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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용화전 벽화는 서유기

오늘의 쉼터 2009. 1. 30. 23:36

◈ 통도사 용화전 벽화는 서유기

단순한 인연설화로 알려져 온 15교구본사 통도사 용화전 벽화 가운데 일부가

중국의 장편소설 <서유기>를 형상화한 도상으로 확인됐다.

성보문화재연구원(원장 범하스님)은 9일 <한국의 사찰벽화-경남1.사진>편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서유기(西遊記)중국 명대의 장편소설

작자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오승은(吳承恩:1500~82경)이다.

7세기에 불교승려 현장(玄奘:602~664)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다.

오승은이 장편의 장회소설(章回小說)로 만들어냈을 무렵 그 내용은 이미 민간전설·화본(話本)·잡극(雜劇) 등의

형태로 중국 민간문학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 소설은 100회로 구성되어 있으며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의 7회는 원숭이 손오공(孫悟空)의 탄생과 천궁(天宮)에서의 난동,

그리고 그가 마술적 힘을 얻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뒤의 5회는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의 이야기와 그가 서역(西域)으로 가는 임무를 받은 연유에 관한 것이다.

그 나머지 대부분의 회에서는 현장과 3명의 동반자, 즉 마력을 지닌 손오공, 둔하고 덤벙거리는 저팔계(猪八戒),

약삭빠른 사오정(沙悟淨)이 81차례의 모험을 거친 끝에 결국 불경을 얻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유기〉는 희극적·모험적·신마적(神魔的) 요소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사회와 관료제도를 암암리에 비판하고 인간의 노력과 인내를 우화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즐겨 읽는다.

 

        성보문화재硏 ‘한국의 사찰벽화-경남1’서 밝혀

         동국대 박현수 씨 논문서도 “수호적 의미”주장


 

성보문화재연구원이 2008년에 조사한 경남지역 양산 신흥사와 통도사 내 12개 전각의

벽화 612점 가운데 눈에 띄는 내용은 통도사 용화전의 벽화에 대한 조사결과다.

 그간 단순한 인연설화로 알려진 이 벽화들이 현장스님과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다는 중국의 <서유기>를 표현한 것으로 확인됐다.

 

                       ▲ 통도사 용화전

 

통도사 용화전 (通道寺 龍華殿)

용화전은 석가모니 다음, 곧 석가모니의 출현으로부터 56억 7천만 년이란 세월이 흐른 미래세계에 출현하실

미륵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미륵불은 현재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의 신분으로 명상에 잠겨 잇는데

성도(成道) 후에는 지상에 내려와 세 번의 설법을 통해 남은 중생들을 모두 구제하도록 예정된 분이다.

이 설법을 '용화삼회'(龍華三會)라 부르고 미륵불이 출현할 곳 또한 '용화수'라는

나무 밑이므로 법당의 이름을 용화전이라 한다.


용화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집이며 안에 모신 미륵불 좌상은 크기가 2 m 에 이른다.

건물 측면 어칸에도 문짝을 달았다.

내부에는 대형 벽화 7폭을 비롯하여 공포와 공포사이 포벽에도 여러 가지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배경으로 그려진 식물들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용화전이 처음 세워진 것은 고려 공민왕 18년(1369)이라고 하나 현재의 법당은 영조 원년(1725)에 중건되었다.


용화전 앞에는 형태가 매우 독특한 석조물이 있다.

이른바 '봉발탑'(奉鉢塔) 이라 부르는 것이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둥근 복련대를 놓고 그 위에 네 귀퉁이의 모를 죽인 사각기둥을 세우고

다시 그 위에 둥근 앙련대를 놓아 받침대를 만든 뒤 뚜껑 덮인 밥그릇(바리때) 같은 것을 올린 모습인데

이는 불교 교리상 매우 상징적인 석조물이다. 부처님의 제자인 가섭존자가 석가여래의 발우(鉢盂 , 공양을 받는 그릇)와

가사를 가지고 인도의 계족산에서 미륵불을 기다린다고 하는 것에서 유래하는데 이 봉발탑이 바로 그때에 전해질 발우이다.

봉발탑은 도솔천에서 성도를 위해 명상에 잠겨 있는 미륵불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담긴 석조물이다.

