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가야

김수로왕릉

오늘의 쉼터 2009. 7. 25. 09:56

 

 

 

 

 

 

 숭화문: 1973넌 외상문으로 창건했다가 1988년 숭화문으로 개칭했다.

 

 

 

 가락루 앞에 세워진 홍살문

가락루: 1792넌 외상문 삼간으로 건립. 1843년 대왕의 영혼을 맞이한다는 뜻의 연신루(延神樓)라 명명.

 2층 3긴으로 재건되었다가 1846년 가락루로 개칭 1852년 다시 대왕의 영혼을 편안히 받든다는 봉타루

(奉妥樓)로 명명했다가 가락루로 재개칭되었다.

(모양 : 능묘나 궁전, 관아 앞에 세우는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문으로 중간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양쪽에는 화살모양의 나무를 세워 두었다.   경의를 표하는라는 뜻으로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중앙길은 신도의 길 양쪽으로는 일반인들이 갈 수 있도록 명시되어있다)

 

 

 

 납릉정문 : 1972년 2층 3간으로세워 윗층은 향료대 아래층은 내삼문으로 사용하다가 1843년 단층

3칸으로 개축되었다.

(왕비의 고향인 인도 아유타국 용왕을 표시하는 두 마리의 물고기가 채색된 신어문양의 납릉정문을

 지나 맞게되는  원형 봉토분의 외형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 숙이게 하는 위엄이 넘치는듯 하다.

수로왕은 서기 142년 음력 3월 3일 구지봉에 탄강하여 3월 15일에 즉위함으로서 가락국을 건국하였고 

서기 199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다. 사적 제73호임.)

 

 

 

 납릉정문의 쌍어문 능침의 정문으로 1792년에 세워졌다.

쌍어문, 피사석탑, 코끼리문양이 새겨져 있어 인도와의 교류를 나타내는 단서가 되고 있다.

 

 

 

 김수로왕릉에서 바라다 본 분산성의 전경..

 

 

 

 연지: 1965년 능림경내 암거를 구유지(龜遊池)로 개축하였다가, 1989년 농림정비사업 계획에 의해

구유지와 연못을 하나로 만들었다.

 

 

 

 

 

 

 

수로왕의 탄강(誕降)

 

 

가락국의 역사와 문화를 전하는 [가락국기]는  우리 고장에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이 하늘에서

 

지봉으로 오색 줄을 타고 내려왔다고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개벽한 후로 이곳에 아직 나라의 이름도 없고 또한 군신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는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9간이 있었고 이들이 촌장이 되어

 

민을 다스렸다.

 

 

이들 부족들은 서기 42년 3월 계욕일(3월 3일)을 맞아 목욕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음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그때 북쪽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촌장을 비롯한 2-3백 명이 소리나는 곳으로 올라 가보니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소리가 들리기를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하며 구간들이 이르되 "우리들이 여기 있다"고 대답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냐?" 대답하기를 "구지"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천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여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흙을 파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머리를 내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고

 

노래하고 춤추며 대왕을 맞이하면 기쁨을 가누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구간들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고, 춤을 추자. 자색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 끝에는 붉은 보자기에 금합(金盒)이 쌓여 있었다.

 

열어보니 해와 같이 둥근 여섯 개의 황금알이 있었다.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백 배 절한 후, 다시 포장하여 아도의 집으로 옮겨 탑 위에 두고 흩어졌다. 

 

12시간이 지난 이튿날. 촌장과 촌인이 다시 모여 금합을 열자. 

 

여섯 알은 모두 화하여 동자가 되었는데, 용모가 준수하고 매우 깨끗하였으며,

 

위엄을 갖춘 모습이기에 구간들은 높은 좌석에 앉히고 모두 절을 하였다.

 

 

날이 가고 십여 일을 지나자.  신장이 9척이 되었으며,  얼굴은 용과 같아 중국 한나라의

 

고조와 같은 범상한 인물로써 그 달 보름날에(음 3월 15일) 즉위하였다.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하여 수로(首露)로 하고 나라를 대가락 또는 가야국이라 하니

 

곧 6가야의 하나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각각 돌아가 다섯 가야국의 임금이 되었다.

 

여섯 가야국은 동쪽은 황산강(낙동강), 서남쪽은 창해,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으로

 

각각 경계하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이상이 [가락국기]에 실린 가락국 시조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가락국의 임금이 되기까지의

 

간추린 내용이다.

 

 

가락국기는 고려 충렬왕(AD1274-1308)때 일연선사가 쓴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러나  지은이는 고려 문종 때 금관지주사를 지낸 문인 김량일이 서기 1076년에 쓴 것으로

 

일연선사가 간추려 실었다고 한다.

 

이는 결코 전설로만 치부해서는 안 되는 김해 만의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역사일 것이다.

 

 

수로왕의 탄강지 구지봉은 김해의 성지이자. 경남의 성지로 시민의 문화 휴식처이자,

 

역사교육의 산교육장이 되고 있다.

 

 

구지봉은 김해시 구산동 14번 국도 변에 위치한 작은 산이다.

 

 산 정상에는 수로왕의  탄강을 상징화한 조형물과 탄강비가 세워져 있고,

 

정상의 남서쪽에 지석묘가 구지봉의 신비를 더해 주고 있다.

 

입구에 수로왕을 맞이할 때 부른 구지가(영대왕가)를 새긴 비석이 있다.

 

 

 

'뿌리와 역사 > 가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가야 왕계표  (0) 2008.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