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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道號)에 얽힌 이야기
성주현_ 관의교구·부천대 강사
현재의 <교헌> 제74조에 의하면 ‘포상은 법사 포덕사 및 도호 당호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를 준용하는 <교인포상규정>에는 도호·당호 발급에 대하여 ‘오관실행을 5개년 이상
간단없이 실행한 교인으로 하되 심사방법은 연월성 성적을 기준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중앙총부에서는 도호·당호 발급을 포상으로 적용하고 있다.
그럼 도호·당호가 언제부터 발급되었으며, 그 유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필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태어나서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자신의 이름보다 아호(雅號)나 필명(筆名) 등이 더 유명한 사람도 적지 않다. 또한 천도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등 각 종교단체에서도 자신의 이름보다는 법명(法名) 또는 세례명 등이 더 많이 불려지기도 한다. 천도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도호 또는 당호라 하여 오히려 이름보다도 더 친숙하게 활용되고 있다.
먼저 종단별로 활용하고 있는 사례를 살펴보자. 불교 또는 원불교에서는 법명이라 한다.
불교의 경우 법명이란 ‘불교에 귀의한 사람에게 주는 이름’으로, 승려는 득도할 때, 재가자(在家者)에게는 수계(授戒)나 귀경식(歸敬式) 때 준다.
법명은 출가해서 불제자가 된 것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釋아무’라고 석(釋) 자를 붙이는 것을 통례로 한다. 원불교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법명을 받는 사람도 있고 나중에 입교하여 받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법명의 의미는 과거의 낡은 생각과 습관을 버리고 새 마음 새 각오로 공부와 사업에 정진하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 또는 천주교의 경우 세례명이 있는데 이 역시 기독교나 천주교에 귀의하였을 때 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성인을 추종한다는 의미로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쓴다. 예를 들어 ‘요한’이라는 세례명은 “너도 요한과 같은 성인이 되어라”하는 추종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종의 벤치 마킹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의 세례명은 성인 위에 오른 이의 이름을 따라 그와 같이 되라는 의미가 있다면 원불교 법명은 그 이름 자체가 스승이 내려 주는 일생을 두고 지켜야 하는 일종의 계문이다. 아마 천도교의 도호·당호도 이와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천도교단에서는 도호와 당호를 언제부터 사용하였을까?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도호가 불려진 것은 아마도 해월신사 때부터가 아닌가 한다. 해월신사의 경우 스승인 수운대신사로부터 해월(海月)이라는 호를 받았지만 엄밀하게 표현하면 도호의 개념보다는 아호의 개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도호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교단사에서 도호를 처음 내린 기록은 자료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다.
도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해월선생문집』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癸巳年) 11월에 구암 두 자로 김연국의 도호를 주었다.(十一月 先生以龜菴二字 授演局之號) (乙未年) 8월 20일게 김학종이 와서 뵈면서 각처에서 지목하는 일이 조금 누그러졌다는 것을 아뢰었고, 김학종이 찾아온 것이 기약을 어기지 않았다고 하여 선생은 신암이라는 도호를 주었다.(念間 金學鍾內謁 告以各處指目之稍定 而學鍾之來 不失期信 故先生賜號信菴) (丙申年) 2월 초순이 되자 손병희가 사람을 보내어 아뢰기를 큰댁 가족들을 충주 내서촌 등지에 옮겼다고 하였다. 이 때 선생은 손병희에게는 의암이라는 도호를, 손천민에게는 송암이라는 도호를 주었다.(至二月初旬 孫秉熙傳人書告 曰陪大宅內眷 搬移于忠州內西村等地云矣. 此時先生賜號 孫秉熙以義菴 賜號天民以宋菴) 이 기록에 의하면 가장 먼저 도호를 받은 교인은 구암 김연국이라 할 수 있다. 즉 포덕 34년 11월 보은에서 처음으로 도호를 받았다. 구암 김연국에 이어 도호를 받은 교인은 김학종인데, 그는 포덕 36년에 도호를 받았다. 