용화전에 모셔진 분이 미륵불인 것을 생각할 때 용화전 앞에 놓인 봉발탑은 그 위치가 매우 적절한 것이라 생각된다.


봉발탑의 높이는 2.6 m 에 달하며 하대석이 원형인 것을 제외하고는 대좌에 조각된 연꽃이라든지 간주석의 모습은

관음전 앞의 석등과 많이 닮아 있다.

용화전이 초창되었던 고려 공민왕 18년(1369)에 함께 세워 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음전 앞의 석등과 함께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봉발탑으로서 완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지만 대석과 바리때가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는

아직 의문이다.

봉발탑은 보물 제471호로 지정돼 있다.





용화전에 형상화된 도상은 모두 7점이다.

<서유기> 총 100회분 가운데 5회의 내용을 7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표현한 것이다.  

서쪽 벽에 ‘난멸가지원대각(難滅加持圓大覺)’ ‘도고혼소우정공문(度孤魂簫禹正空門)’

‘흑송림사중심사(黑松林四衆尋師)’라는 화제와 쓰인 그림과 동쪽 벽 측면에

‘일괴공회정욕희(一怪空懷情慾喜)’ ‘현장병성건대회(玄裝秉誠建大會)’

‘봉선군모천지우(鳳仙郡冒天止雨)’가 쓰인 그림이다.

  

     ▲ 도고혼소우정공문도(度孤魂蕭禹正空門圖) - 1

       『서유기』12회의 내용 가운데 재상 소우蕭禹가 불교의 바른 이치를 말하여 수륙재를 열 수 있었음을

         그린 것으로 벽화는 당 태종의 명으로 수륙재를 주관할 고승을 선발하는 위징과 소우, 장도원 등을 묘사한 것이다

 

 

         ▲ 도고혼소우정공문度孤魂蕭禹正空門 - 2

            스님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절벽 끝에서 손을 들거나 서로 험악한 표정으로 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화면 왼쪽 방향으로 몸을 돌린 모습이다.

            수륙재를 위해 전국에서 선발되어 모여든 많은 승려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여겨진다

 

                                                   ▲ 일괴공회정욕희도(一怪空懐精慾喜圖)

                                                     『서유기』94회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린 것으로 천축국 부마로 선택된 현장이,

                                                      손오공의 권유로 요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왕궁으로 들어간 뒤의 이야기이다.

                                                      벽화는 공주로 변신한 요괴가 손오공 등이 방해할까 두려워 왕에게

                                                      손오공 일행을 성 밖으로 내보내줄 것을 요청하는 장면인 것이다

 

 

                                                  ▲ 봉선군모천지우도(鳳僊郡冒天止雨圖)

                                                    『서유기』87회의 내용 가운데 하늘을 모독한 죄로 가뭄에 든 천축 변방의

                                                     봉선군鳳僊郡에 비를 내리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손오공이

                                                     천궁에 올라가 옥황상제를 만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 난멸가지원대각도(難滅加持圓大覺圖)

                                              『서유기』84회의 제목을 화제로 쓰고 85회의 초반부 내용을 그린 벽화로 멸법국滅法國에

                                              도착한 현장 일행이 승려들을 죽인다는 왕의 눈을 피하기 위해 들어간 궤짝이

                                              도적들 때문에 소동을 겪고 왕에게 바쳐진 장면이다

 

 

       ▲ 흑송림삼중심사도(黑松林三衆尋師圖) 『서유기』 81회의 내용 가운데 선림사에서 쉬다가

          요괴에 잡혀간 현장을 찾던 손오공이 삼두육비三頭六臂의 괴물로 변해 광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는 <서유기> 총 100회 가운데 12회, 81회, 84회, 87회, 94회에 해당하는 것이다.

특히 12회의 내용이 동.서측면 벽 중앙에 세 장면으로 나눠 그려져 부각돼 있는데,

12회는 현장스님이 당 태종의 명으로 수륙재를 여는 장면과 수륙재를 주관할

고승을 선발하는 위징, 소우, 장도원 등을 묘사한 그림이다.

