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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화재 지킴이 제1회 고청(윤경렬)상 박방룡씨 수상

오늘의 쉼터 2010. 10. 2. 20:26

 

제1회 고청(윤경렬)상 박방룡씨 수상


신라 문화재 지킴이로 살다간 '마지막 신라인' 고청 윤경렬

 

 

고청 윤경렬 선생 10주기인 올해 제정된 제1회 고청상에 선생의 제자인 박방룡(56)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이 수상했다.

평생을 신라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문화재 지킴이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 '마지막 신라인' 고청(古靑) 윤경렬 선생 10주기 기념식이 추모비 앞에서 열렸다.

고청기념사업회는 지난 27일 오후 2시 '하늘도 내교실 땅도 내교실' 고청기념비 앞에서 문화재를 사랑하는 지인들과 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을 가졌다.

이어서 오후 3시부터는 백상승 경주시장과 이영훈 경주박물관장, 오해보 경주문화원장 등 관계기관장과 제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경주박물관 강당에서 고청상 시상과 강연, 추모음악회가 열렸다. 올해 처음 제정된 제1회 고청상에는 윤경렬 선생의 제자인 박방룡(56)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이 수상했다.

박방룡 유물관리부장은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전신:경주향토어린이학교) 졸업 후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박물관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광의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박 부장은 고청 선생이 직접 제작한 반가사유상을 상품으로 받고 상금 100만원은 즉석에서 고청기념관설립금으로 기증을 해 참석자들을 감동케 했다.

박 부장은 "고청 선생님의 제자로서 주위사람들에게 '고청 선생 제자답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게 문화재 사랑운동에 헌신하겠다"며 스승을 추모하는 눈시울을 적셔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강연회에는 국성하 국립어린이박물관 학예연구사가 '고청 윤경렬 선생님과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특히 고청 선생의 평생을 담은 자료영상과 경주어린이 박물관 학교 소개 녹음을 청취하는 시간에는 참석자들이 고인의 생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문화재 사랑과 보호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경북일보/곽성일기자 2009.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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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경렬선생 타계 10주기 맞아 첫 고청상 시상

 

 

고청 선생 10주기 추모제를 기념비 앞에서 올리고 있다.

 

 

고청 윤경렬 선생 10주기 기념강연과 제1회 고청상 시상식이 지난 27일 오후 2시부터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렸다.

고청기념사업회(회장 김태중)는 평생동안 경주와 신라문화를 사랑했던 고청선생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올해 10주기를 맞아 제1회 고청상을 제정, 초대 수상자로 박방룡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을 선정하고 이날 시상식을 가졌다.

경주지역 문화·예술인과 유족 등 100여명이 참석해 열린 이날 행사는 지난 2006년 10월 경주박물관 동편에 설립한 기념비에서 추모제를 시작으로 시상식, 추모음악회, 강연 등으로 이어졌다.    

 

김태중 회장은 “고청 선생이 남산을 바라보며 다니던 그 길에서 일생동안 경주를 아낀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다”며 “선생의 뜻은 전국 곳곳에서 문화를 사랑하는 길잡이로 활동하는 5000여명의 제자들 속에서 생생히 살아있다”고 말했다.

 

지난 1999년 11월 타계한 고청 선생은 1916년 함북 경성군 출신으로, 한국풍속인형연구소인 고청사(古靑舍)를 운영한 1949년부터 경주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54년엔 경주시민들에게 문화재의 참된 가치를 알려주기 위해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를 개설하고, 그 뒤 56년엔 신라문화동인회를 창립했다.

신라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가꾸는 일에 매진했던 고청선생은 ‘불교동화집’, ‘신라이야기’ 등 수많은 저서를 출간하는 등 공적으로 지난 2001년 정부로부터 문화보국훈장을 추서 받았다.

 

 

**********************************************<서라벌신문/이상욱 기자  2009.11.30>

 

 

 

 

尹慶烈 선생

1916년 1월 14일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면 중향동 55번지 출생
1934영 주을 온대진(溫大津)학숙 및 야학 근무
1935년 일본博多 인형수업
1937년 시골신사에 시멘트 석사자 제작
1940년 귀국
1943년 조선 미술전람회 출품(조각부)
1945년 개성 중경학교 근무, 동양인의 예술 발표
1947년 개성 정화여학교 근무
1948년 서울로 옮김(43세)
1949년 경주로 옮김(경주인형연구소 고청사 경영, 경주예술학교 강사)
1954년 경주 어린이 박물관 학교 개설
1958년 신라문화동인회 창회
1959년 근화여중 근무
1961년 독서회 회장
1965년 불교동화집 발간
1971년 문화공보부 장관 향토문화 공로상 (상록상 수상)
1979년 경주남산 고적순례 발간(경주시)
1993년 5월 5일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불지사) 발간



윤경렬(81)씨는 인형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함경북도 경성군, 온천마을로 이름났던 주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흙으로 만든 토우 인형에 마음을 빼앗겼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조선 풍속을 따라 인형을 빚어 구운 다음 색칠한 것을 보고 그 기술을 배우러 일본까지 갔다오는 집념의 인형장이였다.
그가 경주 사람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인형 때문.

“일본에서 돌아온 뒤 풍속 토우를 만들었지만 팔 길이 막막했어요.
1943 년 아는 이 소개로 개성으로 나가게 됐고, 이듬해에 당시 개성박물관 관장이시던 고유섭 선생을 뵙게 됐지요.
고고미술학의 선구자이신 선생께서 는 내가 일본에서 3년 동안 공부했다니까 일본놈의 독소를 빼기 전에는 조선 것은 해볼 생각도 말라고 혼을 내셨지요.”

