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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0대 재벌 100대 부호들 혼맥지도

오늘의 쉼터 2009. 1. 1. 01:23

 

 

<심층 대해부> 30대 재벌 100대 부호들 혼맥지도


권력과 돈 있는 가문 결합 ‘현대판 진골·성골’

 

 
한때 정·재계를 대표했던 거인들. 왼쪽부터 이병철 전 삼성 창업주, 정주영 전 현대 창업주,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
‘기득권 대물림은 이제 그만.’
최근 참여연대의 재벌가 혼맥 일부 공개 이후 시민들의 목소리다. 이들은 정·관계 인사들과 재계가 거미줄처럼 얽혀져 있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조사작업을 진행했던 참여연대와 MBC ‘PD수첩’에 비판하는 내용을 계속 제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참여연대가 2차로 30대 재벌을 근간으로 한 한국사회 지도층 혼맥도의 전체 아웃라인을 추가로 공개, 파문이 커지고 있다. 시민들을 충격과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뜨겁게 달궈진 네티즌들의 비판성 글들이 인터넷을 끊임없이 항해하고 있어 파문은 일파만파 확산될 조짐이다. 현재 시민들이 의혹을 나타내고 있는 시각들을 중심으로 재벌가 혼맥을 유형별로 재구성해 본다.

이번에 추가 발표된 전체 혼맥도는 52개 재벌가의 친인척과 3천 여명의 정관계 지도층을 대상으로 조사한 혼맥관계 중 혼인관계가 뚜렷한 2백명을 연결한 것이다. 이를 보면 재벌가의 ‘혈맹관계’를 여실히 알 수 있다.
재벌가 혈맹관계에 관한 시민들의 시각은 분분하다. 하지만 현재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은 정경유착의 고리와 정략결혼으로 모아지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이런 의혹을 갖기에 충분하다는 게 정설이다.

정경유착형

혼맥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재벌가와 권문세도가의 혈맹관계다. 국내 굴지의 재벌들 중에는 권문세도 집안과 사돈관계를 형성한 경우가 많다. 지난 6공 때까지 이런 행태가 주류를 이뤘다.
흔히 정경유착의 고리의 핵심으로 ‘win-win 전략’을 비유한다. 서로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집안끼리 혼맥을 형성한다는 얘기다.
예컨대 재벌이 정치권과 연결고리를 만드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든든한 바람막이에다 수시로 알짜배기 사업특혜까지 얻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이점이 있기 때문에 정치권과의 혼인에 적극적이란 말이다.
정치권 역시 재벌가와의 혼사에서 손해볼 것은 없다. 정통성이 결여된 관계로 정권연장을 위한 안정적 비자금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이같은 이유에서 정경유착의 고리가 생성됐다는 게 정설.
일례로 지난 1992년 정부가 이동통신 사업권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돈기업인 SK그룹(구 선경그룹)에 주기로 한 결정에 대해 정경유착에 따른 특혜라는 반대여론이 빗발친 적이 있다.
물론 이런 결혼풍속이 모두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무리수가 따른다. 전문가들 역시 부모들의 뜻이 앞선 정략결혼이 아니라, 당사자들의 자유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도 적지 않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재벌과 사돈관계를 맺게 되면 결과적으로 기업의 성장을 돕게 되고, 재벌사돈은 역시 정·관계 사돈들의 세력기반 확장에 음양으로 도움을 주게 되며, 이런 긴밀한 정경유착은 그동안 일반화되어 왔다고 이들은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
노태우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최고권력층을 잡아라’

30대 재벌 중 정치권과 가장 많은 인연을 맺은 곳은 한화그룹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서정화 국회의원의 큰딸과 지난 1982년 혼인했다. 아울러 김신 전 교통부장관과도 이어진다.
한화가는 또 박정희 정권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천하의 권문세도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 사돈관계다. 김 회장의 누님인 영혜씨가 이 전 부장의 장남인 동원씨(제일화재 회장)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SK그룹 역시 정치권과 밀접하긴 마찬가지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는 사돈관계다. 최종현 전 SK그룹 창업주의 형인 최종건 회장의 막내딸 예정씨가 이 전 부장의 막내며느리다. 때문에 한화그룹과 SK그룹은 ‘가깝고도 먼’ 사돈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SK그룹은 또 노태우 전 대통령과도 사돈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고 최 창업주의 맏아들 태원씨(현 SK 회장)가 노 전 대통령의 장녀 소영씨와 혼연의 관계를 맺었다.
이를 따라가면 전직 국회의원을 지낸 김복동씨(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의 오빠)와 연결된다. 김씨의 둘째 딸은 한일그룹 창업자인 고 김한수 회장 다섯째 며느리다. 따라서 SK그룹과 한일그룹도 줄사돈지간이 된다.
역대 대통령과 사돈관계를 형성한 재벌가는 또 있다. 한국제분과 풍산금속이 주인공이다. 한국제분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사돈지간이며 이는 권노갑씨에게까지 이어진다.
풍산그룹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사돈관계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IMF 때 몰락한 벽산그룹 김인득씨 집안과 사돈지간이다. 박 전 대통령의 셋째형인 박상희씨의 딸 설자씨가 김씨의 둘째 며느리다. 이를 따라가면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와 연결된다. 설자씨가 김 명예총재의 처제다.
풍산그룹은 또 박 전 대통령과 직접적 사돈관계를 맺은 바 있다. 박 전 대통령의 둘째딸 근영씨가 지난 1982년 유찬우 회장의 장남 청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일상생활이 순탄치 못해 6개월도 안돼 갈라서고 말았다.

권문세도가와의 혼연

국어사전에서 ‘정략결혼’을 찾아보면 ‘주혼자(主婚者)가 제 이익을 위해 당사자의 의사를 무시하고 억지로 시키는 결혼’으로 나와 있다. 목적성을 갖고 혼인관계를 형성한다는 얘기다.
물론 해당 재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해명하겠지만 혼맥도를 보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이 많은 게 사실이다.
혼맥도를 보면 한 때 실세를 자청하거나 자청했던 위치에 있던 정치인 집안과 직·간접적 인연을 맺고 있다.
일례로 재계 서열 1위를 지키고 있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장인은 홍진기 전 내무장관이다. 이를 따라가면 노신영 전 총리와 인연이 닿는다. 홍 전 장관의 딸이 노 전 총리 집안에 시집을 간 탓이다. 또 홍 전 장관 가문은 김복동 전 국회의원과 연결돼 있다.
현대가 역시 노신영 전 총리와 사돈지간이다.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정 명예회장의 큰 딸이 노 전 총리의 큰 며느리다. 이 때문에 삼성그룹은 현대그룹과 직접적 성혼은 없었지만 한 다리 건너 사돈지간으로 얽혀 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6남인 정몽준 의원도 김동조 전 외무장관과 ‘장인과 사위’란 연을 맺고 있다. 정 의원의 부인이 김 전 장관의 막내딸인 영명씨다.
재계서열 26위인 코오롱그룹과 재계서열 44위인 풍산그룹과도 사돈지간이 된다. 이 관계의 중심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있다.
이원만 전 코오롱그룹 회장의 둘째아들인 동보씨가 지난 1974년 당시 공화당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의 큰딸 예리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들의 결혼은 당시 고 육영수 여사가 이씨 집안과 대통령 조카사위인 김 명예총재 집안을 연결시키기 위해 적극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오롱그룹은 육군참모총장 출신으로 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정일권씨와 신병현 전 부총리의 사돈간이다. 이 전 회장의 셋째동생인 원천씨의 아들이 정씨 딸과 혼인했다. 또 이동찬 코오롱그룹 회장의 딸이 신 전 총리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코오롱그룹은 재계 서열 31위인 영풍그룹과도 혼연관계에 있다. 영풍그룹 집안과 정일권씨집안과는 사돈지간이란 이유에서다. 영풍그룹은 또 김세련 전 재무장관과도 연을 맺음으로써 인맥을 구축했다.
한때 당대 실세를 자처했던 정치인과의 혼맥관계는 또 있다. 동부그룹과 태광그룹, 강원산업, 미원그룹 등이 그들이다.
동부그룹은 이철승 전 야당총재와 사돈관계다. 김준기 회장의 동생인 택기씨가 거물 야당 정치인이었던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의 사위다. 롯데그룹과는 또 여동생을 통해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태광그룹은 이기택 전 민주당 고문과 한 집안이다. 이 전 대표의 누님인 선애씨가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모친이다. 이 때문에 정경유착 의혹을 끊임없이 받았지만 ‘깨끗한 장부’란 모토를 지속시킴으로써 결백성을 입증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태광그룹의 혼맥은 동국제강과 롯데그룹으로까지 연결된다. 이 회장의 형님인 영진씨가 장상준 전 동국제강 회장 집안과 연을 맺었다.
강원산업은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과 사돈관계다. 때문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연결될 뻔했으나 불운(?)으로 연이 끊어졌다. 박 전 최고위원의 넷째 딸인 경아씨가 지난 1987년 전 전 대통령의 둘째아들 재용씨와 결혼했으나 성격 차이에 따른 불화로 2년5개월만에 합의이혼한 탓이다.
미원은 김복동 전 국회의원과 사돈지간. 따라서 혼맥도를 따라가 보면 삼성그룹과 멀고도 먼 사돈지간이 형성되고 있다.

이후락
노신영
이철승
관료와 재벌간 혼연관계

당대 관료들과 혼연관계를 맺은 경우도 많다. 이들과의 혼연은 정부정책 및 정보에서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고 반사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이점으로 정경유착의 또 다른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물론 관료들이라고 해서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재벌 가문과의 인연은 소위 ‘실탄’을 확보한 것과 다름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배적 견해다. 이런 필요충분조건에 의해 집안과 집안이 맺어졌다는 게 정설이다.
혼맥도를 보면 재벌가 중 LG그룹이 관료 집안과 가장 많은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둘째 동생인 정회씨(작고)의 둘째아들인 자헌씨는 조종열 전 대한수산회장의 딸인 금숙씨와 결혼했다.
셋째동생인 구태회 명예회장의 장녀는 이계순 전 농림부장관 집안으로 출가했고, 구자경 전 그룹회장의 장남인 본무씨(현 LG그룹 회장)가 김태동 전 보사부장관의 딸인 영식씨와 혼인했다. 또 장녀는 김용관 대한보증보험 사장의 아들인 화중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다섯째 동생인 구두회 명예회장의 장녀는 김택수 전 공화당 원내총무 집으로 시집갔다. LG그룹은 이처럼 당대 관료들과의 혼맥 형성에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LG그룹에 못지 않은 혼맥을 갖고 있는 곳은 효성그룹이다. 효성 역시 5개 관료 집안과의 혼맥도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고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는 홍금식 전 변호사회 회장과 사돈지간이다. 차남인 양래씨가 홍문자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지만 효성그룹과 관료집안의 혼사는 조 창업주의 동생인 성제씨(작고)가 적극적이었다. 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의 딸인 애수씨가 셋째며느리(3남 경래씨와 결혼)다. 넷째 아들인 익래씨는 원용석 전 경제기획원장의 딸인 정선씨를 아내로 맞아 들였으며 장녀인 정숙씨는 정종철 전 서울시장의 아들인 창순씨와 혼인, 정씨 집안으로 출가했다.
한진그룹과 금호그룹 역시 만만치 않은 혼맥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 집안과 사돈관계를 맺은 관료집안 각각 4곳과 3곳이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는 이 전 차관의 딸인 명희씨를 장남인 양호씨와 혼인시킴으로써 직접적 사돈을 맺었다. 또 이 전 은행장의 아들인 태희씨를 사위로 맞아들였다.
또 조중렬씨(조 창업주의 형)의 둘째 아들인 지호씨는 이 전 상공장관의 딸인 숙희씨와, 조중건(조 창업주의 다섯째 동생)의 장녀 윤정씨는 이 전 외부장관의 아들인 정훈씨와 혼인함으로써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경우엔 관료 집안과 직접적 사돈관계를 모두 형성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차남인 정구씨(작고)는 김익기 전 국회의원의 딸인 형일씨를, 3남인 삼구씨는 이정환 전 재무부장관의 딸인 경렬씨와 혼인했다. 장녀인 경애씨는 배태성 전 제헌의원 집안(영환씨와 결혼)으로 출가했다.

재벌집안간 윈-윈 혼맥형

‘스페셜 패밀리 라인.’ 재벌 집안끼리 혼사를 빗댄 말이다. 예전처럼 권력층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꾸려갈 수 있다는 판단에 기인한 최근의 현상이다. 이 같은 혼맥구축은 경쟁관계이면서도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 기업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현재 재벌그룹 중 가장 화려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 바로 LG그룹이다. LG그룹의 혼맥은 재계뿐만 아니라 언론계, 관계, 학계까지 이어지고 있다. 삼성그룹 역시 그룹 규모만큼이나 정·재계의 거대한 혼맥을 유지하고 있다. 롯데그룹과 금호그룹도 화려한 혼맥으로 재계를 거미망 줄처럼 엮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스페셜 패밀리 라인 형성에 대한 시민들의 시각은 곱지만은 않다.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한 것은 ‘끼리끼리 다 해 먹는다’는 비난을 형성하기도 한다. 특히 자신들의 기득권을 철옹성처럼 지키기 위한 행태는 국가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시민들의 중론이다.

LG家의 ‘재벌 사돈잡기’

재계에서 가장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는 LG그룹을 ‘흔히 재벌 혼맥의 본류’로 분류한다. 혼맥을 따라가 보면 국내에서 ‘내노라’하는 재벌가 집안과 연결이 되지 않는 데가 없을 정도다. 실제 LG그룹이 직접적인 혼맥관계를 맺고 있는 곳만도 삼성·SK·두산·금호·한진·대림그룹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LG그룹의 재벌 사돈잡기 시작은 지난 1957년부터다. 국내 랭킹 1위인 삼성그룹과의 통혼도 이 때 이뤄졌다. 물꼬를 튼 주인공은 고 구인회 럭키금성(LG 전신) 창업주의 셋째아들 자학씨(현 아워홈 사장)와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 숙희씨다. 이들의 결혼은 통혼의 시발이 됐다. 재계 정상에 있는 두 그룹이 사실상 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다.
이 인맥은 한진그룹까지 이어진다. 자학씨의 둘째 딸인 명진씨는 한진일가로 출가하며 한진그룹과 연을 맺었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아들 명호씨와 백년가약을 맺은 것이다.
최태원·노소영 부부. 최씨는 현 SK회장이며, 노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다.
현대가문과의 인연은 지난 1996년에 이뤄졌다. 일찍이 세상을 떠난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4남 몽우씨의 장남인 일선씨와 구태회 LG전선 명예회장의 손녀 은희씨가 결혼, 사돈지간이 됐다. LG가문은 이에 따라 삼성과 현대가문 등과 가깝고도 먼 친척인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금호가문과는 구자훈 LG화재해상보험 회장의 3녀 문정씨가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의 장남 재영씨와 혼사를 치르면서 연결됐고, 고 구인회 회장의 막내 동생 두회씨는 한일그룹과 혼맥을 맺었다.
LG가문은 한일그룹과도 연을 맺고 있다. 구인회 회장의 막내 동생인 두회씨의 장녀 은정씨가 김한수 한일그룹 창업주의 동생인 김택수씨의 아들인 중민씨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또 박두병 두산그룹 회장의 3남 용훈씨는 구인회 명예회장의 조카사위가 됐다.
LG가문과 대림가문과는 직·간접으로 사돈관계가 형성돼 있다. 일단 구인회 회장의 차녀 자혜씨는 대림산업 창업주인 이규덕 회장의 아들 재연씨와 혼사를 치렀다.
장남인 구자경 명예회장은 대지주 딸인 하정임씨와 결혼한 이후 대림그룹에 딸을 시집보냈다. 이로 인해 직·간접적 혼맥을 만든 것이다.
이밖에 대한펄프 최병민 가문, 한국타이어 조양래 가문, 대한전선 설원량 가문 등과도 혼맥으로 연결돼 있다.

삼성家의 ‘재벌 사돈잡기’

삼성가문의 혼맥 특징은 직접적 관계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혼맥도를 따라가다 보면 여타 그룹 일가와 비슷하고 복잡하다. 특히 조선·중앙·동아일보와 혼연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삼성그룹이 재벌가문과 직접적인 혼맥을 이룬 것은 지난 1957년 LG가문과의 성혼이 처음이다. 고 이병철 그룹회장의 차녀 숙희씨가 고 구인회 LG 창업주 집안(자학씨와 결혼)의 며느리로 들어갔다. 뿐만 아니라 사위인 자학씨가 한진가문과 사돈이 되면서 삼성가문과 한진가문간도 두 다리 건너 사돈관계가 형성됐다.
삼성가문은 이후로 40여 년 가까이 재벌가문과의 이렇다 할 통혼을 하지 않았다. 이 같은 흐름이 깨진 것은 지난 1998년 ‘삼성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 재용씨(삼성전자 상무)와 대상(구 미원)가문과의 혼사였다.
재용씨는 1998년 6월,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당시 세간의 화두로 부각되기도 했다. 삼성그룹의 실질적 후계자인 재용씨와 아버지(임 명예회장)로부터 막대한 지분을 물려받은 세령씨와 결합이 그 이유다. 세간에선 국내 최고 ‘갑부 부부탄생’이란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재용씨와 세령씨의 만남 뒤에는 어머니들의 두터운 친분이 숨어있었다. 재용씨의 어머니인 홍라희 여사와 세령씨의 어머니인 박현주 여사가 친분을 활용, 첫 만남을 주선했고 이 만남이 두 사람의 화촉을 밝혔던 것이다.
현대가문과는 직적접 혼연관계를 형성하지는 않고 있지만 한 다리만 건너뛰면 사돈지간이 된다. 이건희 회장의 장인인 홍진기 전 내무장관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가 사돈간이고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도 노 전 총리와 사돈간이다. 현대가문과 직접적 성혼은 없었지만 한 다리 건너 사돈지간으로 얽혀 있는 셈이다.
이밖에 삼성가문은 김용대 동방그룹 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조내벽 전 라이프그룹 회장 등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임세령 부부. 삼성그룹의 실질 후계자인 이 상무와 대상그룹의 지분을 상당수 갖고 있는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와의 만남은 1998년 6월 결혼당시 ‘국내 최고 갑부 부부’란 화두로 세간의 이목을 받았다.

현대家의 ‘재벌 사돈잡기’

현대그룹 정주영 가문의 혼맥도 역시 화려함에서 전혀 손색이 없다. 삼성·LG·강원산업·쌍용 등의 가문과 연결돼 있는 탓이다.
현대가문은 삼성가문과는 직접적 관계는 없다. 그러나 한 다리만 건너뛰면 사돈지간으로 연결된다. 이들 가문을 연결해 주는 매개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다.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큰딸인 숙영씨가 노 전 총리의 큰며느리다. 노 전 총리는 또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인인 홍진기 전 내무장관과 사돈간이다. 이로 인해 현대가문과 삼성가문은 직접적 성혼은 없었지만 한 다리 건너 사돈지간으로 얽혀 있다.
LG가문과 혼연관계를 형성한 것은 지난 1997년의 일이다. 일찍이 세상을 떠난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4남 몽우씨의 장남 일선씨가 구자엽 희성전선 부회장의 장녀인 은희씨와 혼인했다. 당시 두 사람은 미국 유학시절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고 밝혔고 이 결혼은 현대가문이 재벌간 혼맥지도를 한층 넓혀 나가는데 큰 일조를 했다.
현대가문은 또 1995년 강원산업과 인연을 맺었다. 정몽구 현대차 회장의 장남 의선씨와 정도원 강원산업 회장의 장녀 지선씨가 화촉을 밝힌 것이다. 이는 재계에 재벌3세간 성혼이 줄을 잇게 불을 지핀 계기가 됐다.
쌍용가문도 현대가문과 사돈지간이다. 정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았던 몽필씨의 차녀 유희씨가 김석원 쌍용 회장의 장남 지용씨와 혼례를 올렸다. 지용씨는 유희씨의 할아버지인 왕회장(고 정주영 전 명예회장)이 직접 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호家의 ‘재벌 사돈잡기’

호남의 대표기업으로 꼽히는 금호그룹도 재계를 거미줄 망으로 엮고 있다. 금호그룹이 맺고 있는 재벌가문은 삼성·LG가문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들 가문이 재계의 혼맥을 잇고 있어 금호가문도 역시 두 다리 건너 사돈관계를 자연스럽게 형성하고 있다.
세간에선 금호가문의 혼맥에 대해 고 박인천 창업주가 ‘내노라’하는 장안의 명문가를 두루 뛰어다니며 사돈잡기에 나선 성과로 평가하기도 한다.
금호가문과 삼성가문간의 혼연관계는 간접적이다. 박 창업주의 3녀인 현주씨가 호남 기업인 대상그룹으로 출가했다. 그런데 삼성의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장모인 박현주 여사가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의 딸이다. 따라서 금호가문은 삼성가문과 간접 사돈이 된다.
반면 LG가문과는 직접적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박인천 창업주의 장남인 성용씨(금호 명예회장)의 며느리가 구자훈 LG화학 회장의 막내딸인 문정씨다. 2000년 10월 이뤄진 이 결혼은 금호가문이 재계 전체와 다리 건너 사돈관계를 맺는 수확을 가져 왔다. LG가문의 혼줄의 거의 대부분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는 이유에서다.

신건용 기자mailto: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 얼키고 설킨 혼맥 <제1탄> 금호그룹
‘脫호남’ 추구, 혼맥 형성 ‘올인’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주>.

금호그룹은 대표적 호남 재벌로 꼽힌다. 박인천 창업주가 지난 1946년, 1937년형 5인승 포드 자동차 2대로 전남 광주에서 택시회사로 출발시킨 금호는 58년 동안 재계를 움직이는 그룹으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금호가문의 특징으로는 영남권의 명문세가 사돈이 많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이 같은 특징은 ‘탈호남’을 추구했던 박인천 창업주 뜻에서 비롯됐다.
박 창업주가 직접 나서 4명의 아들에 대한 며느리 감을 찾기 위해 영남의 명문가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돈 맺기를 간청했다는 것은 재계의 한 일화로 남아있을 정도다. 이런 혼사 가풍은 박 창업주 사후에도 계속 이뤄지고 있다.

2세…정계·금융계 통혼

1901년 전남 나주출신인 박인천 창업주는 슬하에 5남3녀를 뒀다. 이들은 박 창업주의 노력으로 명문가와 혼인관계를 맺으며 재벌가 혼맥을 구성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굵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게 한 전문가의 전언이다. 국내 정상의 삼성·LG그룹과 혼맥을 잇고 있어서다. 게다가 이들 가문이 재계의 혼맥 중심에 서 있어 금호가문도 자연스럽게 재벌가문들과 한 두 다리 건너 사돈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박 창업주의 장남인 성용씨(현 금호그룹 명예회장)는 마거릿 박씨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마거릿 박씨는 전 벌링톤 저축은행 부총재였던 알버트 나이트씨의 딸이다.
성용씨는 금호그룹이 무역업에 진출하는데 일조한 인물.
박정희 정권 시절 대통령 비서실 비서관으로 재직했던 그는 1974년 경영일선에 뛰어들며 무역업으로 다각화를 시도했고 국내 10위권의 재벌로 성장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차남인 정구씨(전 금호그룹 회장·2002년 작고)의 장인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4선의 관록을 자랑한 김익기 전 국회의원이다. 김형일씨가 김 의원의 딸로 정구씨와는 9살 터울이다. 형일씨는 박 창업주가 손수 영남권을 돌며 찾은 며느리다.
이를 따라가면 해태그룹과 연결된다. 김 의원과 박병규 전 해태그룹 창업주와 사돈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또 해태가문은 민병권 전 교통장관과도 사돈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3남 삼구씨(현 금호그룹 회장)는 5살 차이인 이경렬씨와 결혼했다. 이씨의 부친은 재무장관과 한국은행·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부산 출신의 이정환씨다. 이 장관은 정종만 전 동양증권 사장 집안으로 딸을 출가, 사돈지간이 됐으며 정 사장은 또 정인환 전 동양화재 사장 집안에서 며느리를 받아들여 겹사돈을 형성하고 있다.
4남인 찬구씨(현 금호석유화학 부회장)는 마산 출신인 위창남 전 경남투금 사장의 딸 위진영씨와 혼례를 올렸다. 위 사장 역시 영남권에선 명문가로 일컬어졌던 집안. 이 또한 박 창업주의 발로 뛴 노력의 산실이다. 한편 막내아들인 종구씨는 동갑내기인 이계옥씨와 결혼했다.
박 창업주의 딸들 역시 명문을 자랑하는 화려한 집안으로 대부분 출가했다. 장녀 경애씨는 경상도 출신 배태성 전 제헌의원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배영환씨가 바로 경애씨의 남편이다. 둘째 딸인 강자씨는 사업가 집안으로 출가했다. 남편강대균씨는 사업가인 강윤수씨 아들이다.

3세…중심에 다가서는 통혼

하지만 무엇보다 금호그룹이 재벌가문과 공식적 물꼬를 튼 것은 셋째 딸인 현주씨의 결혼에 있다. 현주씨의 남편은 전북의 재벌기업 미원그룹(현 대상그룹) 창업자인 임대홍씨의 장남 창욱씨(현 대상그룹 명예회장)다. 이 결혼은 당시 전남 재벌과 전북 재벌의 통혼으로 또 하나의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정도다.
현주씨의 결혼은 또한 삼성가문과 간접적 사돈관계를 맺는 가교역할을 해 또 한번 화제가 됐다. 지난 1998년 6월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결혼한 대상그룹 임세령씨가 바로 현주씨의 장녀다. 때문에 현주씨는 이 상무의 장모가 되며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는 사돈이 된다. 이들의 결혼은 금호가문과 삼성가문이 간접 사돈관계를 양산했다.
이를 따라 가면 현대가문과도 다리 건너 사돈관계가 된다. 이건희 삼성 회장의 장인이 홍진기 전 내무장관이고, 홍 전 장관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가 사돈지간이다. 또 노 전 총리와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는 사돈을 형성하고 있다. 현대가문과는 직접적 성혼은 없었지만 혼맥을 따라가면 간접적으로 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다. 금호가문 3세들은 LG가문과 대우가문과도 혼맥을 만들며 재계 혼맥의 본산에 더욱 다가섰다. 특히 재계 혼맥의 본산인 LG가문과의 통혼은 금호가문의 혼맥을 한층 더 두텁게 만들었다.
금호가문이 대우가문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94년의 일이다. 박 창업주의 손녀이자 박정구씨의 장녀인 은영씨가 1994년 9월9일,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차남 선협씨와 혼례를 올렸다.
은영씨와 선협씨의 만남은 미보스톤대 한국 유학생모임에서 이뤄졌고 오랜 연애 기간을 거쳐 결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혼사는 대우-금호-미원-해태 등 4개 재벌과 정·관계의 관계자들이 혼맥으로 얽히게 된 계기가 됐다.
박 창업주의 3녀인 현주씨가 미원그룹으로 출가하면서 미원을 매제그룹으로 맞았고, 차남인 정구씨가 해태그룹과 사돈지간인 김익기 전 국회의원을 장인으로 삼아 해태와도 연줄이 닿아 있기 때문이다.