김학종이 장수군 출신으로 언제 입교하였으며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해월선생문집』에 의하면 김학종은 신심이 매우 깊었던 것 같다. 동학혁명 이후 관의 탄압이 더욱 심하여 교인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당시 교인 또는 포의 동향을 해월신사에게 보고하기 위하여 약속한 시일을 어기지 않고 해월신사가 머물고 있던 인제군 느릅정이를 찾아왔다. 이에 해월신사는 김학종의 신의(信義)에 감복하여 신암(信菴)이라는 도호를 주었다. 이후 포덕 38년 2월 충주 외서촌에서 손병희와 손천민이 의암(義菴)과 송암(松菴)이라는 도호를 받게 된다. 손병희에게는 절개와 의리를 찬양하여 ‘의암’이라는 도호를, 손천민에게는 소나무의 절개를 상징하여 ‘송암’이라는 도호를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초기의 『해월선생문집』 기록은 후대에 이르러 교사를 정리하는 입장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포덕 34년) 授號龜菴, 十一月 大神師同門徒日君等各號皆有意旨否對 曰年來畏人指斥强名行之者也. 大神師命大敎主 曰以龜菴道號肇錫于君幸順尊行也. 龜字特授取諸龜岳春回之義非我私意卽尊救世主遺訓以行之者也(『시천교역사』(필사본), 김연국편) (포덕 34년) 是年 十一月 賜號龜菴(「시천교역사」, 『국민일보』, 융희 4년 4월 20일자) (포덕 35년) 8月에 湖南 長水郡人 金學鍾이 內謁 神師 고 告神師 曰 各處 指目이 視日前稍弛라. 略陳畏道艱關之狀한데, 神師-愛其信懿之拔類 사 以信菴으로 錫(賜)其道號?시다. (포덕 36년) 이때에 장수군 김학종이 와 뵈입거늘 신사-그 난리 중에 신 있는것을 가상히 넉이샤 도호를 신암이라 주시다. (포덕 36년) 正月.... 後十八日.... 金演局號龜菴, 孫秉熙號義菴, 孫天民號宋菴, 金顯卿號恩菴, 趙在璧號敬菴, 盖爲顧名思義之.(박정동, 『시천교종역사』, 1915) (포덕 37년) 2月에 孫秉熙-傳人書白(告)호데, 己陪本第宅內眷 야 搬移于忠州外西村矣라 더니, 未幾에 秉熙天民 兩人이 來 야 備告移接整頓之由와 道禍稍弛之事 더라. 神師-以義菴道號로 授孫秉熙 시고 以宋菴道號로 賜孫天民 시다.(이상 오상준, 「本敎歷史」, 『천도교회월보』 32호) (포덕 37년) 병신에 신사-깊이 손병희의 절개와 의리를 찬양 샤 도호를 의암으로 주시다. ... 이때에 신사-손천민은 송암 김연국은 구암이란 도호를 주시고, ...(이상 연연자, 「본교역사(한글판)」, 『천도교회월보』 39호)
오상준의 『본교역사』 기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천도교의 입장에서 첫 도호는 손병희와 손천민, 김연국이 포덕 37년 2월에 충주 외서촌에서 같이 받은 것으로 보고있다. 이와 달리 시천교측에서는 『해월선생문집』의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특히 『시천교역사』에는 구암이 도호를 받는 과정에 대해 좀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특히 구암의 구(龜)에 대한 의미를 ‘구악(龜岳)’ 즉 구미산(龜尾山)에 두고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의 차이는 교단의 정통성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기술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특이한 사실은 일반적으로 의암, 송암, 구암 외에 알려지지 않았던 도호가 『시천교종역사』에 김현경이 은암(恩菴), 조재벽이 경암(敬菴)으로새롭게 밝혀지고 있다. 이는 국민일보에 연재되었던 「시천교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해월신사가 하사한 도호는 의암 손병희, 송암 손천민, 구암 김연국, 은암 김현경, 경암 조재벽 등이라고 확인할 수 있다. 해월신사 이후 포덕 46년 2월 중앙총부가 설립되기 전까지 도호를 내린 것은 의암성사가 박인호에게 내린 것이 유일하다. 의암성사는 포덕 40년 충남 당진군 저동( 洞)에서 박인호에게 춘암(春菴)이라는 도호를 주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스승이 제자에게 사호(賜號)한 것은 수운대신사가 해월, 해월신사가 의암·송암·구암·은암·경암, 의암성사가 춘암 등 모두 6개에 불과하지만 포덕 46년 2월 중앙총부가 설립된 이후에는 중앙총부에서 도호를 발급하였다. 의암성사는 포덕 46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한 후 교단의 근대화를 위하여 종로구 다동에 중앙총부를 설립하고 대헌(大憲)을 반포하는 등 기관중심으로 교단을 운영하였다. 중앙총부가 설립된 이후 도호를 처음으로 발급한 것은 포덕 48년 11월 30일이다. 이때 도호를 받은 교인은 42명인데 흥미로운 점은 도호의 첫 자에 모두 수(水) 변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작명을 할 때 돌림변을 사용하는 방법을 인용한 것인데, 이에 대해 부연설명이 없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지만 당시 도호를 받은 명단은 다음과 같다.
