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고미술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오늘의 쉼터 2010. 9. 7. 22:21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1712~1786

 

최북은 조선 영조 정조시대의 화가
스스로 호를 '호생관'이라 칭하였는데 '호생관'이란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최식(崔埴)이었으나 스스로 이름을 최북(崔北)이라고 개명을 하고 북(北)자를 둘로 쪼개어 칠칠(七七)이라고 하엿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기이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최북은 1712년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최북은 키가 작았고 눈이 하나 멀어서 항상 한쪽 눈에 안경을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최북이 눈이 멀게 된 사연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지체 높은 이의 모욕을 받게 되어 분을 이기지 못해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버렸다고 한다.

출신 성분이 낮았던 최북은 직업 화가였다. 그림 한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고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이 사대부 중심에서 일반 서민 사회로 변화하는 문예부흥기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천민 출신인 화가가 서야 할 자리는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 할 수밖에 없었다.
최북의 그림은 초기 남종화풍의 화풍에서 후기 조선의 고유색 진경산수화로 바뀐다. 천하에 놀기 좋아하고 구속 받지 않으려는 자유분방한 기질 때문에 국내의 금강산, 가야산, 단양 등은 물론 일본·중국까지도 다니면서,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당시의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삶의 각박한과 현실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기행과 취벽 등의 일화로 남겼다.
그는 산수화는 물론 화훼, 영모, 괴석 등 모든 면에서 대담하고 파격적으로 뛰어난 기량을 보였으며, 취미가 다양하여 책읽기와 시 짓기를 좋아한 시·서·화 삼절의 화가였다.
최북의 작고연도는 정확치 않다. 1712년 출생하여 49세인 1760년 설과 75세인 1786년 설이 있는데 1786년을 주장하는 학설이 많은 것을 생각 할 때 올해는 탄생 293년 서거 219년이 되는 해이다.
200여년 전 사회의 변혁기에 그림이란 학문을 통해 진경산수眞景山水로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고자 했고, 가난하지만 자연과 함께 살아간 최북의 그림은 〈표훈사도表訓寺圖〉, 〈공산무인도公山無人圖〉등이 있고 약 80여점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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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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