LG와의 혼맥 형성으로 재계 혼맥 중심에 우뚝

금호가문은 지난 2000년 LG가문과 사돈지간이 됐다. 당시 재계 8위였던 금호그룹이 재계 혼맥의 본산으로 불리는 LG가문과 혼맥을 형성한 것은 세간의 이목을 총 집중시켰다. 이들 가문의 사돈관계는 박정구씨가 10월2일 구자훈 LG화재 회장의 3녀 문정씨를 큰며느리도 받아들이면서 이뤄졌다. 장남 재영씨와의 혼사가 그것이다.
구 회장은 창업주인 고 구인회씨의 동생인 철회씨의 3남이며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과는 사촌지간이다. 또 LG화재는 계열분리가 됐지만 구씨·허씨로 대표되는 LG가문의 본류에 해당한다. 금호가문은 이 결혼을 계기로 삼성·현대·한진·두산·대림·한일 등 국내 굴지의 재벌과 사돈 사이인 LG가문을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써 중심에 다가섰다.
이 결혼으로 인한 혼맥을 거슬러 올라가면 효성그룹을 거쳐 동방유량까지 연결되고 있다. 또 벽산그룹을 거쳐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구 대표의 누님인 위숙씨가 경남 진양의 대지주 허만정씨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간 것이 매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허씨가문은 고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의 장녀 명숙씨를 며느리로 맞았고, 효성그룹과 송인상 전 재무장관과는 사돈지간이다. 아울러 송 전 장관과 신덕균 동방유량 명예회장과도 사돈관계다.
박 전 대통령과의 다리 건너 사돈관계에 놓인 것은 허씨가문이 김인득 벽산그룹 명예회장과 사돈지간이기 때문이다. 김 회장과 박 전 대통령과도 사돈관계에 있으므로 자연히 금호가문과 박 전 대통령과는 다리 건너 사돈지간이 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다. 구 대표 집안이 두산그룹을 거쳐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연결됨으로써 이들 가문과 간접적 다리 건너 사돈이 된다. 구 대표의 넷째 누님인 선희씨는 박우병 전 두산산업 사장 집의 며느리다. 이를 따라가면 강성진 전 증권협회 회장과 김복동 전 국회의원과 사돈관계가 형성되고 김 전 의원과 노 전 대통령과도 사돈지간이다.

한국철강-일진과도 한가족

금호가문은 또 한국철강·일진 가문과도 직접적인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박정구씨의 둘째딸인 은경씨가 장상돈 한국철강 회장의 차남인 세홍씨와 결혼함으로써 장 회장의 둘째 며느리가 됐다.
일진가문과는 지난 2001년에 이뤄졌다. 박정구씨의 3녀 은혜씨가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의 차남인 재명씨와 혼례를 올렸다. 이들 부부는 미국 유학 중 만나 교제를 시작, 결혼까지 이뤄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금호가문은 이처럼 박 창업주의 노력 때문인지 혼맥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삼성과 LG가문은 물론 대우·대상·일진 등 내노라 하는 명문가문과도 통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건용 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 얼키고 설킨 혼맥 <제2탄> 동부그룹
정치권 인맥 덕(?)에 정경유착 구설수 잦아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주>

지난 13일, 동부그룹은 불법 대선 자금과 관련 검찰로부터 압수수색을 받았다. 검찰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동부건설과 (주)동부를 급습, 회계장부 등을 확보했다. 동부그룹은 이에 당황스런 분위기가 연출됐다. 한동안 주춤했던 대선 자금 수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첫 타자가 ‘동부’일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다.
세간에선 동부그룹의 압수수색을 두고 ‘또 한번 회오리바람을 맞을 모양’이란 예견을 내놓고 있다. 정치권과 관련된 사안에선 예외 없이 수사선상에 올랐던 과거 전적(?) 탓이다. 동부그룹은 지난 1982년 이철희·장영자 사건과 1994년 돈봉투 사건으로 곤혹을 치른 바 있다.

‘금배지’가 빛나는 가문

뿐만 아니다. 재계에서 동부그룹은 잦은 정경유착의 시비에 휘말리는 축에 속한다. 이는 정치권과 밀접하게 연결된 동부그룹의 혼맥에 기인한다. 실제 동부그룹은 정·재계에 폭 넓은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때문에 각종 사업진출과 기업인수 때마다 정경유착의 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동부그룹의 창업주인 김준기 회장의 가문을 보면 정치권과 많은 인맥이 형성돼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생은 물론 사돈까지 여의도(국회)에 적을 두고 있다. 정략결혼의 색채도 짙다.
일단 김 회장의 할아버지인 김항경씨는 강원도 동해의 대지주 출신이다. 7선 의원으로 공화당 시절 국회부의장을 지낸 거물 정치인 김진만씨(민족중흥동지회 회장)가 부친이다. 1971년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장관 해임건의안에 동조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격노를 샀던 ‘10.2 항명파동’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거물 정치인을 부친으로 뒀던 김 회장은 이 같은 이유로 잦은 정경유착 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하지만 사실 그에게 부친은 원군이기보단 불편한 관계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업 자체를 반대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도움도 없었다는 것. 특히 5공화국 시절 부친이 부정축재자로 몰리면서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는 게 측근의 전언이다.

삼양사·사조산업과 사돈

김 회장은 삼양사와 인연을 맺고 있다. 삼양사는 당시 쟁쟁한 재벌 가문이었으며 때문에 동부와 삼양사의 혼사는 세간의 관심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부인 김정희씨가 삼양사 창업주인 김연수(인촌 김성수의 동생) 가문의 7남6녀 가운데 장남인 김상준 삼양사 고문의 딸이다. 연세대 음대를 나와 25세 나이에 김 회장과 혼례를 올렸다.
이는 동부의 가장 든든한 재목을 얻는 성과를 가져왔다. 윤대근 동부전자 사장을 손아래 동서로 맞은 것. 윤 사장은 김 회장의 부인 김정희씨의 동생인 정림씨와 혼사를 치렀다. 이후 김 회장이 제조부문을 전적을 맡기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다.
게다가 윤 사장과의 관계는 김준기 가문에 5개의 금배지를 있게 만들어 주었다. 윤 사장의 부친이 윤천주 전 자민련 고문이다. 또 윤 전 고문의 첫째 사위가 주진우 한나라당 의원(사조산업 회장)이다. 이들과는 다리 건너 사돈인 셈이다.
김 회장은 자녀의 혼사엔 관대했다. 본인의 뜻을 존중한 것이다. 김 회장은 김효일 리젠트화재(옛 해동화재) 회장의 아들인 건세씨를 맏사위를 맞았다. 장녀인 주원씨와 백년가약을 맺게 한 것이다. 당시 기우는 혼사란 얘기가 나왔지만 김 회장이 딸의 뜻을 존중, 혼사를 맺게 했다는 후문이다.

이철승 전 의원에서 신춘호 농심회장까지

김 회장 일가는 5남3녀의 대가족이다. 동생인 김택기씨(열린우리당 의원)는 거물 야당 정치인이었던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의 사위다. 부인 이양희씨는 성균관대 아동학과 교수로 이 전 위원의 외동딸이다.
게다가 김진만씨와 이철승씨는 9대 국회 시절 나란히 국회 부의장을 역임, ‘사돈 국회부의장’이란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또한 김씨는 롯데그룹과도 여동생을 통해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김 회장의 둘째 남동생인 무기씨는 학자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서울대 문리대학장을 지낸 고 이종진 교수의 막내딸 지은씨가 부인이다. 그는 동부증권 부사장과 동부그룹 업무조정실장을 거쳤다.
김 회장은 거리가 먼 편이기는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과도 5다리 건너 사돈관계다. 더욱이 이 혼맥을 이어보면 농심그룹과 조양상선, 김치열 전 법무장관, 대전피혁, 동방유량 등과 한 축을 이룬다. 이 중심엔 김 회장의 동생인 희선씨가 있다.
희선씨는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차남인 동륜씨에게 시집을 갔다. 신 회장은 장녀 현주씨를 박남규 조양상선 회장의 4남 재준씨와 맺어줬다. 박 회장은 김치열 전 법무장관과, 김 전 장관은 김종대 대전피혁 회장과 각각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김종대 대전피혁 회장의 누나 영자씨(작고)는 신덕균 동방유량 명예회장의 부인이며 신명수 회장의 어머니다. 신 회장은 장녀 정화씨를 노 전 대통령의 집안에 시집을 보내 사돈을 맺었다. 혼맥을 따라가면 노 전 대통령과 다리 건너 사돈지간이 되는 셈이다.

화려한 혼맥이 걸림돌?

김 회장의 인맥은 정·재계를 막론하고 화려한 혼맥을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득보단 실이 많았다는 평가 역시 받고 있다.
그는 강원도 동해 태생이다. 경기 중·고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경제학과를 다녔다. 경영일선에 뛰어든 것은 지난 1969년의 일이다. 당시 대학생의 신분으로 미륭건설을 설립, 그 후 탁월한 경영수완을 발휘해 오늘의 동부그룹을 키웠다.
실제 김 화장은 지난 1970년대 말부터 10여 년 동안 동부산업(옛 삼척산업), 한국자동차보험, 동부제강(옛 일신제강), 울산석유화학, 영남화학 등 오늘날 동부의 간판기업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들을 잇달아 인수, 주목을 받았다.
재계에선 김 회장에 대해 베일에 가려진 인물로 평한다. 잘 나서지 않는 그의 성격 탓이다. 반면 전문경영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공격적인 경영으로 기업확장에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함께 대표적 ‘성공사례’로 꼽기도 했다. 게다가 부친의 영향을 받아 폭 넓은 인맥을 구축함으로써 탄탄대로를 달렸다는 혹평(?)도 받고 있다.
하지만 김 회장의 전적을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재계에서 기업인수의 귀재로 불리게 된 반면 문어발식 기업인수에 따른 정경유착 시비에 자주 휘말리곤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시비 수면 아래엔 그의 화려한 혼맥이 자리를 잡았다.
첫 번째 정경유착 시비는 1982년에 일어났다. 이철희·장영자 사건 당시 이 사건으로 도산한 일신제강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정치자금 헌납설로 큰 곤욕을 치렀던 것이다.
1994년에 일어난 국회 노동위 돈봉투사건은 동부그룹의 위기설까지 나돌 정도의 파문을 가져다 줬다. 이 사건으로 당시 친동생인 김택기 한국자동차보험 사장이 구속,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시련을 맛보았다. 게다가 이 사건은 국회 노동위 소속 국회의원뿐만 아니라 정치권의 고위 인사들에까지 의혹의 눈길을 쏠리게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김준기 회장이 1세대다”

뿐만 아니다. 1995년 11월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관련, 김 회장이 1차로 소환되면서 재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6공 비자금 사건을 수사 중인 대검 중수부(안강민 검사장)가 노 전 대통령에게 돈을 건넨 혐의로 소환을 했던 것.
1999년 세풍사건 때도 어김없이 시비에 말려들었다. 국세청 대선 자금 불법모금에 30억원을 제공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다 세풍사건의 주역으로 구속된 이회성씨와 경기고 동창이란 점이 큰 작용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30억원 제공 혐의를 받아 소환이 확정됐지만 세풍사건이 한창 진행되던 때 미국행 출국을 서둘러 6개월 동안 귀국하지 않았다. 비서도 대동하지 않은 채 단신으로 미국으로 출국한 뒤 간간이 비서실 일부 임원과 연락을 취했다는 후문이다.
김 회장은 이번 압수수색으로 또 한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면에는 물론 화려한 인맥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세간의 관측이다. 게다가 그는 소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소환 가능성에 대해 “너무 앞서가지 말라”고 동부그룹은 당부하고 있지만 총수 소환 가능성에 대해 완강히 부인은 못하는 상태다. 때문에 세간의 관심은 총수 소환 여부와 이번 사건으로 인해 김 회장 혼맥에서 부각될 인물들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동부그룹의 한 관계자는 혼맥과 관련 “동부그룹의 창업주는 김준기 회장이므로 혼맥도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옳다”면서 “부친을 중심으로 한 혼맥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신건용 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의 얽히?설킨 설킨 혼맥] <제3탄> 두산그룹
한 다리 건너 권문세도 가문 인맥 화려
 
서울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두산타워 건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주>

두산의 올해 나이는 1백8살이다. 일각에선 이에 대해 의아한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상장기업분석에 근거하면 올해 나이가 71살이 된다는 게 그 이유다. 그 동안 이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논란이 빚어진 것은 기준이 달라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두산은 소하기린맥주주식회사 설립날짜를 기준으로 1933년 12월18일을 설립일로 정했다. 소하기린맥주(주)는 두산의 모기업인 OB맥주의 전신. 주식회사를 갖춘 시점으로 설립일이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두산의 실제 나이는 1백세를 훌쩍 넘는다. 1896년 8월1일, 서울 종로4가에서 출발한 ‘박승직상점’이 두산의 최초 회사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우리나라에서도 최초 회사라는 게 두산의 설명이다.

“정략관계에 의미 두지 말라”

두산그룹의 창업주 박승직씨는 유언으로 “자녀 혼사에서 정치와 가까이 하는 등 정략관계에 의미를 두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박 창업주의 유언은 곧 두산그룹의 혼습에 그대로 이어졌다. 언뜻 보면 대재벌 가문답지 않게 사돈가문의 면면은 평범하다. 정·관계 사돈을 가급적 피한 경향이 짙다.
그러나 한 다리만 건너면 역시 범상치 않다. 사돈들을 보면 결코 화려하다고 보기 어렵지만 사돈들의 사돈을 추적해 보면 두산가문도 역시 범상치 않은 집안들과 연결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혼맥도를 연결해 보면 당대 세도가문과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박두병 초대회장(작고)은 슬하에 6남1녀를 뒀다. 재계에선 박 초대회장의 ‘며느리 고르기’는 정평이 나 있을 정도다. 맏며느리인 이응숙씨(작고) 얘기는 하나의 일화로 유명하다. 장남인 용곤씨(현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배필감을 찾던 중 딸의 친구였던 이응숙씨를 ‘후보’로 잡았다.
박 초대회장은 이씨의 집 앞에서 지프를 타고 있다가 문을 나서는 그녀를 한동안 추적하며 인물과 행동거지를 살피는 등 며느리 찾기에 공을 들였다. 지프를 타고 달려가 며느리를 맞이한 셈이다.
이런 인연은 나중에 홍사덕 의원까지 연결된다. 이씨의 아버지 이관제씨가 임문환 전 농림부 장관(작고)과 사돈인데. 임 전 장관의 사위가 홍 의원이다.
또 김인기 전 민자당 의원과도 혼맥을 잇고 있다. 박 명예회장과 김 전 의원은 경동고 동문이자 직접 사돈이다. 김 전 의원의 딸 소영씨를 며느리로 맞았기 때문이다. 박 명예회장과 김 전 의원은 경동고 선후배 사이로 동창회 모임에서 혼담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명딸인 용언씨는 실력파 검사였던 김세권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김씨는 대검찰청 차장과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냈다. 현재는 KCL 대표변호사로 활약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알고 보면 정계 알짜 혼맥

차남 용오씨(현 두산그룹 회장)는 1962년 최금숙씨와 결혼했다. 미국 유학 중 연애를 통해 신부를 맞을 것. 이 인연은 강원산업과 연결된다. 장인인 최낙원씨와 정인욱 강원산업 창업주와는 사돈사이다.
용오씨는 서상철 전 동자부 장관과 인연을 맺고 있다. 서 전 장관의 차녀 미경씨가 맏며느리다. 서 장관은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로 고려대 교수로 있다가 경제관료로 수혈돼 안타깝게도 지난 1983년 아웅산 폭파사건 때 순직했다. 하지만 이 혼맥은 서상목 전 국회의원과 이어진다. 서 전 의원이 서 전 장관의 동생이기 때문이다.
3남 용성씨(현 두산중공업 회장·상공회의소 회장)는 김선필 전 삼성물산 사장의 딸 영희씨와 1966년 혼례를 올렸다. 당시 용성씨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미국유학 길에 오르기 직전,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영희씨와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4남 용현씨는 이화여대 음대를 나온 엄명자씨(사업가 이주상씨 딸)와 1968년 혼사를 맺었다. 그는 그룹경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서울대 병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5남 용만씨(현 두산 총괄 사장)는 바깥에 알려진 집안과 혼사를 맺었다. ‘증권업계 대부’로 통했던 강성진 전 증권협회 회장이 장인이다. 1979년 강 전 회장의 장녀인 선애씨와 혼례를 올렸다. 용만씨는 강 전 회장의 차남 흥구씨와 동기동창. 집에 놀러갔다가 신애씨와 사귀게 돼 결혼했다.
이 같은 인연은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 연결된다. 장인인 강 전 회장이 김복동 전 국회의원과 사돈관계, 김 전 의원은 다시 김한수 한일그룹 창업주와 사돈이며 김 창업주는 노 전 대통령과 사돈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과 다리 건너 사돈지간인 셈이다. 두산가문 중 가장 화려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용오 두산그룹회장(맨 오른쪽)은 전경련회장단 모임에서도 한 몫을 다하며 재계에서도 큰 자리를 잡고 있다.
맏형 용곤씨와 무려 28살이나 차이나는 6남 용욱씨(개인사업가)는 주영복 전 국방장관과 혼맥을 잇고 있다. 이건 전 대호건설 회장의 장녀 상의씨가 그의 아내며 이 전 회장은 주 전 국방장관과 사돈관계다.

교육열 대단한 집안 내력

두산가문은 이처럼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지 않지만 혼맥을 따져 보면 정계의 알짜 가문과 인연을 맺고 있다. 재계 인맥 역시 무시 못한다. 정략적 결혼을 추구하지 않았더라도 ‘하이클라스 가문’을 형성한 것이다.
이는 두산가문만의 특징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문을 보면 유난히 KS(경기고→서울대)가 많다. 용오-용성-용현-용만 4형제가 KS출신이다. 다만 용오씨만 뉴욕대 출신이라는 게 옥의 티일 정도다. 용곤씨는 경동고를 나와 미국 워싱턴대에서 유학했다. 이 같은 결과는 교육열이 대단했던 박 초대회장에 기인한다.
4세대에 가면 MBA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MBA 백화점’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뉴욕대의 경우 용성씨를 비롯해 아들인 진원씨와 조카들인 지원(용곤씨의 차남·현 (주)두산중공업 부사장)·태원(용현씨의 장남·현 (주)두산상사 BG 사장)씨 모두 동문이다.
보스턴대는 용만씨와 조카인 정원(용곤씨의 장남)씨과 동문관계를 맺고 있으며 페퍼다인대는 용욱씨가 나왔다.
며느리들 중에 ‘이화여대 출신’들이 많다는 것 또한 두산가문의 특징이다. 맏며느리인 응숙씨를 위시해 김영희·엄명자·김소영·서지원·정윤씨 등이 이대 선후배 사이다. 유독 서미경씨와 이상의씨만이 각각 고려대 신방과와 한양대 기악과 출신이다.
두산가문의 특징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경영수업이다. 독특하다는 표현이 맞다. ‘바닥(사원)부터 시작하고 모든 계열사를 골고루 익히게 한다’는 기본적인 원칙이다. 30대 초반에 두산 계열사에 배치돼 1년에 1계단씩 승진하는 게 일반적이다.
두산그룹 한 관계자는 “두산가문은 박승직 창업주의 ‘정치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유훈에 따라 정·관계 사돈을 가급적 피한 경향이 짙다”면서 “대재벌 가문답지 않게 사돈가들의 면면히 평범하다는 게 두산가문의 특징”이라고 꼽았다.

신건용 기자mailto: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의 얽히고 설킨 설킨 혼맥] <제4탄> 한진그룹
알고 보면 재계 알짜 혼맥
 
지난 1999년 11월 11일 한진그룹 탈세사건과 관련, 검찰의 조사를 받은 조중훈(趙重勳) 한진그룹회장이 임직원의 부축을 받으며 귀가하고 있다.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주>.

최근 한진그룹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유는 불법 대선 자금 수사 때문이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최근 비공식적으로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다. 핵심 임원들도 검찰에 불려 다녔다. 지난 대선 당시 민주당 정대철 의원에게 불법 대선 자금을 건네 준 혐의다.
일각에선 조 회장이 소환에 이어 사법처리까지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회자되고 있다. 또 다른 일각에선 검찰 소환에 적극적으로 대처, 구속은 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들린다. 하지만 아직 명암은 가려지지 않은 상태다.
조 회장은 지난 1999년 탈세사건 때도 연루돼 구속된 바 있다. 항공기 구매와 관련 리베이트를 받아 개인적인 용도로 빼돌려 6백29억원을 포탈한 것이 적발됐다.
한진그룹은 이로 인해 또 한번의 위기를 맞고 있다. CEO의 부재가 점쳐지고 있어서다. 조 회장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와 맞물려 한진가문의 혼맥도 또 다시 세간의 이목을 받고 있다.

스펙트럼처럼 다양한 혼맥

한진그룹 조중훈 가문은 사돈 가운데 언뜻 보면 당대 권력가가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집안의 혼맥도 자세히 살펴보면 전직 장·차관 등 명망가들이 수두룩하다. 스펙트럼처럼 다양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는 것도 또 다른 특징으로 꼽힌다. 재계 통혼도 그 중에서 한 몫을 차지한다.
조중훈 창업주는 1920년생이다. 부친 조명희씨와 모친 태천접씨의 4남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조 창업주는 25세에 평범한 집안의 김정일씨와 혼인, 4남1녀를 뒀다. 조현숙, 조양호, 조남호, 조수호, 조정호씨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이후 결혼할 때 상류층 가정들과 다양한 혼맥 관계를 맺어 재계에서 화제가 됐다.
장녀 현숙씨는 한진그룹 태동과 인연이 깊다. 조 창업주가 한진상사를 설립하던 해인 1945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1968년 당시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이태희씨와 혼사를 치렀다.
이태희씨는 이상묵 전 홍아타이어 감사의 장남이다. 현재 대한항공 법률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는 그는 지난 1983년 KAL기 폭파사건 당시 뒷수습에 앞장섰던 일로 세간에 이름이 알려졌다. 당시 사건 수습을 위해 맹활약했기 때문이다. 조중훈 가문은 법률가 사위 덕분에 대법원 판사를 지낸 한봉세 집안과도 줄이 닿는다.
지난 1970년 수출의 날 행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표창기를 받고 있는 조중훈회장.
그러나 이는 서곡에 불과했다. 장남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을 비롯, 형제들이 명문세가 집안과 사돈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은 1949년 서울 종로에서 누나 현숙씨와 3년 터울로 출생, 조 창업주의 후계자답게 결혼에서도 진면목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지난 1973년 이재철 전 교통부 차관의 3남1녀 중 외동딸로 서울대 미대를 나온 명희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들은 부친들이 한 모임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혼담이 오가, 중매로 맺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혼사는 재계에서 “장인 덕에 대한항공이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운수업계 재벌인 한진과 운송관계 주무부처 교통차관 집안과의 혼사란 점에서 ‘정략결혼’이란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재계 일각에선 이들의 결혼은 한진의 사업행로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 전 차관은 1976년 공직에서 물러난 후 한진그룹이 인수한 인하대 총장을 지냈다. 국민대와 중앙대 등 대학 총장만 세 차례나 역임했다. 행정가에서 교육가로 변신한 특이한 이력을 갖춘 것이다. 또 그는 신예용 안과의사와, 신 의사와 이종근 전 극동정유 부사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한진가문과 극동가문도 연결된다.

롯데·LG가문과 사돈 지간

차남인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1951년생)은 형제들 중 유일한 국내파다. 국내 대학(고려대 경영학과)을 졸업하고 유학생활을 거치지 않았다. 그는 교육자 집안과 인연을 맺었다. 1950년대 경기고 교장을 거쳐 교육감으로 이름을 떨친 김원규씨가 장인이다.
아내인 영혜씨는 김 전 교육감의 차녀로 이대를 졸업했으며 연애결혼을 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당시 각종 스포츠를 즐기던 조남호 회장과 테니스장에서 만나 교제를 거쳐 결혼했다. 이 때문에 형제들 중 유일한 국내파이자 연애결혼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갖췄다. 그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학연을 바탕으로 한 두터운 인맥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진가문이 재벌가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3남인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에 의해서다. 조수호 회장의 처가는 신격호 롯데그룹 집안이다. 부인 최은영씨의 어머니는 신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숙씨이며 부친은 최현열 전 NK그룹 회장이다.
이 혼맥은 박남규 조양상선 회장을 거쳐 김치열 전 내무장관-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신덕균 동방유량 회장 집안까지 이어진다.
4남 조정호 메리츠증권 회장 역시 명문 재벌 가문과 인연을 맺었다. 특히 이 통혼은 재계와 더욱 가깝다. 조정호 회장은 1987년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으로 아워홈 회장인 구자학씨의 차녀 명진씨와 결혼했다.
조중훈 가문은 이 혼사로 기업 간에도 교류가 많아졌다. LG가문과 사돈을 맺은 것은 한진가문이 웬만한 타 재벌가문과 한꺼번에 혈연관계를 형성시켜주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형제들 혼맥도 화려 돋보여

조중훈 가문의 또 다른 특징으로 돋보이는 것은 형제들의 혼맥도 화려하다는 점이다. 우선 조 창업주의 형인 고 조중렬 전 한진건설(옛 한일개발) 고문은 부인 최학희씨와 결혼, 2남1녀를 뒀다.
장남 지호씨는 이병호 전 상공부 장관의 장녀 숙희씨와 혼례를 올렸다. 이 전 장관은 과학기술처 장관 출신의 최형섭씨와 사돈이기도 하다. 차남 진호씨는 재미동포 내과의사인 윤주덕씨의 딸 영태씨를 아내로 맞았으며 장녀인 인숙씨는 동부제일병원 내과과장을 지낸 문영호씨와 혼인했다.
조 창업주 여동생들의 혼맥도 빠지지 않는다. 그는 4명의 여동생을 두고 있었는데 첫째 여동생 정옥씨는 대진해운 대표와 동양화재 감사를 지낸 전윤진씨와 결혼했다.
둘째 여동생 정원씨는 미국에서 큰 사업을 하는 박두진씨와 혼인했으며 셋째 여동생인 도원씨는 인하대 총장을 지낸 박태원 한국과학기술원 이사장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또 넷째 여동생인 경숙씨는 재미교포 외과의사인 박소희씨를 남편으로 맞았다.
조 창업주의 남동생들도 화려한 인맥을 자랑하기는 마찬가지다. 12살 아래인 조중건 전 대한항공 고문은 이상실 전 상공은행장의 3녀인 영학씨와 결혼해 1남3녀를 두었다.
이중 장녀 윤정씨는 이동원 전 외무부 장관(국회의원)의 장남 정훈씨와 결혼했다. 조중건 전 고문은 이 전 장관을 매개로 법무장관 출신인 신직수씨와도 사돈지간이 된다. 막내 남동생인 조중식 전 한진건설 부회장은 고등학교 교장 출신인 김성덕씨의 딸 복수씨를 아내로 맞았다.
재계 한 관계자는 “한진가문은 의사 6명과 대학출신 2명, 장·차관을 지낸 관가출신 명문가문, 재벌가문 등 여럿과 사돈관계를 형성해 5대양6대주만큼 다양한 분야로 혼맥을 맺고 있다”고 요약했다.