윤씨는 독소를 빼기 위해서 역사가 깊은 곳으로 터전을 옮겨야겠다고 작정했다.
부여, 공주, 하다가 선뜻 경주를 골랐다. 운명이지 싶다.
경주에 턱 들어서는 순간, 그는 ‘경주에 내 뼈를 묻으리라’ 결심했다.
계림숲과 무령왕릉에서 그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힘차고 명랑한 예술이 있는가, 새삼 목이 메었다.
“경주에 있으면 고분 발굴 현장을 많이 보게 돼요. 몸은 다 썩었어도 그 사람들이 입었던 옷, 쓰던 그릇, 갖고 있던 무기, 온갖 장신구류가 베갯머리에 모여 있지요.
그걸 현장에서 하나하나 스케치를 했습니다. 사진기로 툭툭 찍는 것하곤 달라요.
정확하게 관찰해서 그리게 되니까 옷주름 하나도 놓칠 수가 없어요.
지금 텔레비전 사극에 나오는 옷들은 대개 중국풍이 많아요. 고증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거지요.”

풍속 토우를 만들려면 옛 사람의 얼굴과 의복 일습을 알아야 했다.
그는 얼굴을 찾아 경주 일대를 헤매기 시작했다. 경주 남산에 들어가게 된데는 이런 내력이 있다.
남산을 한달에 두번꼴로 한 6백번쯤 오르내렸다.
수없이 눈과 마음에 새긴 이 현장답사 덕에 그가 쓰고 그린 <신라이야기> (창작과비평사 펴냄)는 동화책임에도 그 안에 담긴 삽화들이 신라시대의 풍속을 가장 정확하게 복원한 것으로 이름높다.

“경주 남산은 바위가 많은 산이지요. 신라 사람들은 그 바위 속에 부처 님이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전통적인 바위신앙과 불교신앙이 합쳐진 거지요.
부처님 얼굴에 바로 신라 사람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고구려의 억세고 엄격함, 백제의 부드럽고 섬세함이 만나 빚어낸 한국인의 얼굴이지요.”

그는 한국 사람 얼굴의 특징을 ‘꾸밈새가 없는 표정’이라고 했다.
시골 파파 할머니의 익살스런 얼굴, 고향 누님처럼 인정 듬뿍한 얼굴, 한마디로 생겨먹은 대로 구수하고 정겨운 얼굴이라는 것이다.
부지런히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그 얼굴에 얽힌 이야기들을 모아 펴낸 <경주 남산 고적순례> <겨레의 땅 부처님 땅> 등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시절 그가 발로 읽어낸 남산의 육성이다.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도 열어

“처음 남산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땐 나무꾼하고 나물 캐는 아낙밖에 없었어요.
저를 아는 이들이 한다리 건너 얘기들을 전해듣고 서울에서 내려 올 때마다 앞장서라고 해서 남산 답사가 시작된 거지요.”
요즘이야 문화 답사나 박물관학교 같은 행사가 유행처럼 전국으로 번졌지만 30여년 전만 해도 드문 일이었다.
윤경렬씨가 “내 평생 보람된 일은 우리의 풍속 인형을 만든 일과 경주 남산을 조사하고 소개한 일, 그리고 경주의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가르친 일”이라고 말하는 까닭이다.
1954년 10월, 당시 경주 박물관장이던 고유섭씨와 힘을 더해 열었던 ‘경주 어린이 박물관학교’는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에도 있듯, 아이들에게 ‘겨레의 고운 얼을 길러준 뿌리’였다.

윤경렬씨가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를 한 건 그가 쓴 <마지막 신라인 윤경렬―윤경렬 평생이야기>(학고재 펴냄) 때문이다. 윤씨가 마다했음에도 후학들이 마련한 출판기념회가 12월5일 인사동 학고재에서 열렸다.
모처럼 먼 걸음을 한 그를 보러 찾아온 벗들에 둘러싸여 그는 술과 정에 곱게 취했다.

지금도 그는 경주시 양지마을의 인형공방 ‘고청사’(古靑舍·0561-772-9114) 문턱 낮은 집에서 한국인의 멋을 생각하고, 남산을 가고자하는 손들을 맞으며 산다.
고청은 그의 자호. 원래 나만 홀로 익지 못해 아직 푸르다는 뜻으로 고청(孤靑)이라 했으나, 이제는 '옛날 속에서 푸르게 산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동무처럼 손잡고 남산을 오르내리던 부인 ‘순이’를 3년 전 먼저 보낸 요즘 그의 나날은 고즈넉하다.
적적할라치면, “꼴꼴꼴” 술 떨어지는 소리가 좋은 상감청자 술병에 고량주를 받아놓고 남산을 친구 삼아 홀로 권 커니 받거니 대작하는 멋을 안사람 삼았다. 가끔 지구상에서 가장 먼 곳, 고향 생각에 눈시울을 적시지만 자신이 경주 사람이 된 것은 필경 부처님의 뜻이었다고 믿는다.

 

 

**** 위글은 한겨레신문 1997.12.18  정재숙 기자의 인물탐험에 난 기사내용 중 일부입니다 ***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동편 양지마을 입구 도로변에 있는 고청 윤경렬선생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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