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 목 | 문화재자료 제62호 (괴산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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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하담 김시양 신도비(荷潭 金時讓 神道碑) |
분 류 | 기록유산 / 서각류/ 금석각류/ 비 |
수량/면적 | 1기 |
지정(등록)일 | 2008.01.04 |
소 재 지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산24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소유단체) | 안동김씨능촌종중 |
관리자(관리단체) | 안동김씨능촌종중 |
상 세 문 의 | 충청북도 괴산군 문화체육과 043-830-3444 |
일반설명 이 신도비는 조선조 인조때의 명신인 荷潭 김시양선생의 신도비로 1670년(현종11년) 8월에 세워졌다. 이 비석의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조경(趙絅)이 忠翼公 金時讓의 아들인 김휘(金徽)의 요청으로 지었으며, 글씨와 전자(篆字)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전형적인 조선의 신도비 양식을 잘 갖추고 있는 이 비는 양질의 화강암과 웅장한 규모 그리고 명문장과 명서체 등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방형대석과 비신, 가첨석을 갖춘 전형적인 신도비를 최근에 난간석을 돌려 보호하고 있다. 모두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나 암질이 차이가 있다. 방형대석은 그 크기가 가로 165㎝, 세로 97㎝, 높이 42㎝이나 비신이나 가첨석과는 다르게 거칠게 다듬어져 있다. 원래의 것이 아니고 현 위치로 옮길 때 변경된 것으로 생각된다. 비신(가로 91×높이 231×폭 35㎝)과 가첨석(가로 162×세로 96×높이 70㎝)은 정교하게 다듬고 새겨 흠집 난 곳이 없으며, 지금도 자획이 선명하다. 현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500m 앞의 취묵당(醉墨堂) 옆도로(충민사 부근)에 세워졌던 것을 도로폐쇄로 1976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 하는데, 이전과정에서 귀부나 방형으로 조성되어 있었을 대석의 원형이 망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荷潭 金時讓 神道碑는 비록 대석은 변형되었으나 가첨석과 비신은 화강암으로 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전형적인 조선의 신도비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문장과 서체가 뛰어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金時讓(1581~1643)은 조선의 문신, 자는 子中, 호는 荷潭, 숙종 17년(1691)에 忠翼 諡號를 받았다.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1년(광해군 3) 全羅道都事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하여 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623년 仁祖反正으로 풀려나 禮曹正朗, 兵曹正朗, 修撰, 敎理를 역임하였다. 1624년 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都體察使 李元翼의 從事官으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應敎로 文學을 겸임하고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1629년(인조 7)에 평안도 觀察使 겸 體察府事가 되었다. 1631년 병조판서에 올라 八道都元帥, 四道體察使 등을 겸임하여 斥和를 주장했다. 그 후 江華留守, 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4년(인조 12)에 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조판서, 세자좌부빈객, 강화유수를 거쳐 1641년 「宣祖實錄」을 改修할 때 判中樞府事 겸 判春秋館事로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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