신건용 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5탄> 코오롱 그룹
이북 기업인 출신과 결합 많아 이색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지난 1월13일, 코오롱그룹에선 경사스런 행사가 치러지며 화제를 낳았다. 이동찬 명예회장(83)이 결혼 60주년을 맞아 회혼례(回婚禮)를 올린 것이다.
이 명예회장과 부인 신덕진씨(82)는 결혼 60주년인 이날 오전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통 혼례 절차에 따라 예식을 가졌다.
회혼례는 부부가 건강하게 60년간 결혼 생활을 유지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희귀하고 의미가 있는 행사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다. 2월에는 코오롱 그룹 사보가 창간 37주년을 맞아 4백호를 발행, 또 한 번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국내 기업의 사보발간은 지난 1960년 동양맥주가 발간한 ‘사보 OB’가 최초다. 코오롱 사보는 발행 당시 16절 갱지 2페이지로 시작해 국내 최초로 나일론 공장을 설립한 코오롱의 역사를 투영시켜 왔다.
코오롱그룹은 이처럼 의미 있는 행사가 연이어 이어지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가운데 코오롱가문의 혼맥 역시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차남은 정계 막내딸은 재계와 통혼

코오롱그룹은 그룹의 규모에 비해 혼맥만큼은 단연 10대 그룹감으로 꼽을 정도다. 코오롱그룹 이원만 가문은 실제 ‘재벌의 대표적인 혼맥’으로 통한다. 정·관계 및 재계에 걸쳐 두루두루 알짜배기 혼사를 성사시켰다.
실제 이원만 가문의 사돈들은 하나같이 정·관·재계 명망가들이다.
이 같은 혼맥은 물론 이원만 창업주의 영향력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대 참의원과 6∼7대 의원을 지낸 이 창업주는 자녀들과 손녀들을 명문가에 출가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한국 명망가문의 중심선상에 위치했다.
이원만 창업주는 1904년생이다. 경북 영일군에서 부친 이석정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손 위 형들은 태어난 지 채 1년도 못되어 모두 사망했기 때문에 실질적 장남으로 성장했다. 이 창업주는 1920년 4월, 이위문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2남4녀를 뒀다. 이동찬·이봉필·이매란·이미자·이동보·이미향씨 등이 그들이다. 이중 장남 동찬씨는 현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으로 있으며, 차남 동보씨는 전 코오롱TNS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 창업주 자녀들 중 명문세가 집안과 혼맥을 맺은 사람은 차남 이동보 회장과 3녀 미자씨, 막내딸 미향씨다. 이동보 회장은 정계, 미자씨는 만석꾼 집안, 미향씨는 재계 명문가문과 통혼을 이뤘던 것이다. 이것이 코오롱가문 혼맥 형성의 단초가 됐다.

코오롱그룹본사 사옥.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사돈

이동보 회장의 장인은 김종필 자민련 총재다. 지난 1974년 김 총재의 장녀 예리씨와 결혼했다. 당시 이들의 결혼은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이 창업주 집안과 대통령 조카사위인 김 총재 집안을 연결시키기 위해 적극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육 여사는 이들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이들 부부가 신혼여행을 갔다온 후 이들을 청와대로 초청, 오찬까지 베풀 정도로 지극한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나중에 파경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 창업주 가문은 공화당 정권 당시 2인자였던 김 총재와 사돈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굳건한(?) 혼맥을 구축했다. 김 총재는 물론 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 다리 건너 사돈이 되기 때문이다.
이 창업주의 장녀 봉필씨는 1954년 고향 근처에 살던 임병진씨의 아들 승엽(작고)씨에게, 차녀 애란씨는 개인사업을 하는 노영태씨에게 출가했다. 3녀인 미자씨는 포항 대지주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당시 포항 대지주였던 박문학씨의 장남 박성기 전 한국바이린 사장이 남편이다.
막내딸인 미향씨는 허창성 삼립식품 창업주 집안으로 각각 출가했다. 허영인 태인샤니그룹 회장이 미향씨의 남편이다. 허 회장은 베스킨라빈스와 던킨도너츠 등을 통해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 창업주가 박정희 정권 시절,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펼치고 있던 시기였기에 정략결혼으로 비춰지기도 했다. 특히 코오롱그룹의 성장기가 이 시기와 맞물려 주위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이 코오롱그룹 완성 시점이다. 이 창업주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국내 최대의 나일론 섬유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외국으로부터 5천만 달러 이상의 차관을 들여왔다.
당시 은행금리가 25∼30%인데 반해 차관금리가 5∼6%에 불과했고 더군다나 이를 정부가 지불 보증해 줌으로써 차관 획득 자체가 엄청난 이권이란 의혹의 눈초리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동보씨와 미향씨의 잇따른 혼사로 코오롱그룹 경영에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고 당시 재계에선 입을 모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3세대…굵직한 정·재계 혼맥 형성

코오롱그룹의 혼맥은 3대째 가면서 더욱 화려해진다. 장남인 이동찬 명예회장(1922년생)은 해방 전인 1944년, 동향 사람인 신병옥씨의 무남 독녀 덕진씨와 혼사를 맺었다. 당시 23세의 꽃다운 나이였지만 그 때 학병으로 징집을 기다리고 있을 때여서 결혼한 지 3일만에 헤어져야 했다. 이들 부부는 1남4녀를 뒀다. 경숙·상희·혜숙·은주·웅렬·경주씨가 그들이다.
장녀인 경숙씨는 1969년 당시 공화당 의장 서리였던 고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3남 문조씨와 화촉을 밝혔다.
이 전 국회의장은 도쿄대를 나와 경북대 교수로 있다가 1960년 정치에 투신해 5선 의원을 지냈다. 정계에선 TK(대구·경북) 인맥으로 통했다. 국회의장을 비롯해 공화당 총재, 영남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탓이다. 한편 문조씨는 영남대 정치행정대학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차녀인 상희씨는 국내 대표적 송상(松商)으로 불렸던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 집안으로 출가했다. 1973년, 고 회장의 장남 석진씨와 결혼한 것이다. 석진씨는 코오롱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에나멜동선 전문업체인 빠이롯드전자 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이 회사가 부도나는 등 불운을 겪다가 지난 1998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3녀인 혜숙씨는 고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주의 장남인 동혁씨와 결혼했다. 현재 고려해운 사장으로 재임하고 있는 동혁씨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컬럼비아대학 석사 출신이다. 해운선사로서는 처음으로 대만과 홍콩 등 동남아 항로에 진출한 해운업계 프런티어 경영인으로 이름이 높다.
4녀인 은주씨는 신병현 전 한국은행 총재의 장남 영철씨(재미 의사)와 1978년, 자유교제 끝에 화촉을 밝혔다. 시아버지인 신 전 총재는 당시 보기 드문 인텔리로 상공부 장관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무역협회장, 은행연합회장 등을 역임했다.
이들 부부 결혼식에선 신 전 총재가 직접 주례를 맞아 화제가 됐다. 신영철-이은주씨 부부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신 전 총재는 또 이동녕 봉명그룹 회장과도 사돈관계다. 따라서 코오롱 가문과 봉명그룹은 다니 건너 사돈이 된다.
코오롱가문은 이로써 정계 인사인 김종필 가문과 재계 인사인 이효상·고홍명 가문에 이어 관계 인사인 신병현 가문까지 사돈관계를 맺었다.
현재 코오롱그룹 회장직을 맡고 있는 이웅렬 회장은 이 명예회장의 장남이다. 지난 1983년 황해도 연백출신인 서병식 동남갈포공업 회장의 장녀 창희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서 회장은 1962년 고급벽지의 대명사인 갈포벽지를 만들어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인물로 통한다.
부인 창희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와 불문과 대학원 출신으로 상당한 미인이다. 이 명예회장의 다섯 딸들과 며느리 서씨는 모두 이화여대 동문사이다.

딸·며느리 모두 이대 동문

그는 한동안 시부모를 모시고 살다가 분가했다. 이 명예회장으로부터는 “남들이 며느리를 잘봤다더라”며 간접적으로 칭찬할 정도의 사랑을 받았다. 지금도 이 명예회장은 거의 매주 화요일 코오롱본사 사무실 옆의 그림방으로 딸들과 함께 서씨를 불러 그림을 그리고 저녁도 사곤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5녀인 경주씨는 광명덕 전 대한변호사협회장의 장남 태훈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가정불화로 헤어졌으며 이후 국내에 있는 외국계 증권사 임원과 재혼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한 관계자는 “코오롱 혼맥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북 기업인들과 결혼이 많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고홍명 회장, 서병식 회장, 허창성 창업주 등이 대표적”이라고 지적했다.

신건용 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6탄> 대림그룹
창업주 형제들 정·재계 중심인물 많아
 
이준용회장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대림가문은 철저한 보수 체질의 건설 재벌 가문이다. ‘조용한 회사, 그리고 조용한 가족’으로 재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크게 흔들림이 없이 구조조정을 마무리했고 업계 13위란 수위권을 지키면서도 소리 없이 알뜰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림의 보수경영 체질은 이재준 창업주 자신의 체질에서 비롯되고 있다. 이 창업주의 좌우명은 ‘풍년 곡식은 모자라도 흉년 곡식은 남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전 대비를 철저히 하겠다는 의미다. 그것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몸에 배어 왔다고 전해진다.

대림의 모태는 경기도 시흥군 남면의 한 촌락이다. 이 창업주는 1917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당시 남면 면장이었던 부친 이규응씨와 모친 양남옥씨 사이의 5남4녀 중 넷째다. 아들로는 차남이다.
서울에서 정미소를 경영했던 부친은 이 창업주를 사업가로 키울 요량으로 자신의 밑에 두었다. “사업 수완이 있으니 장사를 배우라”면서 보통학교만 마치고 정미소 일을 보게 한 것. 근면성과 성실성이 사업가가 갖춰야 할 기본요건이라고 부친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것도 이 때부터다.
부친이 운영하던 ‘한일정미소’에서 경영수업을 쌓던 이 창업주는 1939년 10월, 부평역 앞에 목재와 건설자재를 다루는 ‘부림상회’란 작은 점포를 냈다. 이것이 대림그룹의 뿌리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 1947년 토건업에 진출하면서 상호를 대림산업으로 바꾸었다.
이 창업주는 1936년 봄, 19세라는 젊은 나이에 수원 지주의 딸인 이경숙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씨는 장남 이준용씨(현 대림그룹 회장)를 낳고 1943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 창업주는 이후 박영복씨와 재혼, 차남 이부용씨(대림그룹 전 부회장)를 얻었다.
이 창업주는 다른 재벌그룹 총수들과는 달리 단촐하게 두 아들만 뒀다. 때문에 후계자 다툼도 없이 순리적으로 승계작업을 끝냈다.
장남인 이준용 회장은 순탄하게 경영자 수업을 쌓아온 편이다. 아버지 밑에서 정미소 일을 배웠던 이 창업주와는 달리 한껏 교육적 혜택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 미국 덴버 대학원에서 통계학을 공부하고 대학강사 생활을 하다가 귀국했다. 국내에서도 잠시 숭실대와 영남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서울 수송동 대림산업 사무실에 첫 출근한 것은 지난 1966년의 일이다. 이후 1979년부터 2대 그룹 총수 역할을 했다.

이 회장은 1965년 이화여대 출신의 한경진씨와 연애 결혼했다. 한씨의 부친인 한순성씨는 충남 천안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 전에 양가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아 결혼에 성공했다.
이 때의 충격으로 이 회장은 한때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은 한씨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뒀다. 진숙-해욱-해승-해창-진수 등이 그들이다. 장남인 해욱(현 대림산업 전무)씨는 ‘닮은 꼴’로 소문나 있다. 세심하면서도 듬직한 성격, 부지런함, 훤칠한 키 등 거의 똑같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상무는 부친이 다니던 덴버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벤처투자와 온라인 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관계 계열사인 아이씨티로, 웹텍창업투자, 베스트플라이, 이게임즈 등에 관여하고 있다.
차남인 해승씨는 현재 미국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워싱턴 앤드 제퍼슨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대림산업 석유화학부문 경리부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3남 해창씨는 벤처캐피탈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1999년 3월16일, 최용권 삼환기업 회장의 장녀 윤영씨를 아내로 맞았다. 이 결혼은 재계에서 두고두고 회자가 되고 있다. 청첩장에 시간과 장소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해창씨의 결혼 당시, 청첩장에 결혼일시를 명기하면서 시간과 장소를 새겨 넣지 않았다. 친지들에게 경사를 알려 결례를 피하되 식장참석과 축의금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는 게 당시 혼주의 설명이다.
이 창업주의 차남 이부용 전 부회장은 한양대 공업경영학과 출신이다. 1970년에 대림산업 이사로 참여해 형과 함께 그룹 경영에 큰 도움을 줬으며 지난해 말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 전 부회장은 1970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혼례를 올렸다. 당시 서울주철공업 회장이었던 이종수씨의 외동딸로 경희대 출신인 선희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들 사이엔 해영-해성-해서 등 3형제를 두고 있다.

대림가문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창업주 형제들이다. 이 창업주의 형은 고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다. 이 의장은 부친이 적성을 파악, “법관 공부를 해라”고 일본 유학을 시켰으며 이것이 국회로 진출하는 디딤돌이 됐다.
실제 이 의장은 33살이란 젊은 나이에 제헌의원에 당선된 7선의 거물급 정치인이다. 38세에 최연소 상공부 장관을 역임했고, 신민당 부총재와 민정당 대표를 거쳐 두 차례나 국회의장을 지냈다. 이 의장은 이처럼 중량급 정치인으로 힘을 발휘하면서도 동생의 사업에 일체 관여하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의장은 부인 류갑경씨와의 사이에 5남3녀를 뒀다. 이중 장남 홍용씨는 전 은행간부 출신인 배상준씨의 딸 염자씨와 결혼시켰고, 장녀 봉희씨를 원용덕 전 헌병사령관의 아들인 창희씨에게 시집보냈다.
이 창업주의 누나인 인출씨는 이창복씨와 결혼해 준원씨를 낳았다. 준원씨는 한때 대림 계열에 있다가 독립한 풍림산업 회장을 지냈다. 둘째 여동생인 옥희씨는 조양원씨와 혼인했다. 조씨는 조경업체인 옛 대림흥산(1999년 삼호에 흡수) 부사장을 역임했다. 막내 둘째 남동생인 재우씨는 대림통상 회장으로 있다.
이들은 그러나 현재 그룹 분리와 은퇴 등을 통해 대림그룹과 인연을 달리한 상태다. 현재 계열사 어디에서도 오너의 친인척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룹 관계자의 전언이다.
이 창업주의 둘째 누나인 임출씨는 사업가 임의준씨와 결혼했다. 이들은 이해익 전 농림부장관 가문과 윤용구 일동제약 회장 가문에 각각 딸을 시집보내며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이 창업주의 막내 남동생인 재연씨의 결혼은 대림가문의 ‘꽃’으로 꼽힌다. 재연씨의 장인이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이기 때문이다. 구 창업주의 차녀인 자혜씨가 재연씨의 부인이다. 이 결혼으로 재연씨는 내내 LG그룹에서 일을 했다. LG카드 부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LG그룹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고문은 장인 덕(?)으로 재계 혼맥을 두텁게 쌓고 있다. 구 창업주가 강세원 전 희성금속 사장과, 강 전 사장은 박동복 전 금호전기 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박 전 회장은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의 친동생이다. 때문에 이 고문은 이들 가문과 다리 건너 사돈이 된다.
뿐만 아니다. 이 고문은 정·재계 가문과 골고루 직접 사돈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장남 선용씨는 세방여행 오세중 회장의 고명딸 은주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오 회장은 또 김민희 전 LG애드 사장 집안으로 딸을 시집보냈다. 차남 지용씨는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 장관의 딸인 재연씨를 아내로 맞았다.
한편 대림그룹은 6단계의 성장과정을 거쳐 현재 재계 서열 상위권에서 아성을 자랑하고 있다. 창업기(39~52년), 재건기(53~66년), 성장기(67~71년), 도약기(72~76년), 확대 성장기(77~78년), 제2창업기(89년~현재)가 그것이다.

대림그룹은 현재 보다 더 원칙에 충실하고 깨끗한 기업상을 구현한다는 각오로 세계적 건설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창조와 도전정신을 불태우고 있다. 지난 1998년부터 ‘지식경영’이란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해 가깝게는 1백년, 멀게는 1천년 기업으로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대림그룹은 1999년 창업 60주년을 맞아 국내 엔지니어링업계를 선도해 온 대림엔지니어링을 합병, E&C 체제를 출범한 바 있다. 또한 석유화학 부문에 있어서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단행, IMF 후 다른 기업들의 모범이 됐다.
앞으로도 핵심역량을 총집결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국가와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초우량 기업의 그 날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겠다는 게 대림그룹의 각오다.

신건용 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7탄> 롯데그룹
한국-일본-미국 잇는 국제적 혼맥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롯데그룹 신격호 가문은 가계도가 비교적 단촐하지만 재계 혼맥은 무시 못할 파워를 지니고 있다. 특히 9명이나 되는 신 회장의 동생들과 그로 파생되는 수많은 조카들의 혼인을 통해 정계 고위층과 혼맥을 맺고 있다. 정·재계의 혼맥이 실로 막강한 셈이다.
롯데가문의 또 다른 특징은 현해탄을 건넌 국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 회장 자신은 일본과, 아들은 미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측의 끈질긴 귀화 요청에도 불구 철저하게 한국 국적을 지키는 한편, 한국에서 얻은 수익을 일본으로 반출하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다.

한·일 양국 아내 맞은 신격호 회장

한·일 양국의 거대 그룹 ‘롯데’를 이끌고 있는 신 회장은 일제시대 때인 지난 1921년 11월3일 경남 울주군 삼남면에서 중농 신진수·김필순(모두 작고)씨의 5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식구를 둔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신 회장은 두 차례 결혼했다. 18세 때인 1939년 같은 마을에 살던 노순화씨를 아내로 맞아들인 게 초혼이다. 이들 사이에 딸 영자씨(롯데백화점 부사장)를 낳았다.
하지만 당시 울산농고를 졸업하고 종축기사로 일하던 그는 9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럼에도 부모로부터 기대할 것이 없어 현해탄을 건너기로 마음먹고 일본행 배편에 몸을 실었다.
반면 신 회장의 일본행으로 1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낸 조강지처 노순화씨는 롯데가문의 장녀인 영자씨(1942년생)를 홀로 키웠다. 그러다가 신 회장이 완전 귀국하기 전인 지난 1960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신 회장은 1945년 일본에서 또 한 명을 배필로 맞았다. 시게미쓰 하츠코씨가 그 주인공이다. 하츠코씨는 롯데월드와 롯데쇼핑 개장식 등에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들 부부 사이엔 두 명의 아들을 뒀다. 신동주 일본 롯데 전무와 신동빈 한국 롯데 부회장이 그들이다.

다국적 혼사 치른 2세들

신 회장의 2세들은 다국적 혼사를 일궈냈다. 장녀인 신영자 롯데쇼핑 부사장은 부산여고와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졸업 후 한국 롯데의 경영에 참여했으며 현재의 부사장직에 올랐다.
신 부사장은 지난 1967년 장오식 전 신학알미늄 회장과 결혼했으나 현재 독신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 부부는 재영-선윤-정안 등 1남2녀를 뒀다. 장남 재영씨는 현재 롯데백화점과 마그넷 등에 인쇄물을 독점 공급해 2백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리는 ‘재영상공’이란 인쇄업체를 운영 중이다.
장녀 선윤씨는 하바드대학 심리학과 출신으로 패션계가 주목하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다. 완벽한 영어 구사와 비즈니스 매너로 해외 명품 CEO를 직접 만나 비즈니스를 성사시켰을 정도다. 그의 남편은 인테리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만 전해진다.
정안씨는 아직 미혼으로 롯데백화점 말단부터 시작, 과장으로 일하며 현재 화장품과 액세서리 파트를 맡고 있으며 온화한 성품으로 교우관계가 좋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 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일본 롯데 부사장은 38살의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지난 1992년 미국 시카고에서 사업을 하는 재미교포 조덕만씨의 딸 은주씨를 아내로 맞이한 것. 신 부사장은 당시 미국 현지법인인 롯데 USA의 부사장을 맡아 일하던 중 현지에서 은주씨와 만나 교제한 끝에 백년가약을 맺었다.
차남 신동빈 한국 롯데 부회장은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조차 비교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의 일본 명문가문과 혼맥을 형성했다. 지난 1985년 일본의 귀족 가문으로 대형건설회사인 다이세이건설의 오오고 요시마사 부회장의 사위가 된 것이다.
아내 미나미씨는 일본 귀족학교인 학습원대학을 졸업했으며, 한때 일본 황실의 며느리 물망에까지 올랐을 정도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재원이다. 이 결혼을 주선한 사람도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였다. 결혼식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일본 총리가 직접 참석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의 롯데 위상을 새삼 확인시켰다.

신 회장의 차남 신동빈 롯데 부회장은
일본 명문가문과 혼맥을 형성했다.

신춘호 농심 회장, 화려한 혼맥 자랑

신 회장 직계 가족의 혼사에 비하면 동생 집안의 혼맥에는 화젯거리가 많다. 첫째 남동생인 신철호 동신 회장은 평범한 집안 출신 송학인씨의 딸 수영씨를 아내로 맞아 슬하에 2남6녀를 뒀다. 이중 장녀 혜경씨의 남편은 부장판사를 지낸 조용원씨, 3녀 미진씨의 남편이 장태규 변호사다.
둘째 남동생인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사돈들은 ‘화려’ 그 자체다. 그는 재산 분할을 놓고 형과 서먹해진 관계를 마치 인맥으로 만회라도 하려는 듯 5명의 자녀를 모두 동부·태평양·조양상선 등 굴지의 재계 가문에 장가·시집을 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신춘호 회장은 부인 김낙양 여사와의 사이에 3남2녀를 뒀다. 장녀 현주씨는 지난 1979년 박남규 전 조양상선 회장의 차남 재준씨(남북수산 전 대표)와 결혼했다. 박 전 회장은 김치열 전 내무·법무장관과 사돈사이다.
그런데 김 전 장관은 서봉균 전 재무장관, 오석락 전 청주지법 원장, 김기홍 전 대법원 판사와 사돈관계에 있다. 또 딸을 김종대 전 대전피혁 사장 집안에 시집보냈다. 김 전 사장은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신덕균 동방유량 명예회장들과 사돈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김 전 장관은 이들 가문과도 다리 건너 사돈이 된다.
장남인 동원씨(농심 부회장)는 지난 1986년 민철호 동양창업투자 전 사장의 장녀 신영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쌍둥이 동생인 동윤씨(율촌화학 사장)는 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진만 동부그룹 명예회장의 딸 희선씨와 결혼했다.
희선씨의 둘째 오빠는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이고 셋째 오빠는 김택기 국회의원이다. 때문에 동윤씨는 이 결혼을 통해 동부그룹은 물론 정계와도 사돈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게다가 동부가문은 이철승 전 신민당 총재와 사돈사이로 롯데와도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된다.
3남 동익씨(농심가 사장)도 만만치 않다. 그의 장인은 노홍희 신명전기 전 사장이다. 아내인 재경씨는 노 전 사장의 장녀이며 영국 대사를 지낸 노창희 전경련 상임고문의 조카이기도 하다. 차녀 윤경씨는 서성환 태평양그룹 회장의 차남 경배씨에게 시집갔다. 신춘호 회장과 서 회장은 친분이 아주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한진가문과도 사돈

신 회장의 셋째 남동생인 신선호 일본 산사스식품 사장은 심정섭 전 민국일보 편집국장의 장녀 정자씨와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동우-동준-유나-이나 등 2남2녀를 뒀다.
넷째 남동생인 신준호 롯데햄우유 부회장은 한순용 전 한대산업 회장의 딸 일랑씨와 결혼, 동학-동식-경아씨 등 2남1녀를 뒀다. 이중 장남 동학씨는 ‘롯데가의 악동'으로 소문난 인물이다. 계속 사고를 치고 철창신세까지 졌던 탓이다.
1994년 ‘프라이드 사건의 폭력’을 시작으로, 2년 뒤인 1996년엔 동거녀와 함께 대마초와 코카인을 흡입한 혐의로 구속됐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그의 파행에 변호사 선임을 해주지 않는 등 가족들조차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반해 여동생들은 1세대임에도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고 있다. 신격호 회장과 많게는 20살 넘게 차이나는 이들 여동생은 신 회장의 사업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난 뒤 결혼한 덕분(?)이다.
셋째 여동생인 경숙씨는 고 박성황 한일향료 사장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장남인 기택씨를 통해 정일영 전 국민대 총장의 장녀 형은씨를 며느리로 맞았다. 또 장녀 기씨는 개인사업을 하는 김영대씨와 결혼했다.
넷째 여동생인 신정숙씨는 최두열 전 치안국장의 동생인 최현열 남경그룹 회장과 부부가 됐다. 이들은 은영-은정-강용-은주씨 등 1남3녀를 두고 있는데 장녀 은영씨는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3남 수호씨(한진해운 부회장)와 결합했다. 또 차녀 은정씨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막내 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차남 동익씨(KCC 전무)에게 시집갔다.
신 회장과 24살 차인 막내 여동생 신정희 동아면세백화점 사장은 경제기획원 출신인 김기명 롯데관광(롯데그룹과 병개) 회장과 결혼했다. 김 회장은 김기형 전 과학기술처 장관의 동생으로 동아면세백화점 등 9개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신건용 기자mailto: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8탄> 한화그룹
단촐하지만 사돈은 '막강파워'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재계 서열 7위 한화그룹의 올해 나이는 52살이다. 지난 1952년 1월 전쟁 중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주가 ‘한국화약’이란 회사를 설립한 게 그 시초다. 화약전문기업에서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을 일궈낸 셈이다.
한화그룹은 이색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10년을 주기로 새 옷으로 단장한다. 1981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취임하면서 2세 경영을 선도했다. 1991년에는 빙그레와 제일화재 분사를 통해 계열분리를 끝냈다. 한국화약이란 사명을 환화로 변경한 것도 이 시기다.
현재 기간산업에서 터를 닦은 한화그룹은 금융과 레저 쪽으로 주력산업 전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대한생명의 인수가 그 첫 신호탄이다. 이를 토대로 한화그룹은 보험-증권-투신을 잇는 막강한 금융계열군을 거머쥐고 있다.

