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를 은퇴한 후의 마리와 프랭크(시드니모닝헤랄드)
마리(Marie)와 프랭크 캇튼(Frank Cotton)은 그녀가 시드니 대학교에서 빛나는 스타였을 때에
함께 치과학을 연구하였는데 그녀는 그의 지도교수 이었다.
그들은 결혼하였고 2차 세계대전 참전 후에 가정을 꾸려왔으며 함께 치과병원을 운영하였다.
그들은 함께 테니스를 쳤고 테니스 코트도 정원도 만들었다.
시드니에서 잘 알려진 캇튼 부부는 모든 것을 함께 하였다.
그리고 지난 7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65년간의 함께한 결혼생활을 마치고 그들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캇튼 부부는 말년에 시드니 교외 볼캄힐스(Baulkham Hills)에 있는 은퇴자마을로 이사를 왔고
마리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고통중에 있던 중 근접해 있는 사립요양원으로 옮긴 3년 전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프랭크는 지난 3월 심장발작이 있은 후에 그 녀가 있는 사립요양원으로 옮겨졌다.
프랭크는 생에 집착하고 있는 마리를 도울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여 그녀는 일요일 밤에
그의 방으로 옮겨 졌다.
마리는 다음 날인 월요일, 7월28일 아침 일찍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몹씨 슬퍼하고 있는 그에게 몇 시간 후에 심작발작이 있었고 다시 깨어나기는 했지만
월요일 저녁에 운명하였다.
프랭크는89세, 마리는 88세 이었다.
프랭크는 다섯의 자녀 중에 하나이며 그의 부친은 1908년 남극탐험에 참여하였고
시드니 대학교의 지질학 교수가 되었다.
그의 삼촌도 시드니 대학교 심리학 교수이었다.
그는 대학시절 럭비와 육상선수로 활약하여 상도 받고 치과학에서도 두각을 보였는데
이 것은 그의 훌륭한 지도교수가 그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남독녀 이었던 마리는1941년 하이디스팅션(HD, High Distinction, 85~100%)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였는데, 치과에서 대학메달(University Medal)을 최초로 받은 여자가 되었다.
두 사람은 프랭크가 1942년에 해군에 합류할 때까지 시드니 치과 병원(Sydney Dental Hospital)
에서 근무하였고 그 해 12월에 그는 마리와 결혼하였다.
그는 3주 후에 케인즈에서 HMAS(Her Majesty’s Australian Ship, 군함의 이름 앞에 부침)
Platypus와 그리고 1944년5월 HMAS Shropshire에 합류하였다.
마리와 프랭크는 세 자녀와 열셋의 손자와 손녀를 슬하에 남겼다.
지난 7월 31일자 시드니모닝헤랄드에 실렸던 이야기 입니다.
제한된 삶의 시간을 한 순간이라도 허비하지 말고 부부가 사랑을 나누면서
잘 살아야 함을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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