慾種)을 그리워하느냐고 꾸짖자, 이에 크게 깨닫고 이들은 도교에 입신한다.

작품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인물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 젊은이의 연애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루면서도 명말 부패한 정치 현상과 나라를 그르치는 간신들의 행동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인생의 부귀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애수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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