SK-노태우-신동방-호남정유와 사돈

한화가문은 한 마디로 단촐하지만 ‘힘 있는’ 집안과 혼맥을 잇고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김종희 창업주의 자녀들은 모두 권력층 인사들의 자녀들과 결혼했다. 이는 한화그룹의 모기업인 한국화약이 군수산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김 창업주는 부인 강태영 여사와 사이에 2남1녀를 뒀다. 영혜-승연-호연씨가 그들이다. 이들 자녀만 보면 단촐하다는 것 외에는 이렇다할 특징을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사돈집안을 보면 정·관계 주요인사와 사돈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 창업주 생전에 혼사를 치룬 것은 장녀 영혜씨다. 영혜씨는 박정희 정권시절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차남 동훈씨(전 제일화재 회장)를 남편으로 맞았다.
당시 이들의 혼사는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만나 연애결혼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은 ‘사전 교감’에 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창업주와 이 전 부장과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이다. 화약이란 군수산업으로 성장했던 기업의 특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권력 포스트와 가깝게 지냈던 것이 이들의 친분을 이은 것으로 전해진다.
영혜씨와 동훈씨의 혼사는 한화가문이 굵직한 정·재계 가문과 연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는 이 전 부장의 막내아들인 동욱씨가 최종건 SK그룹 창업주의 막내 딸 애정와 백년가약을 맺은 것에서 출발한다.
최 창업주의 조카인 최태원 SK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소영씨를 아내로 맺었다. 또 노 전 대통령의 장남 재한씨는 신병수 전 신동방 회장의 딸 정화씨와 결혼했다. 또 이 전 부장은 서정귀 전 호남정유 사장의 딸을 며느리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한화가문은 이 전 부장을 축으로 SK-노태우-신동방-호남정유와 다리 건너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이동훈 전 제일화재 회장은 1990년대 초반 김 회장이 그룹분할을 할 때 회장직을 맡았다. 1991년 독립하자마자 동양정밀, 동양정보통신을 인수하는 등 정보산업그룹을 꿈궜으나 결국 좌절을 맛보았다. 인수한지 7개월만에 회사가 부도나면서 김승연 회장이 급전을 조달해줬으나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는 회장직을 내놓았으며 현재는 영혜씨만 대주주로 남아 있다.

권력 포스트와 가까워진 김 회장 혼사

장남인 김승연 한화그룹은 회장은 불과 29세 나이인 1981년 그룹 회장직을 승계했다. 당시 최연소 그룹 회장으로 화제가 됐던 김 회장은 미국 드폴대를 졸업한 후 경영수업을 받던 중 지병으로 부친이 타계하면서 회장직을 승계한 것이다. 때문에 김 회장의 결혼은 부친의 공석에서 치러졌다.
김 회장은 부친 타계 후 1년만인 1982년, 서정화 국회의원의 장녀 영민씨를 배필로 맞았다. 영민씨는 김 회장보다 아홉 살이나 연하로 당시 서울대 약대 3학년 재학 신분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어느 유명인사 부인의 중매로 만나 교제 끝에 맺어진 이 결혼은 한화가문을 일약 명문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김 회장의 장인인 서 의원 집안은 정통관료가 많이 배출된 것으로 유명했다.
그의 조부는 서상환 전 법무장관이다. ‘청와대 파견검사 1호’로 유명했던 서정신 전 대검차장(현 변호사)은 그의 친동생이다.
서 의원은 29살에 군수를 지낸 이력을 갖고 있다. 김 회장도 29살에 재계 전면에 데뷔했다. 그는 5공 때 내무장관에 발탁된 데 이어 김영삼 정부시절 내무장관에 올랐다. 김 전 대통령과는 중학교(통영중) 6년 후배다. 게다가 1980년 중앙정보부 차장을 지낸 바 있어 한화가문은 두 명의 정보부 고위층과 사돈을 맺고 있는 셈이다.
특히 서 의원은 5공 시절 사위인 김 회장을 음양으로 도왔고, 김 회장도 장인의 국회의원 출마(13·14대) 때 아낌없는 금전적 지원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5공 시절 한화그룹이 명성그룹과 한양유통을 인수, 당시 재계 안팎으로부터 의혹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차남인 김호연 빙그레 회장의 혼사도 만만치 않다. 아내인 김미씨의 조부가 독립운동가였던 김구 선생이다. 또한 장인은 교통부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김신씨다. 이 같은 인연으로 김호연 회장은 지난 1992년부터 백범선생 기념사업회 임원으로 활동 중이다.
김호연-김미 부부는 연애결혼을 했다. 두 사람은 대학시절(각각 서강대와 이화여대) 처음 만나 교제를 하다가 부부의 연을 만든 것이다. 이 결혼은 한화가문에서 유일한 연애결혼 커플을 탄생시켰다.
한편 김 전 교통부장관의 혼맥을 보면 한상태 전 서태평양 사무처장-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조병준 국제사이언스클럽회장-임송본 전 식산은행 총재-설경동 대한전선 창업주-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김용완 전 전경련 회장-구인회 LG그룹 창업주-허정구 전 삼양통상 회장으로 연결돼 있다.

수재와 정계인사 유독 많아

한화가문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정계인사들이 유독 많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김 창업주는 4남1녀의 형제를 이뤘다. 이중 큰형인 종철씨(작고)는 국민당 총재를 지냈던 쟁쟁한 정치인으로 고향인 천안에서 6선 의원을 역임했다. 한화계열사였던 한국베아링과 태평물산의 회장을 맡기도 했지만 경영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 총재의 장녀인 원옥씨는 신연 한화섬유화학 뉴욕지사 상무와 결혼했다. 김승연 회장과 동갑내기인 신 상무는 센트릴주립대 출신으로 그룹 경영에 간여하는 인물로 꼽힌다.
3남 진연씨는 한화유통계열사였던 써클케이(현 씨스페어스·한유통) 대주주로 있다. 4남 규연씨는 빙그레 계열 불륨회사인 콜럼버스 고문으로 있다가 지난 1999년 1월 중견해운업체인 천경해운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지난해 6월 일선에서 물러났다.
김 창업주의 세째 남동생인 종식씨는 큰형인 종철씨가 작고하자 선거구인 충남 천안을 물려받아 당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또 여동생인 종숙씨는 UC미클릭에서 지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김영일씨와 결혼했다. 김씨는 한화에너지 부사장을 맡는 등 그룹 경영에 참여했었으나 김 회장 취임 후 일선에서 물러났다.
한화가문에 수재들이 많다는 것은 또 다른 특징이다. 집안에 수재가 많을뿐더러 며느리들도 수재를 맞는 행운을 누렸던 것이다. 우선 김 창업주는 일제시대 때 명문이었던 경기공립상업학교(현 경기상고) 출신이다.
김승연 회장은 경기고 재학 중이던 16살 때(1968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미국에선 미네소타주에서 고교과정을 마친 후 멘로대학에서 경영학을 드폴대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했다. 그런가하면 김승연 회장의 부인인 영민씨도 알아주는 재원이다. 서울대 약대를 수석으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또 장남인 동관씨는 미국하버드대 유학중이다.
김호연 회장은 재계가 인정하는 학구파로 알려져 있다. 경기고와 서강대 무역학과를 나온 그는 일본 게이오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유통경제)를 받았고, 서강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게다가 재계 CEO들의 스타디모임인 ‘경영연구회’를 이끌기도 했다.
김 회장의 유일한 매형인 이동훈씨는 중앙고를 나와 연세대를 수료한 후 도미, 플로리다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한편 한화가문의 여인들은 대외활동을 극히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재벌가문이라면 통관의례처럼 여기는 미술관 경영이나 종교사업 같은 대외활동이 서영민 여사나 김미 여사에겐 찾아볼 수가 없다. 대외행사를 굳이 꼽으라면 매년 7월 서울 정동 성공회성당에서 열리는 고 김종희 창업주 추도식 행사에 참석하는 것이 유일하다.

신건용 기자sgy@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9탄> 대성그룹
김성섭 전 대한모방 회장·홍대식 산업은행 부총재와 사돈
 
<대성그룹 고 김수근 명예회장>
<서울도시가스 김영민 회장>
<대구도시가스 김영훈 회장>
<성주인터내셔날 김성주 사장>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대성그룹은 혼사에 있어 그리 방대한 인맥을 자랑한다고 평가받지는 못하고 있다. 김수근 명예회장을 둘러싼 동생 의근과 문근도 화려한 혼맥보다는 조촐하게 안정적인 가문형성에 앞장섰다. 특히 정치권과의 인맥은 재계 가운데서도 손꼽힐 만큼 조용하다.
대성연탄으로 알려진 대성그룹 창업주 김수근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에너지 산업의 산 증인으로 꼽힌다. 그는 우리나라 에너지 발달사와 궤를 같이 하며 대성그룹을 성장 발전시켰다.
해방 직후 연탄 몇 장을 찍어내는 영세한 연탄 제조업자로 출발한 김 명예회장은 석유유통업·도시가스 판매업에 이르는 에너지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1947년 5월10일 직원 4명으로 대구시 북구 칠성동에서 대성산업공사를 창립한 게 오늘날 대성그룹의 모체가 됐다. 대성산업공사는 연탄제조 및 무연탄판매업 시작을 기점으로 출발했다.

정재계 유명인사 없는 ‘소박한 혼맥’ 특징

김 명예회장은 1916년 대구에서 형편이 비교적 넉넉했던 부친 김두윤씨와 모친 손정조씨 사이에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10세 때 부친을 여의면서 가시밭길 인생을 걷기 시작했다. 고학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대구상고에 진학했으나 동생들의 학비와 집안을 이끌기 위해 3학년때 중퇴해 17세의 나이로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연탄공장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김 회장은 1942년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 한국지부 회장인 여귀옥씨와 결혼했다. 김 회장 집안이 독실한 기독교집안이 된 것은 바로 여씨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김 회장은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영대(62)씨와 차남 영민(58)씨, 막내 영훈(52)씨를 두었으며 장녀 영주(56)씨, 차녀 정주(55)씨, 막내 성주(48)씨를 두었다. 이 가운데 장남 영대씨와 차남 영민씨, 장녀 영주씨는 모두 중매로 결혼했다.
김 회장의 사돈들 면면을 살펴봐도 정재계 유명인사와 연결고리를 대놓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장남 영대씨는 현재 대성그룹 회장. 그는 어머니 친구 소개로 1971년 5.16 이후 혁명재판소시절 검사생활을 했던 차영조씨의 딸 정현(55)씨와 결혼했다. 서울대 법학과와 같은 대학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영대씨는 1970년 대성산업의 관리이사 겸 영등포공장의 건설책임자로 입사했다. 영대씨의 부인 정현씨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했다. 영대씨의 장남 정한(33)씨는 대성산업연구개발실 이사로 재직중이다.
차남 영민씨도 친지의 소개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민명옥(48)씨와 1979년에 결혼했다. 명옥씨의 부친은 유화증권 사장을 지낸 민유봉씨. 영민씨는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뒤 현재 서울도시가스(주) 명예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장녀 영주씨는 1975년 의사인 신현정씨와 결혼했다. 현정씨는 현재 개인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두 사람 역시 지인의 중매로 맺어졌다. 영주씨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도미, 크랜부룩미술원에서 미술공부를 한 후 현재 사회사업과 여류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또 대구도시가스 고문 해외업무를 맡아서 활동하고 있으며, 건물 실내장식을 담당하고 있다.
차녀 정주씨는 신학박사로만 알려져 있으며, 막내아들인 영훈씨는 현대 대구도시가스와 경기케이블방송 등을 경영하고 있다.
김 명예회장의 막내딸이면서 영훈씨의 여동생인 성주씨는 현재 패션업체인 성주인터네셔날과 디앤디 두 곳을 운영 중이다. 성주씨는 유학시절 캐나다 현지인과 교제 끝에 결혼에 성공해 현재 12살난 딸과 함께 언니 정주씨와 함께 살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자식농사를 잘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남 영대씨, 차남 영민씨, 3남 영훈씨, 장녀 영주씨가 모두 서울대를 졸업한 것을 비롯, 현재 혼자 살고 있는 차녀 정주씨와 3녀 성주씨도 이화여대 영문과와 연세대 신방과를 졸업한 재원들이다.
차녀 정주씨는 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미시간주립대학을 거쳐 지난 1989년 하버드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3남 영훈씨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미국유학을 마친 뒤, 시티은행 서울지점에서 근무하다가 지난 1988년 대성산업의 본부 관리이사로 입사해 현재 대구도시가스 회장으로 활동중이다.
3녀 성주씨는 연세대를 나와 런던에서 공부를 끝내고 귀국, 성주 인터내쇼날 이사로 패션사업을 벌이고 있다.
김수근가(家)의 혼맥도는 김 명예회장과 같이 대성그룹을 일으킨 두 아우 의근, 문근씨 등의 2세들을 통해서도 비교적 소박한 혼맥도를 그려낸다. 특히 첫째 남동생인 고 김의근 전 대성산업 대표이사 사장만이 비교적 재계 혼맥을 든든히 만들었다는 평이다. 의근씨는 부인 양제선(78)씨와의 사이에 낳은 3남2녀를 모두 혼인시켰다. 김의근 사장은 장남 영준(57)씨를 통해 대한모방 회장을 지낸 김성섭가와, 3남 영목(48)씨의 결혼으로 전 산업은행 부총재인 홍대식가와 사돈관계를 맺었다. 장남 영준씨는 김성섭 전 대한모방 회장의 자제인 김순미(48)씨와 결혼했으며 차남 영봉씨는 김혜옥(44)씨와 혼례를 치뤘다. 현재 영봉씨는 모토닉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으며 대성정기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3남 영목씨는 모토닉 부사장을 맡고 있으며 전 홍대식 산업은행 부총재의 자제인 홍은주(40)씨와 결혼했다.

동생 의근씨 재계혼맥 형성

둘째 동생인 고 김문근 전 대성광업개발 회장도 김정희(78)씨와의 사이에 낳은 4남1녀를 모두 혼인시켰으나, 사돈들 가운데 내로라 하는 정·재계 인사들은 눈에 띄지 않는다.
현재 김 전 회장의 장남 영범(53)씨는 대성광업개발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으며, 차남 영돈씨는 대성광업개발 이사에 재직중이다. 3남 영천(43), 4남 영석(41)은 대성광업개발에서 각각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근씨의 외동딸인 은주(48)씨는 연세대 의대교수인 박영철(54)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대성그룹은 지난 80년도와 90년도까지 김수근 명예회장을 비롯해 김 회장의 두 아우인 의근, 문근씨가 연만한 나이에도 경영일선에서 지휘봉을 잡았었다. 하지만 2001년 김 명예회장의 타계 이후 대성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창업 2세간 분쟁이 심화되기도 했다.
결국 대성산업과 서울도시가스, 대구도시가스의 3개사 분할 경영 쪽으로 결말이 났다. 대성산업은 타계한 창업주 고 김수근 회장의 유언대로 장남인 김영대 회장이 대성산업을, 차남인 김영민 회장이 서울도시가스를, 3남인 김영훈 회장이 대구도시가스를 각각 맡아 분리 경영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김영대 회장측과 영민·영훈 회장측 쌍방이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소송까지 제기, 세간의 질타를 받기도 했다.
또 2세들의 경영권 다툼이 일단락 되고 몇 달 후 또다시 분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 회장의 막내딸인 성주인터내셔날 김성주 회장과 장남인 대성산업 김영대 회장이 유럽의 유명 가죽 브랜드 MCM 사업 관리권을 사이에 두고 벌이던 신경전이 남매간 법정 투쟁으로 비화됐기 때문이다.
한편, 김 회장의 두 아우인 의근씨와 문근씨가 사업에 동참한 시기는 각각 1951년과 1950년으로 대성의 걸음마 단계부터였다. 3형제는 직접 경영일선에서 활동하며 40년 넘게 삼두체제를 유지했다.



에너지 명가의 장남김영대 대성그룹 회장

김영대 대성그룹 회장은 고 김수근 대성그룹 명예회장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경북사대부고를 졸업한 후 서울대 법대 및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배우자인 차정현 여사와의 사이에 정한, 인한, 신한의 세 자녀를 둔 모범적인 엘리트 경영인이자 이상적인 가장이다.
대성그룹은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10대 그룹에 포함되었으나 사세확정보다는 내실위주의 보수적 경영에 치중한 에너지 전문 그룹이다.
고 김수근 명예회장은 50년 간 에너지 사업에만 주력해왔으며 대기만성의 약어인 ‘대성(大成)’에서 그룹 이름을 따왔을 정도로 정도경영을 강조하였다.
이익을 중시한 김수근 회장의 경영철학으로 계열사 평균부채비율이 100%를 밑도는 대성그룹은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신중한 회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대성산업은 부채비율이 60%대로 재무구조가 매우 튼튼하게 짜여지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영대 회장이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것은 작년 11월로 당시 김수근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부터다. 김수근 명예회장 별세 후 대성그룹은 장남인 김영대 회장이 그룹 모회사인 대성산업을 포함하여 대성광업, 대성산소, 대성쎌틱, 대성계전 등의 8개사의 계열사를, 차남인 김영민 회장과 삼남인 김영훈 회장은 각각 서울도시가스와 대구도시가스 계열사를 맡으며 계열사 분리가 이루어졌다.


김은경 기자eli55@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0탄> 삼양그룹
김 창업주, 13명의 2세 혼맥으로 ‘조촐하지만 조용한 혼맥도’ 그려내
 
김상홍
김상하
김윤
김원
김정
삼양사는 지난 3월12일 제53기 주주총회 결과에 따라, 창업주 고 김연수 회장과 2세인 김상홍 명예회장(3남), 김상하 회장(5남)의 뒤를 이어 3세 김상홍 명예회장의 장남 김윤 대표 이사 부회장이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임돼 그룹 경영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김상홍 명예회장과 김상하 회장은 현 직책만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주)삼양사의 창업주 수당 김연수(이하 김 창업주·작고)는 대표적인 민족기업가다. 그는 근대 경제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기도 하며 기업가 가운데 보수적이면서도 검소한 기업인으로도 꼽힌다. 호남 거부의 후예인 김 창업주는 일제하인 1924년 순수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설립해 당시 가장 핍박받던 농민을 위한 사업을 개척했다. 김 창업주가 설립한 삼양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연륜이 오래된 기업 가운데 하나로, 1924년 설립한 농장과 간척사업을 하던 ‘삼수사’가 삼양사의 전신이다.
현재 제당업을 비롯해 폴리에스터섬유, 배합사료, 수산, 축산, 이온교환수지, 견방 등 사업을 추진하는 종합기업인 삼양사(주)는 7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1백대 기업 가운데 하나다. 부분별로 섬유염색 가공업에서는 2위, 음식료 기업 가운데는 11위로 꼽히는 삼양사는 2003년 시가총액 기준 전체 기업 가운데 36위를 차지했으며 2004년 4월 8일 현재 삼양사의 시가총액은 2천4백6억6천만원이다.
김 창업주는 1896년 10월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부친 김경중씨와 모친 장흥고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장남이자 그의 가형되는 사람은 바로 유명한 인촌 김성수다. 당시 김 창업주의 부친은 1만5천석지기의 호남 최대거부였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모친 고씨는 충렬공 고경명의 후손인 제방씨의 딸로 후덕한 성품을 지녔다.

건강하고 알차게 뻗어나간 정·관·재계 혼맥

김 창업주는 이 같은 좋은 집안에서 자라 15세가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하진씨는 광주출신으로 고부군수를 지낸 바 있는 집안의 여식. 결혼이후 그는 일본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최초의 한국인이 됐다.
김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7남6녀로 13명의 자녀들을 두어 후일 거대한 혼맥의 시작을 이끌었다. 아들로는 장남 상준(86), 차남 상협(84), 3남 상홍(81), 4남 상돈(79), 5남 상하(78), 6남 상철(68), 막내 7남 상응(58) 등 7남과 장녀 상경(77), 차녀 상민(76), 3녀 정애(73), 4녀 영숙(70), 5녀 정유(69), 6녀 희경(64) 등의 6녀를 두었다.
이처럼 삼양가(家)는 유교전통의 맥을 이으며 우리나라의 근대 경제사를 주도한 명문가다. 김 창업주의 13명의 자제들은 관계·학계·재계에서 하나같이 성공했다. 이 같이 훌륭한 가문과 높은 사회적 지위에 삼양그룹의 재력이 더해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건강하고 알차게 뻗어나갔다. 그는 7남6녀 13남매의 직계자녀에 손자·손녀를 포함해 모두 48명의 자손을 뒀다. 이 자손들을 통해 삼양사 가문은 정계·관계·학계·언론계·재계·지주·교육계 등과 거미줄처럼 얽힌 방대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정재계 고루 혼맥’ … 아들 하나씩만 그룹 경영 참여키로

90년대 그룹 회장과 모기업 회장을 역임한 상홍씨와 상하씨는 경영을 같이 하던 당시 아들 가운데 하나씩만 그룹 경영에 참여시키기로 합의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들은 합의에 따라 3세 가운데는 상홍씨의 장남 윤씨(51)와 상하씨의 장남 원(46)씨가 현재 삼양사를 이끌고 있다. 윤씨는 현재 삼양사 대표이사 회장을 맡고 있으며 사촌인 원씨는 현 삼양사 대표이사 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 창업주는 4명의 사위들 가운데서도 차녀 상민(76)씨 남편인 이두종(81)씨와 3녀 정애(73)씨 남편인 조석(77)씨를 그룹경영에 참여시켰다. 이두종씨는 1956년 삼양사 과장으로 입사해 이 회사의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가 84년 회사를 떠나 재단법인 육영회 이사장, 전 양영회 이사장, 수당장학회 이사장 등을 겸임했다. 조석(사망)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57년 삼양사에 입사해, 사원·총무부장·경리부장·이사·상무·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전 삼양제넥스 상임고문까지 역임했다. 학계인으로는 5녀 정유씨의 부군 김영국 전 서울대 부총장과 막내 희경씨의 부군인 김성완 미국 유타대학 교수가 있다.
김 창업주의 자녀들은 전반적으로 정재계 고루 혼맥을 이뤘는데 이 가운데 장녀 상경씨와 4녀 영숙씨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자녀들은 화려한 인맥과 화촉을 맺었다. 상경씨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씨와 결혼후 실패해 현재 독신으로 살고 있고, 4녀 영숙씨는 결혼을 하지 않고 미국에서 거주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매지만 진보적 가족 받아들이기 성공

김 창업주는 특히 자녀들의 대부분은 중매결혼으로 짝지었지만 사위와 며느리를 맞는 데서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사위를 고를 때는 가문을 따지지 않고 사람됨됨이와 능력을 위주로 보았고, 며느리는 후덕한 집안출신으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기를 원했다. 특히 사돈가의 위치를 보고 정혼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 그의 직접 사돈 가운데는 정관재계의 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김 창업주의 며느리들 가운데 위로 세 명은 이화여전 출신 등 당시의 김 창업주가 원했던 바로 그 신여성들의 표본이 많았다.
자녀들의 혼맥도를 살펴보면, 장남 상준씨는 당시 집안과 자별하게 지내던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소개로 이뤄져 43년 구영숙씨의 맏딸 연성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상준씨는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조흥은행에 근무할 때였고 연성씨는 이화여전 음대를 졸업한 직후였다. 차남 상협씨는 해방직후 고려대 부교수 시절, 의사 김준형씨의 2남3녀 가운데 맏딸 인숙씨와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인숙씨도 니혼조시 대학을 나온 당시 보기드문 일본 유학 신여성이었는데 상협씨의 도쿄제대 동창 부인의 소개로 만나 연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남 상홍씨는 구 치안본부 재직시절, 집안 침모의 소개로 수원갑부 차준담씨의 2남2녀 가운데 맏딸 부영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영씨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이었다.
4남 상돈씨는 6.25직후 사업가 김유항씨의 딸 용옥씨와 결혼했다. 이 결혼도 유항씨의 친구가 중매를 섰다. 5남 상하씨는 삼양사 설탕공장 설립관계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1953년에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 바로 박상례씨와 혼인을 맺었다. 상례씨는 공무원 출신인 박규원씨의 딸로 김 창업주의 친구가 중매를 섰다.
6남 상철씨는 사업을 하던 우근호 씨의 딸 정명씨를 부인으로 맞았고, 7남 상응씨는 공무원 생활을 했던 권오경씨의 다섯 딸 가운데 셋째딸 명자씨와 결혼했다.