 

       ▲ 현장병성건대회도(玄裝秉誠建大會圖) 『서유기』 12회의 내용 가운데 일부를 그린 것으로

              당 태종이 저승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승려들을 초청하여 재를 주관할 고승으로 현장玄奘을

              뽑아 수륙재를 성대하게 치르는 장면이다. 벽화는 제단 앞에 나아가 용을 밟고 향을 꽂는

              태종과 더불어 줄지어 선 승려들의 가장행렬 앞쪽에 머리에 관을 쓴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성보문화재연구원은 “벽화의 편년은 18세기 후반으로 보인다”며

“현재 우리나라에 소장돼 있는 <서유기>의 판본 가운데 18세기까지 올라가는 것이 드문데,

이런 내용을 사찰벽화로 나타낸 것은 용화전이 최초”라고 평가했다.

한편, 통도사 용화전 벽화의 <서유기> 도상에 대한 논문도 최근 발표돼 주목된다.

동국불교미술인회 박현수 수석부회장은 최근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으로 발표한

 ‘통도사 전각에 따른 단청의 특성에 관한 연구’에서 용화전 <서유기> 도상이 갖는 의미에 대해 고찰했다.

 

 ▲ 우리나라 불보종찰인 양산 통도사 전경

 

용화전에 <서유기>의 장면을 표현한 이유에 대해 박 씨는

“현장스님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전을 취함으로써 증과를 얻게 된다는 극적인 내용들이

수행과 공덕, 깨달음이라는 보편적인 불교설화와 일치해 사찰벽화 소재로 적합하다”며

“많은 요괴들의 방해를 법력으로 물리친다는 내용에 수호적 의미도 부여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현장과 규기에 의해 창종된 법상종은 무착과 세친의 미륵신앙을 계승한 것으로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용화전의 신앙체계와 상통한다”고 밝혔다.

중국의 경우 <서유기>의 도상이 차용된 곳이 많다.  

중국 돈황에서 떨어진 동천불동이나 유림굴, 오개돈 석굴을 보면 보현보살도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의 한 구석에 부속적이고 장식적인 기능으로 그려졌었다.

 

보현보살 (普賢菩薩 불교)

 

부처의 여러 가지 덕 중에서 문수보살이 지식과 지혜와 깨달음을 관장하는 데 대해,

이치와 명상(禪定)과 실천을 관장하는 보살. 두 보살은 석가여래를 양쪽에서 보필하는 보살,

즉 협시보살(脇侍菩薩)로서 알려져 있다.

보현보살은 하얀 코끼리를 타고 부처의 오른쪽에서 보필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또 이 두 보살은 모든 보살들의 우두머리로서 항상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는 일을 조성하고 선양한다.

보현보살은 또 중생의 목숨을 길게 하는 덕을 가졌으므로 연명보살(延命菩薩)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보현보살은 부처의 본원력(本願力)에 근거해 중생 이익의 원을 세워 수행하는데

이를 보현의 행원(行願)이라고 한다.

 

<화엄경 華嚴經>에서 설하는 보현의 10대원(十大願)이란

① 부처를 예배하고 공경함,

② 부처를 찬탄함,

③ 여러 가지로 공양함,

④ 업장(業障)을 참회함,

⑤ 남의 공덕을 함께 기뻐함,

⑥ 설법해주기를 청함,

⑦ 부처가 이 세상에 오래 머물기를 청함,

⑧ 부처를 본받아 배움,

⑨ 항상 중생의 뜻에 따라 응함,

⑩ 널리 모든 것을 회향함 등이다.

 

〈화엄경〉은 선재동자(善財童子)의 구법(求法) 이야기에서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善知識: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자)을 순방한 후에 보현보살을

  방문하여 구법을 완수했다고 설하는 것으로, 이 보살을 찬탄한다.

 

 

                        ▲ 해인사 대적광전 보현보살

 

 

  ▲ 보물 제 1426호인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



또 감소성 대불사 대전 벽화와 같은 명대의 사찰에서 일부 발견되며,

복건성 천주 개원사 동.서탑에 부조로 새겨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천사탑원각사지십층석탑의 기단부에 서유기 도상이

부조로 조각돼 있지만, 사찰벽화로 표현된 도상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제가 해체하기 전의 경천사 10층 석탑 모습(지금은 국립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 원각사지십층석탑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聯芳院)’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基壇)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塔身部)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

(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박 씨는 “조선시대 사찰벽화와 서유기의 도상학적인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며

 “촬영 및 모사도 제작 등 벽화보존을 위한 다각적인 조치와 학술연구가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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