金洛貞 淑菴, 羅龍煥 菴, 徐虞淳 泳菴, 李承祐 菴, 朴熙寅 湘菴, 崔琉鉉 汶菴, 申光雨 凌菴, 林淳顥 淳菴, 韓泰勳 潚菴, 朴在德 沖菴, 朴瑢台 涇菴, 張世華 淇菴, 朴準承 菴, 金洛濂 浪菴, 金漢式 泗菴, 羅仁協 泓菴, 孫光洙 洸菴, 李炳春 菴, 方燦斗 汕菴, 洪基億 濤菴, 許善 渼菴, 元容馹 溪菴, 鄭桂玩 菴, 朴花生 沁菴, 張南善 菴, 金顯玖 滄菴, 林來圭 菴, 趙錫杰 河菴, 全知擇 洛菴, 鄭樑 潘菴, 林禮煥 淵菴, 李鍾奭 潼菴, 宋培憲 湳菴, 洪基兆 游菴, 吳榮昌 菴, 全熙淳 菴, 具昌根 溟菴, 李祥宇 湖菴, 吳知泳 源菴, 金溟培 瀧菴, 宋年浩 洙菴, 李永夏 ○菴
이후에 수(水)의 돌림변을 사용한 도호로는 10년 후인 포덕 58년 12월 7일에 권병덕이 청암(淸菴), 포덕 60년 1월 10일에 오응선이 치암(治菴)·김낙철이 용암(湧菴) 등으로 나타난다. 한편 수(水) 외에 목(木)자를 변으로 하는 도호가 있다. 목(木) 자를 변으로 하는 도호는 포덕 58년 4월 5일 천일기념을 기념하여 발급한 것이 모두 25명, 포덕 59년 8월 14일 지일기념을 기념하여 14명, 포덕 60년 1월 9일 12명이 있다. 예를 들면 이정점이 남암(楠菴), 신정집이 단암(檀菴), 김진팔이 임암(林菴), 이인숙이 상암(桑菴), 최석련이 계암(桂菴), 박창훈이 규암(槻菴), 문철모가 괴암(槐菴) 등이다. 이러한 돌림변을 이용한 도호는 아마도 의암성사의 뜻이 더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의암성사 환원 후 발급된 도호에는 돌림변을 활용한 도호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수(水)나 목(木) 자의 변을 활용한 것은 아마도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오행(五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중앙총부에서 도호가 발급된 것은 의암성사가 병환 중인 포덕 63년 3월 19일인데, 이때는 무려 256명이 도호를 받는다. 당시 도호를 받은 교인은 대부분이 중앙총부를 비롯하여 지방교구의 주요 교역자들로, 현암(玄菴) 정광조, 추암(秋菴) 오상준, 화암(化菴) 최준모, 서암(瑞菴) 최안국, 염암(濂菴) 한세교, 숙암(肅菴) 정상용, 실암(實菴) 권동진, 목암(睦菴) 이군오, 여암(如菴) 최린, 법암(法菴) 김완규, 묵암(默菴) 이종일, 보암(普菴) 이종린, 궐암(厥菴) 최동희 등이 다. 그런데 중앙총부에서 도호를 발급하였으면 이에 적용할 규정이 있어야 하는데 교헌이나 규정에는 별도로 나타나지 않고 있다. 앞서 보았듯이 현재 도호·당호의 발급은 교헌에서 포상규정에 근거하여 발급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상벌규정에 의거하여 발급하지 않았을까 한다. 포덕 47년에 처음 반포한 교헌에는 포상에 관해서는 특서(特敍)·특금(特金)·특품(特品)만 규정하고 있으며, 포덕 51년 개정한 대헌에는 포상에 관한 규정이 아예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포덕 63년에 마련한 종헌(宗憲) 초안에는 포상의 규정이 별도로 작성되어 있는데 천훈장(天勳章)·특신기념장(特信紀念章)·특수포장(特殊 章)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 시기 도호는 특수포장에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도호가 교헌에 규정된 것은 포덕 69년에 제정된 ‘천약(天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독립항목으로 