출가한 5명의 딸로 재계 화려한 인맥 형성

김 창업주는 6명의 딸 가운데 ‘독신’을 선언했던 5녀 영숙씨를 제외한 다섯명을 출가시켰다. 이 가운데 장녀 상경씨만 결혼에 실패해 혼자 살고 있어 슬하에 총 4명의 사위를 두고 있다. 차녀 상민씨의 남편은 이종두씨로 삼양그룹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양영회 대표이사 겸 수당장학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온양지주의 아들로 자란 그는 결혼후 삼양사의 경영에 참여하다가 1984년에 은퇴했다. 3녀 정애씨는 교육계에 몸담았던 조종립씨의 아들 석(77)씨와 결혼했다. 석씨는 서울대 상대출신으로 결혼후 삼양사에 입사, 이 회사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역임했다.
4녀 정유씨의 남편은 전 서울대 부총장인 김영국(74)씨로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김덕창씨의 8남매 가운데 3남으로 인천이 낳은 천재로 불리워졌다. 이들은 김창업주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으며 영국씨는 전 서울대 정치학과 총동창회장인 상하씨의 후배이자 매제다.
막내딸 희경씨는 교육자였던 김종규씨의 아들 김성완씨와 결혼,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다. 성완씨는 미국 유타대학 교수로 인공심장 분야의 권위자다.
이토록 김 창업주는 직계가족보다 3세인 손자·손녀들의 혼사를 통해 재계·정계·언론계·법조계 등 고위층에 닿는 혼맥을 이뤘다. 91년까지만 해도 수당의 손녀사위들은 모두 12명이 넘었고 이 가운데 5명의 대학교수, 2명이 의사, 나머지 5명은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처럼 재계 인물들이었다.

3세 ‘혼인’으로 본격적 인맥구도 형성

김 창업주의 장남 상준씨는 3명의 딸을 출가시켜 정관재계 인맥을 형성했다. 장녀 정원씨의 부군은 고려대와 국가대표님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선휘씨다. 축구를 좋아하던 상준씨는 모교인 고려대 축구팀을 지원했는데, 이 일로 선휘씨가 상준씨 집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혼사가 진행됐다. 선휘씨는 상준씨가 당시 고문으로 근무했던 삼양염업사의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차녀 정희씨는 5공시절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진만씨의 맏며느리로 보냈다. 이에 따라 현 동부그룹 회장인 김준기씨를 사위로 맞았다. 3녀 정림씨는 전 문교장관 윤천주씨의 장남 대근(57)씨와 결혼했다. 대근씨는 현재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과 현 동부그룹 부회장 전자부문을 맡고 있다. 상준씨의 두 아들 장남 병휘(58)씨와 차남 범(50)씨 가운데 병휘씨는 현재 한양대학교 자연과학대 자연과학부 수학전공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김 창업주의 3남 상홍씨의 혼맥도 눈에 띈다. 상홍씨는 2남 2녀 가운데 장남 윤씨를 전 서울신문사 김종규 사장의 딸 유희씨와 혼인시켜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과 한다리 건너 사돈이 됐다. 또 차남 량씨를 장지량 고려연초 회장의 막내딸 영은씨와 백년 가약을 맺었다. 특히 영은씨의 오빠 장대환씨는 매일경제 신문 창업주 정진기씨의 사위로, 현재 매일경제신문 대표이사회장 인쇄인 겸 발행인과 현 매일경제TV 대표이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상홍씨는 장녀인 유주씨를 사업가 윤주탁씨의 둘째 며느리로 보내 윤주탁씨와 직접 사돈간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과 둘째형 상협씨의 사돈인 정태섭 전 변호사가와 연결되고 있다. 박태준 전 위원은 현재 포스코 비상임고문으로 등재돼 있다.
이에 따라 정태섭씨는 상협·상홍 두 형제 모두와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유주씨의부군은 윤영섭 고려대 상대교수로 활동했다.
4남 상돈씨는 맏형인 상준씨의 중매로 장남 병진씨를 한홍기 전 축구대표팀 감독의 딸 혜승씨와 결혼시켰고, 차남 영로씨는 사업을 하던 정형식가의 은미씨와 혼인을 맺게 했다. 외동딸 희진씨는 전 대한항공 이사 오명석씨의 외아들 광희(47)씨에게 시집갔다. 광희씨는 전 나이스정보통신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5남 상하씨는 외동딸인 영난(42)씨를 송하철(43)씨와 화촉을 밝힘으로써 송삼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며느리로 보냈다. 이에 따라 남양어망의 홍순기가와도 연결되고 있다.
6남인 상철씨는 의선(41)씨와 형석(38)씨로 1남1녀를 두었다.

삼양사, 빠르지 않지만 꾸준한 성장세

김 창업주는 한편생 생일잔치는 물론이고 육순·칠순잔치도 안했을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었다. 덕분에 2·3세 결혼식도 친지들만이 모인 가운데 조촐하게 치르게 했으며 이같은 생활 철학을 바탕으로 삼양 그룹은 그동안 화려하지 않으나 건실하게, 빠르지는 않지만 멈추지 않고 안정된 신장세를 유지해 올 수 있었다. 1970년대 국가 경제가 고도성장기를 맞아 많은 후발기업들이 기업확장을 꾀할 때, 삼양사는 무리한 확장이나 양적 팽창보다 착실히 내실을 다지며 향상해 왔다. 더욱이 3세들이 경영전반에서 정상급 위치에 올라섰고, 사통팔달의 혼맥을 이루고 있지만 외부의 도움이나 덕을 보려하지 않고 착실한 행보를 유지해와 타 기업들의 귀감이 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삼양그룹은 상홍·상하·상응으로 이어지는 삼양그룹의 2세 경영체제가 원, 양, 윤, 정 등의 3세 오너들의 활동으로 또다시 변화의 시기에 서 있다. 이들의 적극적인 행보를 통한 그룹의 다소 보수적이고 침제적인 경영 체제가 제3·제4의 도약을 맞길 기대해 본다.

김은경 기자 eli55@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1탄> 태평양그룹
개성상인 성품으로 태평양을 반석위로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신용과 근검절약을 밑천으로 하는 개성상인의 체취를 물씬 풍기는 하는 기업인으로 유명한 고 서성환 태평양그룹 창업주(이하 서 창업주·작고)는 ‘미와 향을 파는 마케팅의 귀재’로 화장품 업계의 전설적인 존재로 남아 있다. 서 창업주는 특히 다도에서 나온 신중과 평정의 대명사로도 유명하다.
서 창업주는 뛰어난 마케팅 전략으로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오늘날의 태평양 그룹으로 이끈 반면 자녀들의 혼사에 있어서도 정도(正道)를 걷길 원했다. ‘사람 됨됨이’로 가족을 받아들이는 소신있는 ‘혼사’를 진행하고 싶어했던 것. ‘정관계 발판’을 만들 필요도 없었거니와 ‘정경유착’의 시선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는 게 서 창업주의 측근의 설명이다.
하지만 서 창업주의 2남 3녀들은 대부분은 70·80년대 당시 정재계를 주름잡던 화려한 가문과 백년가약을 맺어 정재계의 다양한 방향으로 혼맥을 뻗어 나갔다.
서 창업주는 1923년 7월 14일 황해도 평산에서 부친 서대근씨와 모친 윤독정씨의 3남 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창성상회·태평양화학 공업사로 출발

서 창업주가 소학교 1학년 시절 때 그의 가족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찾아 개성으로 이주했다. 상인의 도시 개성은 후에 그의 기업경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개성에서의 소년 서성환은 집안에서 운영한 창성상회라는 잡화상을 형들과 함께 도왔다. 창성상회는 당시 인기품목이었던 화장품을 취급했는데, 이는 나중에 서 창업주의 창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서울에 진출한 서 창업주는 한국 최초의 화장품 회사인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창립했다. ‘태평양’이란 상호는 누구나 잘 아는 바다 이름이며, 웅지를 나타낸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태평양화학공업사는 지금의 태평양그룹의 전신인 셈이다. 그는 1966년부터 1978년까지 태평양화학 사장을 지냈으며, 이후 태평양그룹 회장과 태평양돌핀스 구단주(1987~1995), 태평양(주) 대표이사 회장, 태평양종합산업(주) 회장 등을 역임했다. 기업 경영 외에도 대한화장품공업협회 회장, 상장회사협의회 회장, 서울상공회의소 부회장, 대한농구협회 회장, 신탁은행확대이사회 회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한국 경제 및 체육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서 창업주는 이후 국학대학교 정치학과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초기 근면과 신용이라는 개성상인 특유의 성격을 유지해 사업을 일으켜 만든 서 창업주의 최초 화장품으로는 ‘ABC 포마드’ ‘100번크림’ 등으로 태평양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히트작들이다. 특히 그는 도매상을 배제하고 소매상과 직접 거래하는 특약점제도를 도입하고, 미용사원제도, 아모레 아줌마 등 독특한 방문판매 전략을 구사해 한국 화장품 유통에 전기를 마련하는 한편, 태평양을 국내 최대의 화장품업체로 끌어 올렸다. 1958년에는 국내 최초의 사외보이자 여성 교양지인 ‘화장계’를 발간했다. 1979년에는 국내 최초의 화장품 박물관인 태평양박물관을 설립했고, 2001년에는 제주도에 설록차박물관을 개관했다.
1970년대부터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태평양은 제약·식품·보험·증권·전자·금속 등 다양한 사업에 진출했다. 이와 함께 프로야구단까지 인수하는 재력을 과시했다.
태평양그룹은 모기업인 (주)태평양을 비롯해 (주)태평양제약·태평양개발(주)·태평양종합산업(주)·(주)아모스프로페셔날·(주)에뛰드·(주)태평양금속·장원산업(주)·태신인쇄공업(주) 등 10개 계열회사를 보유, 시가총액 1조7천2백97억원으로 화장품 시장에서 43%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그룹 본부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181번지에 있으며, 부속기관으로 화장품과 차 분야의 전문박물관인 태평양박물관이 있다.
그룹의 개인주주로는 서 창업주의 차남 서경배 사장이 26.14 %로 시가총액 4천5백21억원을 보유하고 있으며, 차녀 서혜숙씨가 0.96%로 시가총액 1백66억원, 3녀인 서은숙씨가 0.81%로 시가총액 1백40억원, 기타 심상배씨가 조금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태평양 혼맥 …재계 혼맥도의 중심역할

서 창업주는 1947년 변금주씨와 결혼, 슬하에 송숙(57), 혜숙(54), 은숙(51), 영배(49), 미숙(47), 경배(41)로 2남 4녀를 두어 이들을 모두 성혼시켰다.
서 창업주의 사돈가는 한 마디로 쟁쟁한 집안들이다. 여섯 사돈가 가운데는 김일환 제17대 내무부장관(작고), 최두고(83) 전 국회의원, 정운갑 제13대 농림부 장관(작고), 서봉균 제22대 재무부 장관(78), 김치열(83) 에이오에스 회장(제27대 법무부 장관, 제37대 내무부 장관), 김영생 전 국민당 국회의원, 정재문 현 한나라당 부산 부산진갑지구당 위원장(대양산업 회장), 김도창 전 법제처장(김도창법률사무소 대표) 등 정관계 인사가 8명이며, 언론인은 방우영 현 조선일보 명예회장이 있다. 또 나머지 최주호 전 우성그룹 회장(작고),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박세정 전 대선제분 회장(작고) 등의 여러 기업들과 사돈관계를 맺었다.
서 창업주는 재벌가 혼맥에서 다른 그룹에 못지 않는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현상은 서 창업주 특유의 신중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는 대부분의 자녀혼사를 사람됨됨이를 중시하여 중매 형식을 택한 서 창업주의 성격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돈가의 ‘이름’과 관련해 정략적이라는 세인의 오해를 받기 쉬우나 태평양측은 이를 극구 부인한다. 정계 출신 집안과는 모두 현직에서 물어난 뒤에 맺어졌고, 재계 인사들과는 업무관계에서 전혀 무관하며 대부분 양쪽 집안 가장들의 친분으로 혼사가 이뤄졌다.

서 창업주 세 딸들 … 정관계 가문의 며느리로

숙명여대 무용과 출신인 장녀 송숙씨는 박세정씨의 장남인 내회씨와 결혼했다. 내회씨는 고려대 경영학과와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박사 출신으로 서강대 상경대 학장을 역임했다. 내회씨의 부친인 박세정씨는 대선제분 외에 조흥화학·계동물산 등을 운영한 바 있는 기업가다.
하지만 차녀 혜숙씨는 이화여대 사회생활과 출신으로 김일환씨의 3남인 의광씨와 1974년 결혼했다. 김일환씨는 6·25전쟁 당시 국방차관을 역임한 전형적인 무관출신이자 상공·내공·교통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관료 출신이다. 의광씨는 연세대 정외과 출신으로 태평양 계열사의 장원산업 사장으로 활동했으며, 현 장원산업 회장이다. 의광씨는 4명의 사위 가운데 유일하게 장인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3녀 은숙씨는 국회건설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부산에서 동성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최두고씨의 차남인 상룡씨와 1977년 결혼했다. 상룡씨는 고려대 의대를 졸업하고 은숙씨와 결혼, 미국에서 7년간 수련의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고려대 의대 일반외과 부교수로 활동했다.
막내딸인 미숙씨는 숙명여대 미대 출신으로 최승진 전 우성타이어 대표이사와 결혼, 재벌가 혼사로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승진씨는 부친 최주호 전 우성그룹 회장을 대신해 오늘의 우성을 이룬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아들 조선일보가와 농심가와 사돈

서 창업주의 두 아들인 영배씨와 경배씨의 혼사도 많은 관심을 끌었다. 장남인 영배씨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기 직전에 이미 그룹경영에 참가했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수료한 후 증권회사로 자리를 옮겨 90년도 태평양증권부사장을 시작으로 현재 태평양개발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영배씨는 조선일보 방우영 명예회장의 1남3녀 가운데 장녀인 혜성씨(45)와 1983년에 결혼했다. 혜성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마친 후 조선일보에 입사해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 서씨 집안의 며느리가 됐는데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재원이다.
차남인 경배씨는 1990년 10월, 농심 신춘호 사장의 막내딸인 윤경씨(36)씨와 화촉을 밝혔다. 서 창업주와 신춘호씨는 같은 용산구 관내에서 자주 접해, 평소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자별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이 훗날 사돈으로 연결된 것.
경배씨는 경성고·연세대 경영학과를 마친 뒤 미국 코넬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수제로 91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전무를 비롯해 현재 태평양 대표이사 사장 및 대한화장품공업협회 회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서 창업주의 혼맥도는 이 같은 유력 집안과 연결되면서 재벌 혼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90년대 농심의 신춘호 집안과 연결되면서 박남규 전 조양상선그룹 회장(작고), 김치열 에이오에스 회장(제27대 법무부 장관, 제37대 내무부 장관)과 고리를 맺고 있다. 또 장녀 송숙씨의 시아버지인 박세정 회장을 통해서는 정운갑 전 농림부 장관, 남상진 제24대 재무부 차관(구 서울신탁은행장)과 연결되며, 차녀 은숙씨의 시아버지인 김일환 전 내무부 장관과는 최낙권 전 국회의원, 배영호 전 부산제철사장 등과도 순환 혼맥을 형성했다.
국내 재벌가 혼맥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관련해 태평양 그룹 관계자들은 “절대 정략적인 혼사는 아니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사돈가의 면면을 보면 한결같이 정재계에 영향력이 막강한 사람들이다.
서 창업주는 태평양이 일정궤도에 진입하면서 후계구도를 구축했다.
서 창업주가 타계한 2001년전까지 그는 장·차남을 일선에 내세워 경영수업을 받도록 했다. 그는 장남인 영배씨에게 태평양화학에 입사해 도쿄 및 뉴욕주재 전무를 거쳐 태평양증권, 태평양개발 회장직을 수행하게 했다. 차남인 경배씨는 그룹 기획조정실 전무를 시작으로 경영수업에 참여시켰다.
서 창업주의 개성상인의 특유 기질을 물려받은 두 아들은 현재 태평양 그룹을 그대로 물려받아, 오늘날 30대 그룹 계열에 올라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는 태평양의 면모를 꾸준히 유지해 나갈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김은경 기자 eli55@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2탄> 벽산그룹
2004년 4월 김 창업주 벽산그룹 ‘재기의 꿈’ 이뤄
 
김희철
벽산그룹 회장
김희용
동양물산기업 회장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지난 2002년 워크아웃 졸업후 채권단이 대주주로 있던 벽산건설이 최근 창업주인 고 김인득 회장의 장남 김희철 회장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은 보유중인 벽산건설 지분 68% 중 51%(1천9백30만주)를 주당 5천6백50~5천7백원에 옛 사주인 김희철 회장에게 지난 4월2일 매각했다. 부실 기업이 정상화 작업에 성공해 옛 사주가 회사를 되찾은 셈이다.
이번 경영권 획득을 위해 벽산건설의 계열사인 주식회사 인희가, 채권단이 보유하고 있던 자사 보통주 1천9백32만6천여주를 공개입찰로 매입했다. 이번 주식 양수도는 지난 98년 벽산건설 기업 개선작업 협약 체결 당시 기존 대주주가 경영정상화를 이루면, 대주주에게 주식 우선매수권을 부여하기로 한 약정에 따른 것이다. 부실기업이었던 벽산건설의 경영권이 워크아웃 5년만에 옛 사주에게 재매각된 셈이다.

동양물산, 한국스레트공업이 벽산그룹 전신

김인득 벽산그룹 창업주(작고)는 지난 1991년 9월28일 벽산그룹 창립 40주년 기념식에서 신임회장 취임식을 맞았다. 그는 ‘남 이상 되기 위해 남과 같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18개 계열사 7천여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벽산그룹의 총수가 됐다.
김 창업주는 세 아들을 정·재계 저명인사 가문과 백년가약을 맺게 해 정관계 상류층 혼맥의 중심부에 합류했다. 김 창업주는 1915년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에서 농사를 짓던 부친 김상수씨와 모친 박차련씨 사이의 4남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3수 끝에 명문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마산상업고등학교시절 공부 잘하고 주산과 운동도 잘하는 모범생이었다. 김 창업주는 학교 졸업후 마산금융조합 직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입사 당시 그의 월급은 21원. 그는 이곳에서 9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8천9백원이나 되는 거금을 저축했다. 이후 그는 모은 돈으로 피난시절인 1951년 부산에서 동양물산을 설립해 외국 영화를 수입 공급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벽산그룹의 출발은 여기서 비롯됐다. 이후 그는 곧 서울로 올라와 단성사·반도극장(현 피카디리 극장)·중앙극장 등 큰 극장을 차례로 손에 넣어 전국적인 극장체인망을 구축했다.
1950년대에는 극장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오락시설이 없던 터라 그는 돈방석 위에 앉게 됐고, 1950년대 말에는 흥행업의 왕좌에 올랐다. 1960년대에 접어들어 김 창업주는 흥행업에서 점차 손을 떼고 제조업에 관심을 돌렸다. 그가 1962년 인수한 한국스레트공업은 지금의 (주)벽산의 전신으로 벽산그룹이 건자재 중심의 그룹으로 성장하는 모체가 됐다.
김 창업주가 흥행업에서 제조업으로 옮아가던 시기는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는 이때 ‘안방극장 시대’의 도래를 예감하고 당시 돈자루를 안겨주던 극장들을 과감하게 처분했다. 그가 첫 제조업종으로 선택한 슬레이트는 당시 쉽게 부서진다고 ‘비스킷’이라 불릴 정도로 질이 형편없어 슬레이트 업체들은 수요부족으로 도산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유망성이 없어 보이던 슬레이트 산업도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농어촌 지붕개량 사업이 펼쳐지면서 호황을 맞았다. 김 창업주는 슬레이트 생산을 토대로 건자재 중심의 사업에 매진, 벽산그룹을 일궈냈다.

기독교 바탕 … 세 아들 모두 정재계 고위층과 백년가약

김 창업주는 마산상업학교 재학시절 지주 윤두박씨의 딸 현의씨와 결혼해 장남 희철(67), 장녀 숙희(64), 차남 희용(62), 3남 희근(58), 차녀 연숙(55)의 3남2녀를 두었다. 아내 윤씨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고 이에 따라 김 창업주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됐다. 특히 장남인 희철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홀몸으로 미국에 유학가면서 김 창업주의 신앙심도 깊어갔다. 김 창업주는 1982년 부인과 사별하고 4년간 혼자 지내다가 1986년 주위의 권유에 의해 전에 자신의 비서였던 박윤자씨와 재혼했다.
김 창업주는 세 아들 희철, 희용, 희근씨를 모두 정재계 고위층 가문에 장가들였다. 두 딸 숙희씨와 연숙씨도 각각 한의사 집안과 치과의사 집안에 시집보냈다.
1966년 장남 희철씨는 전 삼양통산 허정구 명예회장의 딸인 허영자씨와 화촉을 밝혔다. 영자씨(작고)는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미국 노스웨스턴대학에서 불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재원이었다. 김 창업주는 허정구 가문과의 혼사를 통해 럭키금성(현 LG그룹)을 비롯, 현대·삼성 등 대재벌 창업주 가문과 혼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던 1972년, 박 대통령의 형 박상희 가문에서 둘째 며느리를 맞아 권력의 최상층부까지 혼맥을 이어놓았다. 둘째며느리, 즉 희용씨의 부인 박설자씨(59)는 박대통령의 질녀이자 현 자민련 대표의원 김종필씨의 처제다. 이에 따라 희용씨와 김종필씨는 동서지간이다.
김 창업주의 셋째 며느리는 이소형씨(56)로 당시 메트로호텔 이건형 사장(현 전 메트로호텔 대표이사)의 누이동생이다. 이 혼맥은 우성식품·삼환기업·샘표식품 등과 연결된다.
김 창업주의 큰딸 숙희씨는 대구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던 정규만씨 가문에 출가했다. 둘째딸 연숙씨는 치과의사 원희목씨의 둘째 며느리가 됐다. 연숙씨의 남편 원영종(57)씨는 무역업체인 천마교역 사장이다. 둘째 사위 원영종씨는 결혼후 벽산그룹 계열사인 인희산업(현 (주)인희)의 전무까지
승진한 뒤 독립해 지금은 계측기 업체인 화인계기 대표이사 사장이다.
정재계 저명인사들과 이리저리 연결되는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동생 김인동 가문에 의해 더욱 보강된다. 인동(77)씨는 박 대통령 비서실 실장을 지낸 김계원씨와 친동서간이고, 전 서울신문 사장 김종규씨와는 사돈간이다. 인동씨는 외동딸 은숙씨(47)을 김종규씨의 며느리로 시집보냈다. 인동씨는 장녀 은숙씨(47), 장남 희준(46), 차남 희태(44)씨의 2남1녀를 두었고 이들의 혼사를 통해 김봉제 한국트랜스 대표이사 사장과도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정계 혼맥 때문에 ‘곤혼스럽기도’

벽산그룹과 김 창업주는 정계 핵심부와 연결되는 혼맥 때문에 덕을 보기도 했지만 곤욕을 치른적도 많았다. 벽산이 농어촌 지붕개발사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본 것이나, 제일제당을 뿌리치고 국영기업인 대한종합식품을 인수했던 것은 모두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씨가 권력의 정상에 있던 1970년대 상반기에 있었던 일이다. 벽산그룹은 김종필씨가 설립한 운정장학재단을 맡아 관리하기도 했다.
때문에 벽산그룹은 ‘권력의 비호 속에 급성장하고 있다’거나 ‘김종필씨의 정치자금줄’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이에 따라 정변이 발생할 때, 특히 김종필씨가 수세에 몰릴 때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벽산그룹은 10·26 이후에만 두 차례나 혹독한 세무사찰을 받았다. 그러나 혐의가 발견되지 않았다.
김 명예회장은 그룹규모가 커지고 자신의 나이가 늘어감에 따라 세 아들을 차례로 경영에 참여 시켰다. 이들은 한결같이 경기고를 졸업한 뒤 미국 대학에 유학했다.
1971년 장남 희철씨는 제일스레트 사장으로, 차남 희용씨는 한국스레트 대리로 입사했고, 3남 희근씨는 19079년 한국건업 중동본 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벽산그룹 창립 40주년을 맞아 제 2대 회장에 오른 김 창업주의 장남 김희철 회장은 국내 최초의 공학박사 출신 재벌총수로 평가 받았다. 그는 미국 퍼듀대학에서 기계학(학사)과 경영학(석사)를 공부한 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원자력공학 석사, 퍼듀대학에서 원자력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김 회장은 학업을 마친 뒤 3년간 미주리-롤라대학에서 조교수로 일하다가, 정부의 해외 우수두뇌 유치에 의해 과학기술처 1급 연구조정관으로 초빙되어 국내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2년간 근무하다 1971년 10월 벽산그룹에 합류하여 20년간 부친 밑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김 회장은 부친으로부터 회장직을 넘겨받기 전에 (주)벽산을 비롯, 한국몰티션, 벽산니또보, 대한아이소플라소트 등 주로 건자재를 생산하는 계열사를 맡아 경영했다.
김 회장은 아내 허영자씨와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두었으며 장남 성식씨(38)와 차남 찬식씨(36)는 현재 벽산건설에서 각각 구조본 전무와 외주자재담당 상무 등으로 활동하면서 경영수업을 하고 있다.
김 명예회장의 둘째아들 희용씨는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후, 연세대 법정대 2년을 수료한 뒤 미국 인디애나주립대 상과대학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971년 벽산그룹에 입사한 이후 벽산그룹 기획감사실장을 거쳐, 한국건업 사장, 인희산업 사장, 동양물산 사장, 벽산그룹 부회장을 거쳐 2001년부터 동양물산기업 회장으로 재직중이다.
셋째아들 희근씨는 1979년 한국건업에 입사한 이후 7년 동안 중동본부장으로 근무했다. 이 기간은 국내 건설업체들이 중동지역에서 매우 고전하던 시기였는데, 희근씨는 비싼 대가를 치르며 건설업체의 생리를 익혀나갔다. 그는 벽산건설 및 벽산개발, 벽산엔지니어링 등 건설관련 계열사들의 사장직을 겸했다. 하지만 희근씨는 최근 김 회장을 통해 주식매입으로 벽산건설의 경영권을 찾았지만, 당시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활동했던 희근씨의 경우 워크아웃 당시 부실경영의 책임을 물어 벽산계열사의 경영에서 모두 손을 떼기로 했다.

