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의 아내♣
누런 황금벌판으로서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선사해 주던 가을이 어느새 계절의 흐름에 밀려나고 이제는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주는 겨울의 문턱에 발을 옮겨 놓았다.
야속하게 한 장 남아버린 달력은 연말연시의 술렁거리는 분위기 속에 어영부영 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겠지.
그렇게 바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잠시나마 나를 되돌아본다. 시집을 와 농사꾼의 아내로 살아온 지 어언 10년, 강산이 한번 바뀐 세월이다.
얼굴에는 세월만큼 잔주름이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나의 아이들도 많이 자랐지만 마음은 항상 그냥 그대로일 뿐이다.
처음 어설픈 솜씨로 농사일에 뛰어들면서 때로는 가슴 절이도록 눈물나고 서러운 일도 있었고 마음 가득 기쁨으로 채워진 적도 있었다.
넓은 밭에 가득히 심어 놓은 생강이 노랗게 한 줄 한 줄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픔 썩인 한숨에 가슴을 절여야 했고,
땀 흘려 가꾸어 놓은 채소가 제 값을 받지 못하고 주인들 기다리다 다시 땅속으로 사라져 버릴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에 남편이 옆에서 TV광고에서처럼 "여보, 우리도 서울 가서 살까?"
하고 물어본다면 당장에 흔들릴 것도 같았다. 올해도 누구 나가 대풍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풍년일지라도 마음은 우울하니 어쩌 랴.
쌀은 쌀대로, 잡곡은 잡곡대로, 채소는 채소대로, 풍년을 선사했지만 가격은 우리를 서글프게 한다.
TV와 신문에서는 OECD 가입이 어떻고,
에이펙 정상회담이 어떻고 등,...
사회면의 여러 사건 사고들이 펼쳐지지만,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역시 수매값이 얼마나 오르느냐,
배추 한 포기, 무 한 개 값이 얼마인가 이다.
올해의 풍년만큼 농산물 가격에 귀가 솔깃해지고 가격을 걱정하는 것을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농사꾼의 아내인가보다.
그렇지만 농사꾼도 가격만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다. 해동과 함께 씨앗을 뿌리고 새싹을 키우고 무더운 여름에는 각종 해충과 잡초로부터 지켜주며,
가을에는 풍성 풍성 거두어들이는 기쁨!
마당 한복판에 팥이며 녹두며 참깨며 오밀조밀 널어놓고,
멍석 위의 빨간 고추가 비닐하우스 안을 가득 채운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마음만은 한없이 부자가 된다.
이런 것들을 차곡차곡 보자기에 싸 형제들에게 한 아름씩 선물할 때 느낄 수 있는 쿤 보람과 행복은 농사꾼이 아니면 그 누구도 맛보지 못하리라.
또한, 꽃가게에서 돈주고 사는 예쁘고 화려한 꽃은 아닐지라도 계절마다 피어나는 이름 모를 들꽃들을 남편이 한 다발 꺾어다 안겨줄 때 수줍게 웃으면서 감격해하는 것도 시골 아낙네만이 누릴 수 있겠지.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우리의 아이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교육적인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회색 빛 콘크리트 속에서 과외공부에 각종 학원 수강에 지쳐 자라나는 아이들보다는 공부는 조금 뒤떨어져도 자연과 더불어
흙 냄새 풀풀 맡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아이들이 마음만은 더없이 아름답고 순수하리라 믿으면서 작은 위안을 가져 본다.
먼 훗날, 농촌을 지키며 흙과 같이 살아온 엄마, 아빠의 땀과 노력을 그 아이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리라, 믿으면서, 오늘도 나는 힘들게 일한 뒤에 살며시 잡아주는 남편의 따뜻한 손길로
사랑과 행복을 느끼면서 내게 주어진 농사꾼의 아내라는 자리를 착실하게 지켜 나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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