나타나고 있다. ‘천약’ 제52조에 의하면 “勳賞은 道師, 道號, 天勳章, 特信章, 褒賞章으로 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도호의 발급 기준을 “10년 이상 계속 誠信이 有하고 敎會에 特殊한 功勞가 有한 人에게 授與함”으로 밝히고 있으며, 중앙종리원 사관회(司觀會)에서 대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교헌에 규정되었던 도호의 발급규정은 이후 교헌에서는 다시 보이지 않고 있다가 해방 후 포덕 96년에 마련한 교헌에 다시 보이고 있다. 이때 규정 역시 훈상으로 법사, 포덕사와 같이 도호·당호를 발급하고 있다.
앞서 발급된 도호는 남자 교인을 대상으로 발급한 것이었으나 포덕 72년에 들어 여성교인에게도 도호를 발급하였는데 이를 당호(堂號)라 하였다. 이해 4월 1일 법도관(法道觀)에서 발표한 공함 제17호에 의하면 “吾敎의 婦人功勞者에게 대하여 堂號를 수여하기로 司觀會에서 결의”에 의하여 발급키로 하고 있다. 당호의 수여 기준은 “10년 이상 계속 誠信이 있는 부인으로서, 1 巡廻布德에 종사하며 修道凡節이 宗門에 模範될만한 婦人, 2 布·院이 公認할만한 特殊功勞가 있는 婦人”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당호는 당시 이 규정에 적합한 부인에게 일괄적으로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하더라도 당시 당호를 처음으로 받은 여성교인은 아마도 의암성사의 내수도이며,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수의당(守義堂) 주옥경이 아닌가 여겨진다. 당호를 발급하기로 한 이후 『천도교회월보』의 「還元同德」란을 보면 당시 당호를 발급하였던 사례를 볼 수 있는데, 법원당(法元堂) 박전화, 성후당(誠厚堂) 이태화, 신심당(信心堂) 최춘화, 지육당(知育堂) 염종화, 경화당(敬化堂) 김봉화, 성활당(誠活堂) 김승화 등이 당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여성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여성교인으로 성실당(誠實堂) 김정숙, 정적당(靜寂堂) 김태화, 성법당(誠法堂) 박현화, 지성당(知誠堂) 양이제, 법실당(法實堂) 차기숙, 지흥당(知興堂) 최시영 등의 당호가 있다. 한편 여성교인에게 발급하였던 당호는 포덕 34년 4월 소위 구파에서 별도로 재호(齋號)를 발급함에 따라 분규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즉 ‘기관에서 부인당호를 발함에 불구하고 따로 春菴 私宅에서 婦人齋號를 擅發하여 機關統制의 조직을 파괴한 것’이라 하여 소위 신파측에서 반발하였던 것이다. 이후 여성에게 발급하였던 도호는 신파에서는 당호를, 구파에서는 재호를 각각 발급하였다가 포덕 82년 12월 신구파가 합동함에 따라 당호를 발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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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천도교 중당대교당(서울특별시 형재 제36호). 동학 3세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의
주도로 1918년 착공하여 1921년 2월에 준공한 이 건물은 명동성당과 더불어 손꼽히는 근대 종교 건축물 중 하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