김 창업주와 세 아들 …기독교 정신으로 기업 이끌어

김 창업주의 세 아들이 벽산그룹에 합류하기 전에는, 강민구씨를 비롯한 창업공신들이 그룹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김 창업주의 전 부인 윤현의씨의 친정집안 식구들과 김 창업주의 마산상고 후배들도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었다. 이들 초기 공신들은 김 창업주의 세 아들을 비롯한 신진세력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지금은 대부분 그룹을 떠났다.
김 창업주의 두 남동생과 조카들은 애초부터 벽산그룹에 깊이 간여하지 않았고, 그나마 김 창업주의 세 아들이 실세로 등장함에 따라 모두 벽산 그룹을 떠나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막내동생 인동씨만이 인희산업 재산인 서울 중앙극장을 임대 경영하고 있다.
김 창업주는 ‘하나님의 재산을 관리하는 청지기로서의 기업인’임을 강조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이다. 그는 벽산그룹을 이끌어 오면서도 지난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에는 한국기독실업인회 회장으로서 미국정부의 주한미군 철수계회을 철회시키기 위해 민간외교를 펼치기도 했고, 개신교 교파들의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릴 수 있도록 지원하기도 했다.
벽산그룹은 90년대초 서울역 앞, 용상구 동자동 125번지에 그룹 신사옥 ‘벽산 125빌딩’을 짓고 창립 40주년을 맞아 준공식을 가졌다. 이에 따라 벽산그룹은 2세 경영체체를 구축함과 동시에 ‘동자동시대’를 개막했다.
2대 회장이지만 우여곡절을 겪고 최근 다시 한번 재도약의 기회를 맞은 김 회장은 50살이 훌쩍 넘은 벽산건설을 아버지 시대의 화려한 전성기를 꿈꾸며 사업을 이끌 계획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김 회장이 앞으로 벽산 그룹을 어떻게 이끌어갈지, 또 그의 두 아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얼마나 벽산그룹의 재도약을 준비할지 지켜봐야 겠다.

김은경 기자 eli55@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3탄> 쌍용그룹
서울·영·호남 두루 사돈관계 … 팔도혼사
 
장남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
2남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
3남 김석동
잇츠티비 회장
장녀 김인숙
전 국민대학 교수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지난 3월부터 쌍용건설 매각작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쌍용그룹의 오너 일가가 쌍용건설을 인수, 재기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쌍용건설 매각은 한국자산관리공사 등 채권단이 매각 결정을 한데 이어 매각주간사 선정을 마치는 수순으로 진행될 계획이다. 쌍용건설은 옛 쌍용그룹 계열사 가운데 오너였던 김석원 전 회장(쌍용양회 명예회장) 일가의 지분이 가장 많다. 재계에서는 김석원·김석준(쌍용건설 회장) 형제 등 옛 오너일가가 쌍용건설을 통해 재기에 성공할지 주목하고 있다.
쌍용건설은 쌍용그룹 고 김성곤 창업주 일가의 마지막 보루다. 현재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창업주의 장남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 일가 등이 대략 5%의 지분을 보유중이다. 나머지 계열 기업의 경우 지난 98년 이후 감자 등의 과정을 거치며 오너일가 지분이 거의 사라졌다.
쌍용자동차는 이미 중국의 란싱그룹이 인수 우선협상 대상자로 지정돼 실사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며 쌍용양회조차 채권단이 주식으로 전환 가능한 전환사채(지분 55% 해당)를 다량 보유하고 있는 데다가 일본의 태평양 시멘트가 20%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김석원 명예회장도 보통주 기준 2% 안팎의 지분을 가졌으나 대세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이외에 쌍용해운, 쌍용자원개발, 쌍용머티리얼, (주)쌍용 등의 대부분 계열사는 김 명예 회장의 지분이 미미해 실질적으로는 절연 관계다. 현실적으로 그래도 옛 쌍용그룹 오너일가가 건질 만한 기업은 쌍용건설밖에 없다는 평가다.


여의주를 둘러싼 두 마리 용의 승천 … 김성곤 창업주

쌍용건설의 최대주주는 자산관리공사(38.75%)지만 우리사주조합이 20.07%를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는 채권금융기관이 19% 안팎을,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과 쌍용양회 등이 7.7%를 각각 보유중이다. 쌍용그룹이 해체 수순을 밟기 전 쌍용건설은 김석준 회장 몫으로 분류됐다. 이에 따라 김 회장은 워크아웃 상태에서도 쌍용건설을 맡아 지난해 매출 1조 3백여억원, 순익 6백억원의 우량회사로 살려놨다. 이에 따라 쌍용건설이 매각될 경우, 되사고 싶은 욕심은 많지만 지분을 모두 사들일 형편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형인 김석원 명예회장은 예우차원에서 쌍용시멘트 명예회장으로 있을 뿐 자금력은 없는 상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채권단으로부터 우선매수청구권을 확보한 우리사주조합이 지분을 더 사들이고, 김석준 회장이 또 일부 주식을 매입하게 되면 현 김석준 회장 체제가 지속될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쌍용건설 우리사주조합은 매각시 지분매입에 나설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지난해 말부터 외국 건설사의 인수소문이 나도는 등 인수의사를 내비친 기업들 사이에서 쌍용건설이 쌍용그룹으로 거듭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을 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쌍용그룹의 모태는 1939년 성곡 김성곤 창업주가 설립한 소규모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 이후 1948년 고려화재해상보험(주)와 금성방직(주)를 잇달아 설립하며 사세가 확장됐다. ‘쌍용(雙龍)’이라는 명칭이 회사 이름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62년 쌍용양회(주)를 설립하면서부터다. 쌍용양회를 설립할 당시 김성곤 창업주는 공장부지인 강원도 영월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을 주목했다. 전설에 따르면, 영월군 서면 쌍용리의 쌍용굴에 두 마리 용이 살고 있었는데 승천을 위해 천년간 정진하다 하나의 여의주를 받았다. 그러나 두 마리 용은 서로 여의주를 양보하다 결국 모두 승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옥황상제는 감동해 또 하나의 여의주를 내려보냈고, 결국 두 마리 용 모두 승천하게 되었다는 것.

‘가문보다 사람됨됨이를 중시’

김성곤 창업주는 이 전설에 감화돼 전설 속의 쌍용을 회사 이름으로 따왔다. 이때부터 기업의 이름을 하나 둘씩 쌍용이라는 이름으로 통합, 쌍용그룹이 탄생했다.
성곡 김 창업주는 자신의 표현대로 ‘고삐 풀린 말’처럼 하고 싶은 바를 성취하고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62년의 생을 마감했다. 대구에서 상공은행 행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던 그는 사업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정치인으로 언론인으로 사회사업가로 정열을 불태웠으며, 유도 8단이던 그는 체육진흥에도 열의를 보였던 체육인이었다.
김 창업주의 생활신조는 “술을 마실 때는 남보다 먼저 취하지 말 것, 상대방의 말을 많이 들을 것, 돈 무서운 줄을 알 것, 모든 사람에게 깍듯이 친절할 것”이다.
특히 김 창업주의 성품과 다양한 경력은 6남매의 혼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사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소규모 운수업자로부터 의사, 기업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다른 재벌 그룹의 혼맥과는 달리 화려하지는 않다. 가문보다 사람됨됨이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혼맥의 특징이라면 서울과 영·호남을 가리지 않고 두루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쌍용그룹은 전국 각지에 공장과 시멘트 사일로를 갖고 있다 해서 스스로 팔도강산그룹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혼사 역시 팔도혼사인 셈이다.

영·호남 두루 사돈관계 형성

김 창업주는 경북 달성군 현풍에서 부친 김광도씨와 모친 김봉옥씨의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25세때인 1937년 포항 영흥 공민학교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18세의 김미희씨와 결혼했다. 김 창업주는 슬하에 인숙(66), 의정(64), 석원(60), 의령(56), 석준(52), 석동(44)의 3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 2세 가운데 위로 두 딸과 장남만 김 창업주 생전에 결혼했다.
김 창업주는 먼저 둘째딸인 의정씨를 출가시켰는데 의정씨의 배필은 전북도립병원장을 지낸 고 이관호씨의 차남인 이승원씨(72)다. 그는 90년대 쌍용그룹 부회장, 쌍용제지 상임고문 등을 역임했다. 이화여대 음대를 졸업한 의정씨는 23세때 당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섬유연구소실험실 부실장이던 승원씨와 결혼했는데, 김 창업주가 승원씨를 사윗감으로 맞아들인 데는 승원씨의 형인 고 이승보씨가 다리를 놓았기 때문이다. 승보씨는 동양통신 전무, 언론인 등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대한통신 시절부터 김 창업주의 총애를 받았다. 승보씨는 금성방직을 경영하고 있던 김 창업주를 만날 때마다 당시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다니던 동생 승원씨에 관해 얘기를 해 김 창업주가 미리 사윗감으로 점을 찍었다.
김 창업주의 장녀인 인숙씨(전 국민대학교 사회과학대 사회과학부 사회학전공 교수)는 국제사이언스 클럽 회장이었던 조병준씨의 장남 해형씨(71)와 1964년에 화촉을 밝혔다.
해형씨는 현재 나라기획 회장, 나라홀딩 회장, 나라엔터프라이즈 회장으로 재직중이다. 결혼 당시 인숙씨는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한 후 뉴욕대학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미국 체류 중이었고 해형씨는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책임연구원이었다. 인숙씨 부부가 보스턴에서 결혼할 당시 신랑측 가족대표로 참석한 장예준씨는 조병준씨의 처인 고 장화순 여사의 조카다. 조병준씨는 호남비료 부사장 등을 역임했었고 김 창업주와 사돈관계를 맺은 후 쌍용양회 사장과 회장, 고려화재 회장 등을 지냈다.
김 창업주의 셋째 딸인 의령씨는 1971년 숙명여고를 졸업한 후 인테리어디자인 등을 공부하고 미국에서 소규모 인테리어 사업을 직접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창업주의 장남 석원씨(60)는 엄한 가정교육 속에서 자라나 엘리트교육을 받고 순탄한 성장가도를 걸었다. 개인적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시련도 겪어야 했다. 석원씨는 첫부인과 결별한 뒤 1981년 박문순씨와 결혼했다. 부산여고와 수도여사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부산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문순씨는 친척의 중매로 석원씨를 만나게 됐다. 결국 부자 2대에 걸친 교사와의 혼사가 이뤄진 셈이다. 문순씨는 소규모 운수업을 경영하던 박남표씨의 3남 3녀 가운데 장녀다.
김 창업주의 둘째아들인 석준씨(쌍용건설 대표이사 회장)는 1977년 한국해외수산 회장으로 있던 이봉래씨의 2남2녀 가운데 장녀인 인실씨(50)를 배필로 맞았다. 인실씨는 미국 캐리포니아대학 음대 출신. 석준씨와 인실씨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석준씨의 모친과 인실씨의 모친이 불교선도회에서
만나 자녀들의 혼사를 얘기하다가 자연스럽게 성혼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막내아들인 석동씨는 1986년 미국 웨슬리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후 보스턴은행에 근무한 한준희씨(43)와 4년 간의 열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쌍용투자증권 부장, 굿모닝증권 대표이사 등으로 활동했던 석동씨(현 잇츠티비 회장)는 결혼 당시 조시타운대학 대학원에서 외교학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시티뱅크에서 근무 중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난 석동씨는 1983년 브라운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시절 웨슬리대학에 다니던 준희씨를 만났다. 준희씨의 부친은 미국 미네소타대학과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 사무처장 등으로 활약했던 한상태씨다.

조촐한 혼맥도 이면엔 각 그룹 및 전·현직 대통령가와 연결

김 창업주의 2세 결혼과정에서 나타나듯 김성곤 가문의 사돈들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첫째 사위 나라기획 조해형 가문을 추적해 보면 전 상공장관인 장예준 가문, 전 식산은행(현 산업은행) 총재였던 임송본 가문, 대한전선 설경동 창업주 가문, 대농의 박용학 가문, 국제그룹의 양정모 가문, 경방의 김용완 가문을 만나게 된다. 이에 따라 김용완 가문과 연결되는 럭키금성그룹 구인회 가문을 만나면서 역시 김성곤 가문의 혼맥도 여러 단계를 거쳐 내로라 하는 국내 각 그룹 및 전·현직 대통령 가문과 연결된다.
김 창업주의 혼맥도가 단출하듯 가계도 또한 단출하다. 6남매의 2세 가운데 3녀 의령씨가 결혼을 안해 김 창업주로부터 출발한 가계는 직계 2세와 친·외손 포함해 모두 27명에 불과하다.

쌍용그룹과 함께한 김석원·김석중 형제

장남 김석원씨는 국민학교 3·4학년을 일본에서 다녔고 서울고등학교와 서강대를 거쳐 미국에 유학했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석원씨는 미국 유학시절 매달 송금되는 50달러의 빠듯한 학비 때문에 유학 6년 내내 시간당 1달러 짜리 접시닦이도 했다. 그는 경영을 맡은 이후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당시에 받은 세금계산서를 소중한 교훈으로 간직하고 있다.
석원씨는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브랜다이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 4학년 1학기만을 마친 채 그룹 경영을 위해 급히 귀국했다. 석원씨는 선대 회장으로부터 대권을 물려받을 당시 다섯 개에 불과하던 계열사를 90년대 국내 22개, 해외 21개로 늘리기도 했다. 그룹 매출액도 60배로 성장시켜 국내 재벌 랠킹 6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석원씨는 또 회장 취임 이듬해인 1976년부터 정유·중공업·건설·증권·자동차 등 현재 그룹 주력 기업으로 자리하고 있는 각종 계열사를 설립했거나 인수, 왕성한 의욕을 보였다. 특히 용평스키장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추진, 어느 계열사보다 애착을 갖기도 했다.
석원씨는 대권을 이어받은 후 원로들의 자문을 받아 창업공신에 예의를 갖추면서 퇴진시켰다. 바로 이러한 무리를 삼가면서도 조속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시키고 있어 재벌 2세 가운데 모범생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IMF이후 워크아웃 절차를 밝게 되면서 많던 계열사의 지분도 점점 쇠약해져 쌍용그룹이라는 위상은 많은 쇠퇴했다. 실질적으로 쌍용그룹의 면모를 잇고 있는 기업은 쌍용건설뿐이며 이마저도 매각대상에 놓여있다. 최근 석원씨는 쌍용 등기이사를 사퇴, 명예회장 신분만 유지하고 있다. 쌍용양회에서 마지막까지 유일하게 갖고 있던 공식 직함인 등기 이사에서도 물러난 것. 쌍용양회는 지난 4월19일 개최된 주주총회에서 석원씨가 2002년부터 유지해 온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 경영일선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고 밝혔다. 석원씨는 이름뿐인 명예회장 신분만 유지하게 됐다. 석원씨는 일본 태평양시멘트가 출자한 2000년부터 지분이 줄어들어 현재 1.96%의 지분만을 갖고 있으며 등기이사 유지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이사직을 사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석원씨의 두 동생 석준·석동씨는 90년대 건설과 증권부분에서 석원씨를 보필했다. 이들 3형제 가운데 석원·석준 두 형제는 모두 해병대를 제대했다. 석원씨는 훈련 과정이 힘들기로 유명한 해병대에 1970년 유학생활을 마친 뒤 바로 지원 입대, 월남의 최전방에서 생활했고, 석준씨도 1970년 지원입대했다.
특히 둘째 동생인 석준씨(쌍용건설(주) 회장)는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 졸업했으며, 1994년 쌍용그룹 총괄 부회장을 시작으로 형의 사업을 돕기 시작했다. 이후 1995부터 1998년까지 쌍용양회공업(주)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고 현재 쌍용그룹(쌍용건설)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

김은경 기자 eli55@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7탄> 한보그룹
91년 수서사건 위기 넘긴 경험으로 한보철강 인수 호소
 
한보그룹 사옥 역할을 했던 은마아파트 상가 전경.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경영에 실패한 재벌총수의 재기는 가능한가?
한국기업사에서 수많은 기업과 기업인들은 성공과 실패, 좌절과 재기를 되풀이해 왔다. 몇 차례의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는 기업인들도 주변에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재벌로 불렸던 기업들의 재기를 기대하는 재계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그동안 국내 서열 50대 기업으로 분류됐던 숱한 재벌그룹들이 단 한 차례도 이같은 질문에 ‘Yes’라 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서사건 재기 성공 이어질까

재벌그룹의 부도는 곧 파산으로 이어졌다. 창업세대의 성공과 2세 대물림에 의한 실패. 1백%는 아닐지라도 부도의 길을 걸은 재벌그룹들은 하나같이 이 같은 공통점을 남겼다.
그렇다고 부도재벌들이 재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지난 IMF를 전후로 쓰러진 재벌그룹들이 재기를 위해 뛰고 있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지난 5월20일 오후 2시 예전 한보그룹 사옥이었던 서울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에 정 전 총회장이 얼굴을 드러냈다. 7년여만이다. 그는 이날 81세라는 고령이 무색할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재기의욕을 피력했다.
정 전 총회장이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는 사업은 한보철강 경영권의 재탈환이다. 한보그룹 비자금 사건으로 지난 97년 부도와 함께 경영권을 잃었던 한보철강을 되찾음으로써 재기에 성공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재기의욕은 과거 한차례 성공을 거두었던 경험이 있기에 한층 더하다.
정 전 총회장은 지난 91년 2월 수서사건으로 경영권을 잃을 뻔한 위기를 한차례 겪었다. 권력핵심부를 포함한 정치권을 일거에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었던 이 사건은 검은돈을 앞세운 로비로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대표적인 정경유착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뇌물공여죄로 구속됐던 정 전 총회장은 3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비도덕적인 기업의 해체라는 여론에도 그는 엄청난 추가금융지원을 받으며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때문에 이번에도 한보철강 인수와 함께 건재를 과시하려는 꿈을 정 전 총회장은 꾸고 있는 것이다.
정 전 총회장이 내세우고 있는 한보철강 경영권 재탈환의 명분은 정치적인 사건으로 부도가 났으며 자신도 이에 상응하는 벌을 지난 7년 동안 받았다는 데에 있다. 특히 한보철강을 설립했기에 현재의 부실과 정상화 방법도 가장 잘 알고 있다면서 자신이 인수하는 게 당연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장남 정종근
차남 정원근
3남 정보근
4남 정한근
“한보철강 정상화 나밖에 없다”

그는 기자회견장에서도 “한보철강의 입지선정 과정에서부터 모든 열과 성을 다했기 때문에 한보철강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면서 “한보철강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확신이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보철강 부도의 직접 책임자로서 그동안 채권자와 국민경제에 고통을 안겨준 데 대해 심각히 반성하고 있으며 이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길은 당진제철소를 종합 완공해 부채 원금이나마 돌려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며 감성에 호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 전 총회장의 이 같은 재기집념에도 채권단과 철강업계, 그리고 여론의 시선은 싸늘하다. 국가적인 경제위기의 단초를 제공했던 IMF를 촉발시킨 한보철강의 옛 사주가 다시 경영일선에 나선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게다가 차입금을 조달해 이의 재탈환을 꿈꾸고 있다는 데 대해 어불성설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 전 총회장이 한보철강 인수를 위해 구성한 컨소시엄은 ‘보광특수산업’. 한보철강만 인수하면 총부채 6조1천억원 중 3개월 내에 외자도입을 통해 우선 5천억원을 상환하고 3년 내에 추가로 1조원을 갚을 계획이라는 것이다. 또 나머지 4조6천억원은 향후 16년간 균등 상환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정 전 총회장은 지난 4월 예비실사 대상업체 선정에 이어 5월25일 마감된 입찰제안서 접수에서도 자격미달로 입찰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회사정리법(221조)에 따라 부도를 일으킨 임직원은 입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이와 관련 보광특수산업 이용남 사장은 “현재 청와대 당국에 진정서를 보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지게 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라며 “차후 입찰과정을 지켜보고 대책마련에 나설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보철강 매각은 6월중 우선협상 및 예비협상대상자를 선정하고 이후 본실사와 가격협상 등을 거쳐 오는 8월9일께 본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매각이 완료될 예정이다.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신화

이처럼 과거와 달리 정 전 총회장의 재기를 가로막고 있는 직접적인 요인은 시대변화라는 게 재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그는 과거 법과 상식이 통하지 않았던 수많은 일들을 벌였다. 정관계 로비나 언론플레이 등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힘이었다. ‘로비의 귀재’라는 별명이 지금도 그를 따라다니는 것은 이에 연유하고 있다.
말단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51세의 늦은 나이에 창업해 10여년 만에 재계랭킹 50위권에 진입했던 쾌속성장은 이 같은 그의 특출난 로비력과 깊은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자녀의 결혼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사업과는 동떨어진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했다. 또 사돈들과는 거의 접촉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렇다고 며느리들에 대해 마뜩찮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정 전 회장은 평소 며느리들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결혼 후 2년 동안은 꼭 함께 살았던 그는 며느리들이 골라주는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즐겨 입고 맸던 한편 아무리 바빠도 이들과 자주 대화를 즐겼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 전 총회장은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빈농인 부친 정용석씨와 모친 황맹옥씨의 1남1녀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집안 탓에 초등학교만을 다닌 그는 부두노동자 등으로 힘든 소년기를 보내야 했다.
정 전 총회장에게는 모두 3명의 부인이 있다.
26세 되던 1949년 결혼한 김순자씨(사망)가 첫 번째 부인이다. 결혼 후 세무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부산경남지역 일선 세무서에서 하위직인 주사보로 일하다 한국전쟁 후 조그만 운수사업도 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한 채 포기해야 했다.
첫째 부인의 사망으로 정 전 총회장은 서울로 거처를 옮겼고 여장부란 말을 들었던 이수정씨를 만나 재혼했다. 이때 정 전 총회장의 나이 38세, 이수정씨의 나이 23세였다.
부인 이수정씨는 남편이 큰일을 하게 될 사람이라 믿었고 결국 70년대초 일제시절 폐광이 된 강원도의 몰리브덴광산을 사들여 이를 수출하는 한보상사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그의 밑천은 부인이 모아놓은 곗돈 1백만원과 27평짜리 집을 담보로 얻은 2백만원 등 모두 3백만원이었다.

사업의 파트너 둘째 부인

결국 정 전 총회장이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고 또 성공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알려주고 터준 이가 두 번째 부인 이수정씨였던 것이다.
특히 이씨는 남편 이상으로 사업에 열의를 보였던 것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정 전 총회장은 몰리브덴수출이 성과를 거두자 주택사업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한보주택의 모태가 된 서울 구로동 아파트 신축사업 당시 이씨는 몸페를 입고 일꾼들의 새참을 날랐으며 은마아파트를 건설할 때에는 운영자금을 구하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녔다. 또 암으로 입원해 있으면서도 회사 일을 챙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 전 총회장도 이씨를 만나서면서부터 인생이 달라졌다고 믿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83년 부인 이씨가 암으로 타개하자 경기도 김포의 부인 묘소를 호화분묘라는 비난에도 5~6개월에 걸친 모역조성작업을 통해 화려하게 치장했다. 그만큼 부인 이씨에 대한 정 전 총회장의 애정이 각별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훗날 첫째 아들을 제치고 셋째 아들이 한보그룹 회장에 취임한 것도 부인 이씨를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그만큼 둘째 부인 이씨는 정 전 총회장에게 사업의 동반자였고 그룹의 자금원이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정 전 총회장의 셋째 부인은 이영자씨로 결혼식은 당시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1984년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한보가 효성으로부터 인수한 한인골프장(현 태광골프장)에서 골프장을 휴장시키고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주례로 거행됐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딸이 태어난 이후 오랜 별거생활로 이어졌다.

통혼보다는 사업적 인맥 풍부

정 전 총회장은 이들 3명의 부인과의 사이에서 4남2녀를 두었다. 지금은 사망한 장녀 희자씨를 비롯해 장남 종근씨, 차남 원근씨, 3남 보근씨, 4남 한근씨, 그리고 차녀 윤지씨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첫째 부인에게서는 희자씨와 장남 종근씨를, 둘째 부인에게서는 차남 원근씨와 3남 보근씨, 4남 한근씨를 두었고 셋째 부인에게서는 차녀 윤지씨를 얻었다.
그러나 정 전 총회장 자녀들의 결혼에서 특이한 혼맥도는 찾아지지 않는다. 평범한 통혼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사업가 이영운씨와 환일고 교장을 역임한 김예환씨, 제일병원과 우신향병원 의사였던 김승훈씨가 정 전 총회장의 사돈들이다.
첫째 며느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그러나 환일고 교장을 역임한 김예환씨의 막내딸인 둘째 며느리 은영씨는 영국 왕립음악학교 로열아카데미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음악도로 알려져 있다. 특히 4년간의 연애끝에 결혼에 성공한 원근씨와 은영씨는 현대산업개발 정몽규 회장이 중매로 이루어졌다. 원근씨와 친구인 정 회장이 영국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던 은영씨를 원근씨에게 소개했던 것이다.
정 전 총회장도 이들이 연애하고 있던 시기 영국으로까지 가서 은영씨를 만났고 매우 흡족해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을 독촉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정 전 총회장에 이어 한보그룹의 대권을 이어받았던 3남 보근씨는 아버지를 빼어닮았다는 평과 함께 정 전 총회장의 사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수정씨의 아들로 끔찍한 애정을 받으며 자랐다. 정 전 회장의 부인은 김정윤씨로 손윗형인 원근씨의 장인인 김 교장의 중매로 결혼했다.

두 번의 정경유착 대형사고 재벌

이처럼 단촐한 정 전 총회장의 혼맥도는 ‘로비의 귀재’라는 명성이 무색할 정도다. 때문에 한보그룹은 통혼보다는 정 전 회장의 정관계 실력자들과 여러 형태로 맺었던 관계에 재계의 관심이 집중됐다.
대표적인 실력자는 정 전 총회장의 세 번째 결혼식 주례를 섰던 신현확 전 국무총리과 역시 결혼식 축하케이크를 잘랐다는 홍성철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다. 또 광업공사 사장시절의 김복동 전 국회의원, 하키협회장을 맡으면서 알게 됐다는 박세직 전 서울시장과 장병조 전 청와대비서관을 비롯해 5공 시절 대한노인회 중앙회관을 건립, 기증한 것이 인연이 됐던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인이며 대한노인회장을 역임한 이규동씨가 그들이다. 특히 이규동씨와의 인연은 정 전 총회장을 군관계의 실세와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돼 사업에 활용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건설부, 서울시, 국세청 출신들로 짜여진 관계 출신 인사들의 잇따른 영입은 한보그룹의 로비력을 대변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보주택 사장을 역임했던 강병수(전 서울시 올림픽준비단장), 한보탄광 사장을 역임한 박형원(전 관악구청장), 류기동 전 건설부 주택국장, 이병주 전 전남국토관리청장, 전 경우 전 건설부 국립지리원장, 한보상사 사장을 역임한 우장현(국세청 출신) 등이 여기에 속하는 인물군이다.
한보그룹의 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됐던 사업은 역시 주택사업이었다. 서울 구로동에 1백72가구를 지어 분양에 성공한 정 전 총회장은 이후 삼아건설을 인수, 한보주택으로 바꿔 본격적인 주택사업에 뛰어들었다. 매년 규모를 늘려나갔던 한보주택은 77년 급기야 1천3백30가구를 분양하며 대형업체로 발돋움했다. 3백만원으로 시작한 사업이 4년만에 20억원으로 불어난 것도 이같은 주택사업의 번창 덕이었다. 특히 78년 한보주택은 전자금을 몽땅 털어넣은 이른바 ‘올인전략’으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4천4백24가구의 은마아파트를 건설, 분양에 나섰고 때마침 불어닥친 부동산붐을 타고 수천억원의 돈이 가만히 앉아있는 정 전 총회장의 손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이 자금을 밑천으로 정 전 총회장은 84년 금호철강을 인수, 오늘날 재기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고 있는 한보철강을 설립하게 됐다.
한창 급성장했을 때 한보그룹의 재계 랭킹은 30위권으로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86년을 기점으로 한보그룹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철강을 제외한 대부분의 업종에서 적자를 면치 못했던 한보그룹은 감량경영과 계열사 처분 및 합병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놓고 회생을 노렸다. 이때 훗날을 기약하며 정 전 총회장은 택지개발예정지구로 고지될 것 같은 녹지를 미리 사들였고 탁월한 로비력을 동원해 이를 택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추락하던 한보그룹은 다시 되살아났지만 이 같은 변칙적인 그의 사업행태는 91년 수서사건으로 폭발하면서 치명타를 입었고 97년 다시 비자금사건으로 재계에서 퇴출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저무는 ‘로비시대’의 한보그룹

정 전 총회장과 한보그룹을 말할 때 가장 유명한 일화는 그룹 사옥이 없다는 것이다.
“목수가 자기 집을 지으면 망한다‘는 말을 곧잘 했던 그였던 만큼 한보그룹의 사옥은 은마아파트 상가 건물 몇 개층이었다.
또 그는 관상가·점술사·스님 등의 조언을 받으며 사업을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무공무원을 그만두고 강원도 탄광을 인수하며 사업가의 길을 걸을 때도 그는 역술인의 예언을 따랐다. 자신의 이름을 태준에서 태수로, 종로1가의 정씨종친회 사무실이 명당이라는 이유로 로비의 장소로 사용했던 것은 모두 이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특히 90년말 그룹 제2의 창업으로 내선 한보철강의 아산만철강단지 건설공사의 착공일도 어느 스님이 정해준 12월29일을 고집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7년만에 은마아파트 상가 건물의 옛 사옥을 찾아 재기를 꿈꾸고 있는 정태수 전 한보그룹 총회장. 그의 주특기라 할 수 있는 ‘로비’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현재 전혀 가능성이 보이지 않은 한보철강 경영권 재탈환이라는 그의 야심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행보가 주목된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8탄> SK그룹과 최종건 창업주
내부정비 통한 최태원 회장 친정체제 강화로 부정적 이미지 근절 꾀해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SK그룹은 요즘 내부정비 중이다. 지난해 분식회계와 비자금 사건으로 손길승 회장이 구속 수감되는 한편 외부 세력으로부터 경영권 위협까지 받는 등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시련기를 겪어야 했던 SK그룹으로서는 당연한 조치라 할 수 있다.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최태원 회장의 친정체제가 구축돼 이를 한층 공고히 하고 있는 SK그룹은 최근 빠르게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최 회장 체제에 걸맞는 내부정비작업에 돌입한 것이다.
최 회장도 활발한 행보를 보이면서 오랜 기간 경영수업을 충분히 받았음을 과시하려는 듯 젊은 총수로서의 원숙미까지 보여주며 활동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강화되고 있는 최 회장 체제

올들어 SK그룹의 변화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지배구조 개선. 노무현 대통령의 재벌개혁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 지배구조개선은 지주회사격인 SK(주)를 통해 현실화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SK(주)는 오는 2008년까지 단계적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한다. 그 내용은 올해 ▲이사회 과반수 사외이사 구성 ▲사외이사 후보 추천 자문단 구성 ▲투명경영위 신설 등을 실시한 뒤 오는 2006년에는 2단계로 사외이사 비율을 70% 이상으로 확대하고 이사평가위원회를 신설키로 했다. 또 3단계인 2008년에는 실질적인 경영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의 이사회 체제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적 기업현실에서 사외이사 수를 70% 이상으로 늘리고 경영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투명경영위를 신설키로 한 것은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분식회계와 비자금 사건을 통해 SK그룹의 투명경영이 한층 강조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SK(주)의 개선안에 대해 재계에서는 진일보한 내용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같은 지배구조개선안을 앞세워 소버린의 경영권 탈취를 막아낸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체제로 빠르게 전환했다. 그동안 SK그룹을 이끌었던 많은 전문경영인들을 하나둘씩 퇴진시키고 새로운 체제를 선도할 대규모 인사를 단행하기도 했다. 내부 자리이동과 승진에 이어 최근에는 외부에서의 신선한 피를 수혈하는 등 뉴SK플랜에 의한 인사는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인사 통한 조직 재정비

최근 SK그룹에 영입된 인사들의 면면과 그들이 담당하게 될 신설 조직을 보면 최태원 회장의 경영방향이 어느 쪽으로 설정돼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어 특히 흥미를 끈다.
SK(주) 사장 직속조직으로 신설된 윤리경영실 실장(부사장)에 현직 검사인 김준호 서울 고등검찰청 부장검사가 선임돼 회사 윤리규범 시스템 구축과 내부감사, 투자회사에 대한 감사 등의 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30대 여성 변호사 출신으로 올 1월 영입된 강선희씨는 법률자문역 상무로 청와대 법무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근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여기에 JP모건증권의 한국 리서치 총책임자로 일했던 이승훈 애널리스트는 지난 3월 IR(투자자 관리) 담당 상무로 영입됐다. 그리고 4월에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서 국제 거시금융 실장과 세계지역연구센터 소장을 지낸 왕윤종 박사가 SK경영경제연구소의 경제연구실장(상무)으로 스카우트됐다.
그룹의 입이라 할 수 있는 홍보총괄 조직인 기업문화실장도 교체돼 전경련 국제경제실장·홍보본부장과 금호그룹 홍보실장 등을 지낸 권오용씨를 불러들였다.
이같은 인사는 지배구조 개선과 투명경영으로 조직문화를 변화해야 한다는 필요성에서 최 회장이 직접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룹을 이끌어갈 야전사령관과 참모조직을 정비한 최태원 회장은 지난 5월말 그룹의 성장동력을 제시하고 본격적인 경영가동에 나서고 있다. 불확실성이 높아져 가는 미래 경영환경에 대비하고 국가 성장동력을 기업차원에서 개발하기 위해 연구개발 분야를 대폭 강화해 나가자게 최회장의 방침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
신덕균 동방유량 창업주
서봉균 전 재무부 장관

그룹 투자전략 설정,미래경영 나서

최 회장이 설정한 투자영역은 SK그룹이 에너지 화학과 정보통신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에너지 안정적 공급 ▲차세대 정보통신 서비스 ▲생명과학 기반구축이다.
에너지 안정적 공급 과제는 환경친화적이며 효율이 높은 에너지와 대체 에너지 개발은 물론 성공도가 높은 자원개발법 등을 연구하여 국가경제 회복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차세대 정보통신 서비스는 현재 IT코리아를 선도해 국가 성장엔진이 되고 있는 점을 감안해 유비쿼터스와 디지털 융복합화 추세에 맞춰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 고 부가가치형 고용창출 및 수출기반산업 역할을 확대하기 위한 과제다.
또한 생명과학 기반구축 분야는 투자회수 기간이 길지만 기업차원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육성시킬 수 있는 미래 수종사업인 점을 감안한 과제로 국내외에서의 연구개발을 강화하기로 했다.
특히 이를 구체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연구인력과 연구소 등의 인프라 구축을 기업 정책의 최우선 실천 과제로 삼기로 하고 각 계열사별로 연구에 필요한 인프라를 시급히 확충해 나가기로 했다.
이처럼 그룹의 경영방향을 제시하기에 앞서 최 회장은 SK(주) 대덕기술원과 울산공장 등 지방사업장을 4차례나 방문한 한편 중국 북경의 SK차이나 사무실을 방문, 직원들을 격려하는 등 ‘현장경영’을 실천하기도 했다. 또 신입직원 및 신임 임원들과의 대화, 신임 차장 교육 등 직원들과의 접촉도 강화한 한편 오는 8월에는 해외 기업설명회에도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

과거의 발전모델 폐기

재계에서는 최 회장 친정체제가 구축되고 있는 요즘 SK그룹이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경영방향을 설정하고 있다는 평을 내놓고 있다. 지난 비자금 사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과거 정치권과의 유착에 의한 기업발전모델을 폐기했다는 게 그것이다.
사실 SK그룹은 공기업 인수에 의한 발전을 거듭해 왔다는 따가운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 데 공기업 인수가 절대적이었던 데 따르고 있다.
그러나 지난해 비자금사건과 소버린의 경영권 위협 등의 대형 사건을 치루고 난 후 들어선 최 회장 체제는 아직 평가가 유보되고 있긴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다. 때문에 최 회장이 내세고 있는 뉴SK플랜도 과거의 발전모델 폐기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동안 공기업 인수에 의한 SK그룹의 성장동력은 혼맥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현직 대통령과 통혼을 했고 이전에는 권력 최고 실세와 혼사를 맺었던 데 따른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노태우 전 대통령과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일컫고 있다.
1988년 9월 최태원 회장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맏딸 소영씨를 부인으로 맞이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권력과 재벌의 결탁’이라는 정경유착의 표본으로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한 시선은 싸늘했다. 그러나 최 회장의 부친이었던 최종현 전 회장은 의외로 담담해 했다.
이와 관련 최 전 회장은 ‘정략결혼’이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통령이어서 사돈을 맺자고 했던 것이 아니었고, 또 대통령이라고 해서 굳이 사돈을 맺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배우자 선택은 당사자 스스로 하는 것이지 자식들을 정략의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대통령과 사돈을 맺는 것 자체가 정경유착은 아니다. 권력과 금력을 가진 사돈끼리 부정한 방법으로 무슨 일을 도모할 때 비로소 정경유착이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믿으려 들겠느냐. SK그룹이 정경유착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은 이제부터의 일이다. 여러분이 앞으로 지켜보기 바란다.”
실제 두 사람의 결혼은 본인들의 의사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85년 최 회장은 미국 시카고대학 경제학과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당시 민정당 대표위원이었던 노태우씨의 장녀 소영씨를 만났다. 이들을 테니스장에서 처음 만나 3년만인 1988년 청와대 영빈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현직 대통령과 통혼

최 전 회장 부부가 며느리를 처음 대한 것은 결혼 1년 전인 1987년 인사를 오겠다고 해 최 회장의 모친인 박계희씨가 미국으로 건너가 며느릿감을 만났다. 이후 최 전 회장도 미국 출장길에 소영씨를 저녁식사에 초대, 대면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 회장의 부친 최종현 전 회장은 슬하에 2남1녀를 두었다. 그러나 장남인 최 회장을 제외하곤 자녀들을 평범한 샐러리맨과 결혼시켰다.
차남인 재원씨는 당시 여의도고등학교 영어교사였던 채희경씨의 맏딸 서영씨와 결혼했다. 또 고명딸인 기원씨는 당시 SK그룹 계열사였던 (주)선경정보시스템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준일씨와 결혼했다. 이들의 결혼은 최 회장이 중매를 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선경마그네틱의 기획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최 회장은 선경경영정보시스템 구축을 위해 준일씨와 업무적으로 접촉하면서 급기야 여동생을 소개, 결혼에 이르게 했다.
이처럼 개인의 의사가 존중됐던 결혼에는 최 전 회장의 일관된 원칙이 그대로 적용됐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 전 회장은 세 자녀의 혼사를 허락하면서 “본인들의 뜻이 그러하고, 데려올 사람의 됨됨이가 되었으니 만족한다”는 말을 매번 했다고 한다.

단촐하지만 화려한 혼맥도

SK그룹은 현 최태원 회장이 3대 회장이다. 따라서 부친인 최종현 전 회장은 2대 회장이었다. 즉 최종현 전 회장이 창업주가 아니라는 뜻이다.
SK그룹의 창업주는 최종현 전 회장의 맏형이었던 최종건씨다. 그러나 1973년 예기치 못한 타계로 44살의 최종현 전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자녀들이 워낙 어렸기 때문이었다.
최 전 회장의 형제는 4남4녀. 이들은 30여 국내 권문재가와 직간접적으로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SK그룹의 혼맥도를 풍성하게 한다.
맏형인 최 창업주가 이후락 전 중앙정보장과, 동생 종욱씨가 조효원 전 서울대 교수와, 종관씨가 김연준 한양대 전 이사장과 각각 사돈관계다.
최 창업주는 슬하에 3남4녀의 자녀를 두었다. 윤원, 신원, 정원, 혜원, 지원, 예정, 창원의 자녀가 그들이다.
이 가운데 두드러진 통혼은 여섯 째인 막내딸 예정씨의 결혼으로 맺어진 사돈이다. 예정씨의 시아버지가 바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것이다. 최 창업주와 이후락씨는 5.16 이후부터 친형제 같은 우애를 이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최 창업주가 예정씨를, 또 이후락씨가 막내아들 동욱씨를 낳은 후 양가 부모간에 일찌감치 통혼키로 약속이 이루져 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최 창업주의 장남인 윤원씨는 조달청 국장 출신의 김이건씨의 딸 채헌씨와 결혼했다.
SK그룹의 혼맥 자체는 비교적 단촉한 편이다. 그러나 사돈의 사돈을 연결하면 전직 대통령이 2명, 전직 국무총리가 1명, 전직 장관급이 7명, 대기업 오너가 15명이나 등장하는 방대한 혼맥도가 그려진다.
대표적으로 최 회장의 부인인 소영씨의 오빠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가 신덕균 동방유량 창업주의 손녀인 정화씨와 혼인함에 따라 최종현→노태우→신덕균→김종대→김치열→서봉균→조효원→최종욱가에 이르는 순환혼맥이 형성된다. 즉 신 창업주의 부인 김영자씨가 김종대 대전피혁 창업주와 남매간이며 김 창업주는 김치열 전 내무장관의 둘째딸 영경씨의 시아버지다. 또 김 전 장관의 막내딸 혜림씨는 서봉균 전 재무장관이 맏며느리이며 서 전 장관은 조효원 전 서울대 교수와 사돈관계인 것이다.

다가오는 그룹의 계열분리

최근 재계에서는 SK그룹의 미래에 대해 LG그룹과 같이 두 개의 지주회사를 통한 세포분열을 전망하고 있다. 이는 최 회장이 SK그룹 창업주의 직계가 아니라는 데에서 제기된 전망이다. 즉 최 회장의 부친인 최종현 2대 회장이 맏형인 최종건 창업주로부터 위임받았기 때문에 적자는 최 회장의 사촌들이라는 점에서다.
그러나 최 창업주의 자녀들 가운데 장남 윤원씨는 이미 고인이 됐고 둘째인 신원씨와 막내인 창원씨만이 SK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을 중심으로 분가할 것이라는 예상을 재계에서는 하고 있다.
이와 관련 최신원 SKC 회장은 지난 5월31일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SK그룹 분가를 형제들과 논의하겠다”고 밝혀 주목을 받았다. 최종건가와 최종현가의 분리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그동안 SK그룹은 양가의 분리는 있을 수 없다며 계열분리를 부정해 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최태원 회장과 최신원 회장이 SK(주)와 SK케미칼을 중심으로 각각 독자적인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결국에는 계열분리가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그러나 당장은 SK그룹의 분리보다 친정체제를 강화하며 경영일선에 나선 최태원 회장이 홀로서기에 성공하느냐에 재계의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대한민국은 새로워지고 있다”는 SK텔레콤 이미지 광고와 같이 최 회장 체제의 SK그룹이 과거의 틀을 벗고 투명경영을 앞세운 새로운 경영에 소프트랜딩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정곤 기자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19탄> 효성그룹
조홍제·성제 두 형제의 자녀 결혼 통해 화려하고 방대한 사돈관계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최근 효성그룹 오너 3형제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3세로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그룹안팎의 각종 정지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는 분석도 쏟아지고 있다. 특히 이들은 잇따라 효성의 지분을 늘려가고 있어 이같은 분석에 힘을 보태고 있다.
효성그룹 조석래 회장의 세 아들이자 대주주인 조현준 전략본부 부사장과 조현문, 조현상 경영전략 전무와 상무가 그들이다. 이들은 5월에만 수 차례에 걸쳐 보유지분을 대폭 늘렸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3형제의 약진

장남인 조현준 부사장은 5월들어서만 6만9천4백10주를 매수하는 등 지난 3월말부터 5월10일까지 27만7천4백36주(0.84%)를 추가매입, 현재 그의 지분율은 6.29%에 달한다. 둘째인 조현문 경영전략 전무도 4월과 5월 두달에 걸쳐 50만주 이상을 매입해 지분율이 5.98%에 이르고 있다. 셋째 조현상 경영전략 상무의 경우에도 지난 5월12일과 13일 3만6천3백50주를 매입하는 등 꾸준히 장내매입을 통해 5.88%의 지분율을 기록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들 삼형제의 지분매입은 안정적인 경영권 승계를 위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직 삼형제 모두 40세가 되지 않은 어린 나이라는 점에서 후계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전망은 성급하다. 특히 삼형제 가운데 누가 그룹회장직을 물려받을 것인가 하는 예측 역시 아직은 이르다.
그러나 엇비슷하게 확보해나가고 있는 이들의 지분율은 조 회장이 낙점하지 않았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 또한 나오고 있다. 즉 누군가가 합법적으로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미리부터 자기자금과 조 회장으로부터의 증여자금 등으로 주식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향후 한꺼번에 물려받았을 경우 증여세 부담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특히 그동안 효성그룹 오너 삼형제는 보유하고 있던 해외신주인수권(BW)이 경영권 승계를 위한 특혜라는 참여연대 등의 비판을 받고 전량을 소각해 버려 장내에서 합법적으로 지분을 늘리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처럼 효성그룹 삼형제의 지분율 높이기와 경영권 승계에 대한 재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해 둘째 조현문 전무의 결혼식은 이들 삼형제에 대한 또 다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재벌2세의 결혼이라는 것과 함께 이를 계기로 이들 형제가 경영에 참여하기 이전 독특한 활동을 했음이 각종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던 것이다.

며느리 직접 고르는 전통

먼저 조 전무의 결혼에 대한 관심은 신부가 불을 지폈다. 신부인 이여진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영어 통역을 맡고 있는 대통령 의전비서관실의 외무관이다. 이여진씨는 조 회장 부부에 의해 며느리로 낙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부모와 며느리의 첫 만남은 지난 2001년 6월 한미재계회의 연례회의 석상에서였다. 당시 로펌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여진씨는 이 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해 우연찮게 조 회장 내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러나 시어머니와는 칵테일을 나누고, 시아버지와는 가볍게 인사를 했던 정도였다.
인연은 두 번째 만남에서부터 본격화됐다. 6개월여 뒤인 2002년 1월 하와이에서 개최된 한미재계회의에 참석한 조 회장 부부는 또 다시 이여진씨를 만나 2박3일을 함께 했다. 그리고 조 회장이 직접 나서 “성실해 보이고 매너 좋아 보인다”며 둘째 아들에게 소개를 한 것이다. 이때가 방학이었고 마침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이여진씨와 조 전무의 첫 만남도 이루어졌다.
조 회장이 며느리를 예쁘게 봤던 데에는 이여진씨의 아버지도 한몫을 담당했다. 조 회장과 이여진씨의 아버지가 서로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또 셋째 조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
송인상 전 재무장관
노태우 전 대통령
홍재선 전 전경련 회장
원용석 전 경제기획원 장관

현상 상무와 이여진씨의 오빠가 연세대와 브라운대에서 함께 공부한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조 전무의 형인 조현준 부사장은 동생보다 2년 앞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국내가 아닌 미국 명문 사립학교인 세인트 폴 고등학교에서 식을 치뤘던 탓에 동생처럼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조 부사장의 부인은 이미경씨로 이희상 한국제분 회장이 부친이다. 이미경씨는 뉴잉글랜드 음악원을 졸업하고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막내인 조현상 상무는 아직 미혼이다.

사돈들 대거 그룹경영에 영입

효성그룹의 창업주는 고 조홍제 회장. 그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의 동업으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중도에 결별하고 효성물산을 창업, 오늘날 효성그룹으로 키워냈다. 만우(晩寓)라는 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56세에 기업을 창업했지만 결코 어리석지는 않았음을 생전 곳곳에서 보여주었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늦게 시작했던 그는 결혼만큼은 빨랐다. 고 조 회장은 15세 때 진주 명문호족인 성균관 생원 하세진씨의 둘째딸 정옥씨와 결혼을 했다. 고 조회장보다 1살이 많았지만 이미 할아버지에 의해 일찌감치 정해진 결혼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방식의 혼사는 조현문 전무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효성그룹 오너 일가의 결혼 대부분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을 알 수 있다. 즉 고 조 회장의 자녀 3남2녀 모두가 본인들 의사에 앞서 부모의 뜻에 따른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이에 따라 효성그룹의 혼맥도는 고 조 회장과 동생 조성제 전 대전피혁 사장의 2세를 통해 송인상, 김종대, 홍재선, 원용석 가문으로 연결된다. 특히 세 아들을 통해 국내 재계 혼맥도의 중심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고 조 회장의 장남이었던 조석래 회장의 당초 꿈은 교수였다. 때문에 결혼보다는 학업에 더 열중했고 이를 보다 못한 고 조 회장이 송인상씨의 1남4녀 가운데 3녀인 광자씨를 며느리로 맞이했다. 송인상씨는 재무장관, 수출입은행장을 두루 거친 경제계의 거물로 사돈을 맺기 이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송인상씨가 조 회장을 사윗감으로 눈여겨 보고 있었고 고 조 회장에게 혼담을 넣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사돈관계인 두 사람의 친분은 더욱 깊어져 송인상씨가 효성그룹 경영에까지 참여하게 된다. 동양나이론 회장을 거쳐 현재는 효성 고문으로 재직하고 있다.

“며느리 소개해 달라”

효성그룹의 혼맥도는 송인상씨를 사돈으로 맞이하면서 이봉서 전 상공장관, 신명수 신동방 회장과 연결된다. 송 고문의 장녀 원자씨가 이필석 국제화재 전 명예회장의 장남인 이 전 장관과 결혼했으며 차녀 길자씨가 신 회장과 결혼한 것이다.
형님보다 일찍 결혼한 차남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은 법조계 원로인 홍긍식씨의 4남4녀 가운데 차녀인 문자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또 막내인 조욱래 동성개발 회장은 당시 경기여고 교장이었던 손영경씨의 중매로 이화여대 2학년에 재학중이던 김은주씨와 결혼했다. 조석래 회장과 친분이 있었던 손 교장은 “경기여고 졸업생 가운데 참한 색시감이 있으면 막내며느리로 소개해 달라”는 청을 일찌감치 받아놓고 있었다. 이에 김은주씨를 추천한 것이다.
농림장관과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을 역임하다 효성기계공업 회장을 지낸 김종대씨가 부친이다. 또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의 처남이기도 하다.
세 아들보다 일찍 결혼한 두 딸은 고 조 회장이 고향인 경남 함안의 군북에서 농협조합장을 하고 있을 때 모두 그 인근의 대지주집안으로 출가를 시켰다.
큰딸 명숙씨는 진주여고를 졸업한 후 21살 때 진양 대지주인 허복씨의 5남7녀 가운데 차남인 정호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들의 결혼 당시 정호씨는 세브란스의전 학생이었다.
둘째딸 명률씨는 산청의 대지주인 권동혁씨의 3남1녀 가운데 장남인 병규씨와 결혼했다. 병규씨는 성균관대를 졸업한 후 자영업을 하다가 1967년 효성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효성건설 회장을 역임한 후 농장을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려하고 방대한 혼맥

효성그룹의 혼맥도는 고 조 회장의 다섯 자녀의 통혼과 함께 고 조 회장의 동생인 조성제씨를 통해 한층 무게를 더한다. 조성제씨는 형님이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동업을 하던 시기에 대일수출용 고철수집 총책으로 형님사업을 돕다가 후에는 대전피혁을 인수하기도 했다.
5남3녀의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조성제씨는 재계와 관계의 거물 인사들을 사돈으로 맞았다. 3남 경래씨가 전경련 회장을 지낸 홍재선씨의 딸 애수씨와 결혼했고 4남 익래씨는 원용필씨의 딸 정선씨와 결혼했다. 원용필씨는 경제기획원 장관을 지낸 원용석씨의 친형이다. 원용석 전 장관이 훗날 한국타이어와 동양나이론 등 효성그룹 사장을 영입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혼맥에 기인했다.
또 조성제씨의 장녀 장숙씨는 서울시장을 역임한 정종철씨의 아들 창순씨와 결혼했다.
효성그룹 혼맥도의 출발점이기도 한 조홍제·성제 두 형제의 자녀 결혼을 통해 화려하고 방대한 직간접적인 사돈관계가 형성된다. 직접적인 사돈으로 각계의 명망가와 연결되며 전직 대통령 가문과도 두 다리만 건너면 관계를 맺게 된다. 즉 삼성·현대·LG·SK·두산·해태·신동방·대한제분·국제화제보험 등 내노라 하는 국내 재벌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혼맥도에 등장하는 기업인은 19명, 전직 대통령은 물론 학계인사와 대지주까지 포괄하고 있다.
특히 효성그룹 혼맥에서 전직 대통령 가문과 연결고리가 되고 있는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 가문과는 송인상·김종대 가문과 함께 순환고리를 이루는 겹사돈임이 드러난다. 고 조 회장과 직접사돈관계인 김종대씨가 신덕균 전 신동방 명예회장의 처남이고 송인상씨는 신 회장과 다시 사돈관계인 것이다.

“재산분배는 빠를수록 좋다”

효성그룹은 그동안 국내 재벌그룹에서 볼 수 없었던 여러 특징들을 갖고 있다. 고 조 회장이 56세에 기업을 창업해 20년만에 재계 서열 10위권으로 성장시킨 것도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일천했던 창업주들의 학력과는 달리 고 조 회장은 정규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며 늦게까지 공부하던 인텔리였다는 점도 특이하다.
여기에 창업주 생존 당시 일찌감치 2세 3형제에게 그룹을 분가시킨 것도 다른 그룹들과는 다르다. 이는 고 조 회장이 이병철 회장과 동업을 하며 ‘식구끼리라도 재산분배는 빠를수록 좋다’는 교훈을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정곤 기자mailto:기자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0탄> 동양그룹
슬하에 오직 두 딸만 둬 사위들에 의한 최초의 재벌경영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은 국내 재벌그룹의 사위경영시대를 연 첫 주자다. 현 회장 이후 여러 기업에서 사위들이 CEO에 오르기도 했지만 여전히 재벌총수라는 자리에 앉은 이는 현 회장이 유일하다. 그만큼 현 회장의 재벌총수로서의 이력은 타 그룹총수들과는 분명하게 구별된다.

최초의 사위 재벌총수

현 회장을 가리켜 소리없이 실속을 챙기는 기업경영인으로 평가한다. 활발한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내실을 챙기는 스타일이라는 의미다. 최근 TV드라마에서 흔히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재벌가 딸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고, 이어 기업경영권을 차지하는 톡톡 튀는 능력의 남자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그의 행보가 이 같은 경영스타일의 평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동양그룹의 문화 역시 현 회장의 경영스타일과 비슷하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만들어 홍보를 하는 재벌그룹이 아니다. 총수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거나 기업의 이미지를 꾸며서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다. 착실히 갈 길을 가면 된다는 게 동양그룹의 기업문화다.
동양그룹의 21세 비전에서도 이 같은 기업문화는 한층 두드러진다. 내실경영을 토대로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고 모든 변수에도 철저한 준비로 대비해 세계 최정상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방침이다. 수익을 내고 있는 미래 지향적인 사업에 핵심역량 집중과 환경변화에 따른 전략적인 사고에 의한 동양만의 독창적인 사업영업 개척이 그 내용이다.
이와 관련 현 회장도 올해 초 “지난해의 성과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변수에 대비해 철저하게 준비하며 질적인 성장을 한층 힘차게 전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같은 현 회장의 경영비전은 지난 89년말 장인인 고 이양구 회장에 이어 그룹회장에 취임한 이후 줄곧 그림을 그려왔던 장기구도 아래 이뤄지고 있다는 게 그룹 안팎의 분석이다.
취임 당시 창립 30주년을 맞아 제2의 창업을 선언했던 현 회장은 그룹을 떠받치고 있던 금융·제조·식품을 균형있게 발전시켜 삼각 형태를 유지토록 한다는 기본구상을 밝힌 바 있다. 특히 금융분야에 대한 현 회장의 각별한 관심과 열정은 지금까지도 동양그룹이 금융전문그룹으로 불리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상윤 고려대초대 총장
김봉환 전 국회 법사위원장
손경식 CJ대표이사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창업주
검사에서 기업경영인으로 변신

현 회장은 경영수업을 쌓기 위해 80년대 초반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유학했으며 재무관리를 전공, MBA를 취득했다. 현 회장은 훗날 “유학기간 중 국제적인 감각을 익힐 수 있었고 금융업에 눈을 뜨게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실제 동양그룹은 현 회장 체제로 변모하기 시작한 지 1년만인 지난 84년 일국증권을 인수, 동양증권으로 상호를 바꿔 증권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불과 5년만에 25개 증권사 중 업계 10위의 건실한 회사로 키워냈다. 이에 창업투자회사와 생명보험업에 진출하는 등 금융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현 회장의 인생은 결혼과 함께 일대 변화를 예고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 3학년 재학중에 12회 사법고시에 합격, 부산지검 검사로 재직중이었던 현 회장이 재벌가의 사위가 된 데에는 고 김옥길 전 이화여대 총장이 다리역할을 했다. 고 김 전 총장은 동양그룹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과 평소 집안끼리 잘 알고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고 김 전 총장의 중매로 당시 이화여대 미대와 대학원을 졸업한 고 이 회장의 맏딸 혜경씨와 현 회장은 결혼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현 회장이 결혼을 통해 신분이 급상승한 것은 아니었다. 검사라는 직업도 직업이었지만 현 회장의 집안 역시 고 이 회장 집안 못지않은 명망가였다. 고 이 회장의 집안이 부를 가졌다면 현 회장의 집안은 학식과 명예를 가지고 있었다.
현 회장의 부친은 이화여대 의대 교수를 역임한 현인섭(1963년 타계)씨. 또 조부는 고려대 초대총장을 지내고 ‘유학계의 마지막 거두’로 불리는 현상윤씨다.
특히 현 회장은 결혼과 함께 처가의 경영참여 요청에 기업인과 법조인 사이에서 심각한 고민을 했다. 결국 1977년 동양시멘트 이사로 동양그룹에 첫발을 내딛으며 기업인을 선택, 그의 인생의 일대 변신을 하게 된다.

동양그룹과 오리온그룹의 분리

현 회장이 그룹경영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83년. 아들이 없는 고 이 회장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면서 맏사위인 현 회장이 후계자로 지목된 것이다. 이때 현 회장은 동양시멘트 사장에 취임하면서 장인의 역할을 대신했다.
사위의 경영전면 배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재계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특히 둘째 사위 담철곤 오리온제과 회장이 당시 동양제과 임원으로 활발한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었던 탓에 호사가들은 분가냐, 경영권 다툼이냐를 입방아에 올리기도 했다.
고 이 회장은 슬하에 아들 없이 두 딸만 두었다. 현 회장의 부인인 혜경씨와 둘째 딸 화경씨로 담 회장은 화경씨의 남편이다.
화경씨는 이화여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담 회장을 미팅에서 만나 1980년 결혼에 성공했다. 담 회장이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유학 중 수백 통의 편지가 태평양을 넘나들었을 만큼 두 사람의 연애담은 유명하다. 특히 재벌가의 막내딸이 화교 출신인 담 회장과 사귀고 있다는 데에 재계의 관심은 한층 더했다. 부친은 담연성씨로 개인사업을 했던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담 회장은 대학 4학년 재학중 동양제과에 평사원으로 입사해 마케팅 부문을 두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어 1987년 동양제과 사장에 취임하면서 능력을 발휘해 연속 히트상품을 출하하면서 제과업계에 동양의 무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001년 9월 동양제과(현 (주)오리온)를 중심으로 유통, 미디어, 영화, 엔터테인먼트 등 관련 16개사를 동양그룹으로부터 분리, 새롭게 출범한 독자적인 오리온그룹을 이끌고 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냐?”

오리온그룹은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제과사업과 함께 유통, 미디어, 영화, 외식 등의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90년대 초 2천~3천억원대에 불과하던 외형도 2002년 말 기준으로 매출액 1조2천여억원에 달하는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특히 제과사업에서의 탄탄한 성장력을 발판으로 향후 외식, 미디어, 영화 등 엔터테인먼트사업과 제과 해외사업에 핵심역량을 기울여 ‘먹는 즐거움에서 보는 즐거움까지’를 추구하고 있다. 즉 국내 최고의 식품회사는 물론 국내 최대의 토탈 엔터테인먼트그룹으로의 도약이 오리온그룹의 경영비전이다.
이처럼 동양그룹의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의 가계도는 두 딸에 의해 형성된 소규모 혼맥이 전부다. 두 사돈에 의해 간접적으로 연결된 혼맥 역시 현 회장쪽에서 이인기 전 영남대 총장, 김봉환 전 국회법사위 위원장 등이 연결되지만 그룹 규모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혼맥이다. 특히 담 회장이 화교라는 점에서 동양그룹의 혼맥은 현 회장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고 이 회장은 자녀들의 혼사에서 철저히 권력과 재산, 집안을 배제했다. 오직 사람 됨됨이만을 살폈다. 아들 없이 두 딸만을 두었던 그로서는 국내 굴지의 재벌그룹을 맡겨야 할 사윗감은 곧 후계자와 직결됐기 때문이다.
맏딸 혜경씨에 따르면 고 이 회장은 학벌을 중시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양보를 아는 사람을 택하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인간의 성품을 중시했다는 의미로 혜경씨는 받아들였다.
둘째딸 화경씨 역시 “아버지께서 저에게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냐?’ 그러시더니 ‘그래, 사랑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시면서 결혼을 승낙했다”고 말한다.
물론 고 이 회장에게 형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와 형이 모두 북한에 거주하고 있어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눈을 감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혈혈단신 월남

고 이 회장은 1916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부친 이교흠씨와 모친 김성자씨의 2남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중농으로 비교적 넉넉한 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6세 때 부친이 별세, 가세가 기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보통학교를 마친 고 이 회장은 15세 때 일본 모리나가 계열사인 함흥물산 사원으로 입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그의 꿈은 ‘국내 최대의 제과회사 주인’이었다.
비록 학교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어린 나이에 시작한 사회생활이었지만 직장인으로서의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입사 당시 그의 급여는 13원(쌀 한 가마 값은 6~7원). 그러나 입사 3년만에 37원을 받는 정식사원이 됐으며 6년만에는 대졸 일본인도 어렵다는 60원의 간부직에 앉았다.
이 시기를 고 이 회장이 기업관을 체득한 시기로 분류하는 게 일반적이다.
고 이 회장은 당시 함흥물산의 시노자키 사장으로부터 “상인으로서 대성하려면 정직을 자기 목숨처럼 알아야 한다”는 경영관을 배웠다고 한다. 즉 “일본인에게서 정직·봉사·근면 등 장사꾼이 갖춰야 할 모든 규범을 배웠다”고 훗날 회고한 것이다.
고 이 회장이 사업에 돈을 대기 시작한 것은 함흥물산 입사 6년 후인 21세 때였다. 25만원의 거금을 손에 쥐고 대양공사라는 식품도매상을 차려 20만평의 토지를 사들이는 게 그의 첫 사업이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맨몸으로 서울로 단신월남하고 만다. 대부분의 재벌그룹 창업주들이 그렇듯 고 이 회장 역시 좌절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에서는 중고 자전거 한 대로 과자행상부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설탕과 밀가루 등을 취급하는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하고 전국 체인망을 형성했다. 당시 1억원의 거금을 손에 쥐며 갑부소리를 듣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두 번째 좌절을 겪어야 했다.

세 번의 좌절, 세 번의 재기

부산 피난시절 다시 설탕도매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설탕왕’이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시장을 석권하며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다. 이어 1956년 풍국제과를 인수, 드디어 어릴 적 꿈이었던 과자회사 주인이 되었다.
오늘날 동양의 기틀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배동환씨와 공동으로 삼척시멘트를 인수하고 1957년 독자경영에 나서면서부터다.
회사 간부들이 일제히 반대했던 삼척시멘트 인수에 대한 고 이 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향후 국내 경제발전 전망으로 볼 때 시멘트공업이 절대로 유망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공장 주변에 석회석과 점토 등 시멘트의 원료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고 공장 옆엔 삼척화력발전소가 있어 동력원 확보도 용이했다. 게다가 수송을 위해 철로와 바다를 끼고 있는 삼척시멘트의 천혜의 입지가 그의 결의를 한층 강화시켰다.
시멘트라는 제품이 취급이 용이하고 생산도 비교적 단순하며 국가 기간산업으로써의 명분도 높다는 것 역시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당시 1억원에 인수했던 삼척시멘트는 회사 간부들의 예상대로 6개월이 채 되지 않아 1억원의 적자를 내고 말았다. 결국 이병철·배동환 등 동업자들이 손을 떼고 고 이 회장은 그동안 축적된 전재산을 투입, 삼척시멘트 단독경영에 나섰다. 그래도 10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1971년 9월 고 이 회장은 회사보전신청을 법원에 제출하면서 세 번째이면서도 마지막 좌절을 겪었다. 사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기업에서 손을 떼야 할 형편이었고 세인의 온갖 비난도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일관된 정직과 신용의 경영철학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세 번의 좌절과 세 번의 재기, 그는 세 번째에서야 비소로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고 이 회장에게는 ‘점원서 출발한 자수성가의 표본’, ‘시멘트산업계의 거인’, ‘오리온성좌의 창업자’, ‘정직·근면의 한평생’, ‘동양철학자, 소크라테스 리’, ‘의리의 화신’ 등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부인과의 드라마 같은 재회

파란만장했던 그의 인생과는 달리 가족은 늘 단촐했다.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두 딸만을 두었다. 대부분의 재벌 창업주들이 그렇듯 아들을 낳아 기업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욕심이 없었던 것일까.
고 이 회장의 부인은 이관희 서남재단 이사장이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공군 군속으로 귀향한 고 이 회장은 “빨리 장가들어 효도해 달라”는 모친의 뜻에 따라 당시 함흥의 명문인 영생고녀를 졸업하고 교직생활을 하고 있던 이 이사장과 약혼했다. 1·4 후퇴로 결혼식도 못 치루고 생이별을 해야 했던 두 사람은 이 이사장이 피난선으로 월남, 거제도에 머물다고 이 회장과 극적으로 만나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당시를 이 이사장은 ‘서남 이양구 추모집 동양보다 큰 사람’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1·4후퇴 때 회장님(고 이 회장)께서 군복을 구해와 가장하고 탈출하려고 하다가 들키는 바람에 헤어졌지요. 그러다 그 이가 부산에 먼저 내려오셔서 승선자 명단을 입수하고…사촌 오라버니가 부산에 일보러 갔다가 그 양반을 만나 내가 거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거제로 찾아오셔서 만났어요. 그래서 마산 진갑수(거래처)씨한테 가서 돈 얻어 신접살림을 차렸지요. 숟가락 2개, 밥그릇 2개에 사과궤짝 놓고 신접살림 차렸어요. 당시가 제일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그러면서 국제시장에서 사업을 시작하셨지요.”
고 이 회장은 이 이사장의 미모에 반해 결혼했다는 말을 생전 자녀들에게 노골적으로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순진한 면도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1탄> 현대그룹
3세에 이르러 재계와 통혼, 쌍용그룹·LG그룹 가문과 연예결혼
 
김동조 전 외무장관
김석원 전 쌍용그룹회장
김용주 전방 명예 회장
노신영 전 국무총리
정도원 삼표산업 회장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한국경제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기업이 있다. 바로 현대그룹이다. 지금은 형제들간의 분가와 분리로 재계 서열상으로는 다소 밀려 있지만 이들이 창업주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그늘에 있었을 때만 해도 현대그룹은 삼성그룹과 재계 수위를 다퉜다.

형제간 뿔뿔이 흩어진 현대그룹

특히 개발경제 시절 현대그룹은 한국경제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경쟁관계였던 삼성그룹이 소비재를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었을 당시 현대그룹은 각종 국가 기간산업건설을 주도하며 인프라망을 형성하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현대사에서 결코 그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현대그룹이 역대 정권과의 불미스런 사건들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들어서도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관련 대북송금 사건에 휘말려 당시 그룹회장이었던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이 자살하는 등 순탄치 않은 험로를 걸어왔다.
내부적으로도 고 정 명예회장 후계를 둘러싼 불협화음이 불거져 나와 현대그룹 경영에 커다란 타격을 주기도 했다. 결국 이 같은 불협화음은 오늘날 형제간의 분할이라는 구도로 재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현대그룹의 혼맥은 여전히 창업주인 고 정주명 명예회장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의 현대그룹이 아니라 분리 이전의 현대그룹과 고 정 명예회장, 그리고 그 자녀들의 혼맥을 살펴보는 게 타당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의 성장사와 함께 창업주인 고 정 명예회장의 기업인으로서의 삶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불과 30여년만에 국내 정상의 기업인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때문에 그의 진면목을 글로 표현하기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고 정 명예회장은 지금은 북한땅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부친 정봉식씨와 모친 한성실씨 사이에서 1915년 11월25일 6남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송전공립보통학교 졸업 이후 훌륭한 농군으로 만들겠다는 부친의 뜻을 거역한 채 3년 동안 네 번이나 가출을 시도, 결국 19살 늦은 봄 인천에서의 부두노동자로 외지생활을 시작했다. 농사품앗이, 건축공사장 인부, 공장견습공 등을 거쳐 마침내 쌀도매상인 부흥상회의 배달부로 서울생활을 하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고 정 명예회장은 이 상회를 인수, 경일상회를 설립하고 자동차수리공장인 아도(Art)서비스를 설립, 훗날 현대토건사를 거쳐 오늘날 현대그룹의 기틀을 닦았다.(고 정 명예회장의 성공신화는 TV 등의 각종 매스컴과 출판물이 워낙 풍부한 탓에 여기에서는 더 이상의 언급을 생략한다.)

자손 풍성한 다산(多産) 가문

고 정 명예회장의 집안은 여느 재벌그룹과는 달리 다산(多産) 가문으로 꼽힌다. 그의 형제들 뿐 아니라 자녀까지도 그 숫적인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현대그룹 경영에 참여해 현대그룹 성장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리고 형제들인 인영·순영·상영씨 등은 일찌감치 분가해 별도의 그룹을 이루고 형과 함께 재벌총수의 대열에 나란히 서기도 했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부도와 함께 현재는 그 명맥조차 찾기 힘든 그룹도 없지 않다.

군단 방불케 하는 대가족

첫째 동생인 정인영 전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1953년 현대건설 입사 이후 20여년 동안을 형과 함께 하다 중동 진출 신중론으로 이견이 발생, 결국 한라그룹을 설립해 독립했다. 그러나 한라그룹은 IMF 직전 자금난을 겪으며 부도로 무너지고 말았다.
둘째 동생인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과 셋째 동생인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넷째 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 등도 1950년대 후반 현대그룹에 합류, 자신의 가산을 처분하는 등 형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특히 정세영 명예회장은 별명이 ‘포니 정’이었을 만큼 현대자동차의 성장을 이끌었던 주역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8남매로 형제들이 많았던 탓에 고 정 명예회장의 일가는 직계와 방계를 합할 경우 LG그룹 못지않은 대군단이 탄생하게 된다. 고 정 명예회장만도 8남1녀의 자녀를 두고 20명이 넘는 친손자(녀)를 두고 있다. 또 이들이 결혼해 맞이한 부인과 남편, 그리고 증손자(녀)까지 합하면 대가족이라는 표현 자체가 오히려 옹색하기만 하다.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일부 자녀들의 삶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고 정 명예회장이 장수를 했던 탓에 사고로 동생과 자식을 앞세워야 했던 상처를 평생 안고 살아야 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중이었던 넷째 동생 신영씨를 1962년4월 독일 함부르크에서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리고 20년 뒤 4월에는 인천제철(현 INI스틸) 사장으로 재직중이었던 장남 몽필씨를 역시 교통사고로 잃었다. 8년 뒤 4월에는 넷째 아들 몽우씨가 또 자살로 사망함으로써 고 정 명예회장을 슬픔에 빠뜨렸다.
공교롭게도 고 정 명예회장을 앞서갔던 이들은 모두 4월에 변을 당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8월 사망한 다섯째 아들 정몽헌 현대아산이사회 의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해 고 정 명예회장에게 교통사고와 자살은 떠올리기도 싫은 단어가 돼버렸다.

족벌경영 싫어했지만 동생 ·자녀 경영에 참여시켜

고 정 명예회장은 족벌경영이란 말을 무척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룹 경영의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형제들이 각각 분가를 통해 빠져나가고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2세들을 경영일선에 참여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장남의 갑작스런 죽음은 모든 아들들을 경영에 참여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각자의 개성에 따른 역할분담이 확실했고, 이후 분가도 이에 따라 이뤄졌다.
이 같은 고 정 명예회장의 성품 탓이었을까. 국내 최대 재벌그룹의 혼맥도라고는 의아할 만큼 현대그룹의 혼맥도는 초라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권문세가와 통혼을 할 수 있었음에도 자녀들의 결혼에서 고 정 명예회장의 입김은 멀었다. 오히려 평범한 집안이 대부분이다.
혼맥도에서 직접적인 사돈관계를 맺고 있는 인사들 가운데 알려진 이름은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가 전부다.
맏며느리인 몽필씨의 부인인 이양자씨(1991년 사망)는 평범한 집안의 장녀로 이화여대 출신이라는 고작이다.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동서산업의 오너인 이영복 전 회장은 이양자씨의 친정동생으로 고 정 명예회장은 장남의 처남에게 동서산업을 물려준 것으로 재계 관계자들은 해석하고 있다.
둘째 며느리인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부인 이정화씨와 셋째 며느리인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의 부인 우경숙씨의 친정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우경숙씨의 부친인 우호식씨는 현대그룹 고문을 역임하기도 했다.
4남 몽우씨의 부인 이행자씨는 대학재학 중 연애를 거쳐 결혼했다. 역시 집안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섯째 며느리인 고 정몽헌 회장의 부인 현정은 현 현대그룹 회장은 현영원 전 신한해운 회장의 딸이다. 그러나 결혼 후 신안해운은 아세아상선(현 현대상선)에 흡수됐다. 이에 부친도 현대그룹 경영에 참여하다 현재는 용문학원 이사장으로 재직중이다.
또 현 회장의 모친 김문희씨는 김용주 전방(전 전남방직) 창업주의 외동딸로 한국걸스카우트 총재, 용문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한 여성계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과 전방 명예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김창성씨와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은 현 회장의 동생들이다.
여섯째인 정몽준 의원의 부인 김영명씨는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의 2남4녀 가운데 막내딸이다.
일곱째 며느리인 정몽윤 현대해상화재보험 회장의 부인 김혜영씨는 김진형 부국석면 회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막내며느리인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의 부인 권준희씨는 미국에서 사업을 했던 권영찬씨의 딸로 현대종합금융 고문을 역임했다.

“물질이나 정략이 개입돼서는 안돼”

유일한 사위인 정경희씨의 남편 정희영씨는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한 평사원으로 고 정 명예회장의 눈에 들어 사위로 발탁됐다. 고려대 출신으로 조선 수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종합상사 사장을 거쳐 현대그룹에서 분가해 지금은 선진종합(주)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처럼 고 정 명예회장의 8남1녀 자녀들은 한결같이 자유로운 연애를 통해 결혼함으로써 현대그룹 혼맥도에 권문세가를 배제시키고 있다. 특히 평범한 집안 출신의 며느리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고 정 명예회장은 오히려 사돈들을 현대그룹에 영입, 일자리를 주선했는가 하면 따로 기업을 운영하도록 배려하기까지 했다.
권영찬·현영원·이진호씨 등은 그룹(부)회장으로까지 추대됐고, 장정자·이영복·정희영·김영주씨 등은 독립을 주선해 주었다. 다만 김동조 전 외무부장관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는 퇴임 후에도 현대그룹에 영입되지 않았다. 관료 출신 사돈들을 그룹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은 것이다. 기업경영과 자녀들의 혼사를 전혀 연결하지 않고 철저히 배제한 사례다.
고 정 명예회장 스스로도 이 같은 혼사를 치뤘다. 연예결혼 찬미자로 불리었던 그는 부인인 변중석씨를 맞이할 때도 집안간 결정이 아니라 네 번째 가출 끝에 서울 싸전에서 재미를 볼 때 만나 결혼했다.
“결혼은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에 물질이나 정략이 개입돼서는 안된다. 결혼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어야 한다”는 게 고 정 명예회장 부부의 결혼관으로 알려진다.
고 정 명예회장은 자녀들이 결혼할 나이가 되면 결혼상대자를 집으로 데려오도록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간단한 인사만 받고 먼발치서 지켜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회없을 만큼 오래 사귀고 나서 결혼을 결정해라”는 충고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자녀들이 1년에서 1년반 정도의 연예 끝에 “이 사람만한 이가 없다”는 말을 하면 그제서야 고 정 명예회장은 결혼을 허락했다. 이어 “평생 이혼 이야기는 내 앞에서 꺼내지 말라”는 다짐을 꼭 받았다.

재벌가 통혼 3세도 연예결혼

고 정 명예회장의 자녀들에 대한 결혼관은 3세에 이르러 조금 변질됐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3세에 이르러 권문세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재벌간 혼사가 많아진 것이다.
현대그룹 3세의 결혼에 첫 테이프를 끊은 고 정 명예회장의 맏손녀(몽필씨의 장녀) 은희씨는 현대전자(현 하이닉스) 평사원과 지난 95년 8월 결혼했다. 고려대 응용통계학과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후 현대전자 기획실 경영관리팀에서 근무하고 있던 주현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주씨는 학교 졸업후 (주)대우에 2년 정도 근무하다 현대전자로 직장을 옮겼던 것으로 알려진다.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은희씨가 이화여대 불문과 2학년이었을 때 친구소개로 만나 연예를 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몽필씨의 둘째딸인 유희씨는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아들인 김지용 용평리조트 상무와 결혼했다.
손녀사위가 되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딸들은 의사와 현대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평범한 이들과 결혼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정 회장의 외아들인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사장은 지난 95년 당시 강원산업 정도원 부회장의 맏딸 지선씨와 결혼했다. 정몽구 회장과 정도원 부회장은 경복고 선후배 사이로 이미 오래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고 한다. 특히 정 부사장은 부인 지선씨의 사촌오빠인 정대우씨와 중·고교 동창으로 어려서부터 오누이처럼 자랐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교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원산업은 2000년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인 INI스틸에 합병됐다. 정도원 부회장은 현재 삼표산업(주) 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초라한 국내 최대 재벌가문 혼맥도

4남 몽우씨의 장남 정일선 비엔지스틸 부사장은 구은희씨와 결혼했다. 은희씨는 구인회 엘지그룹 창업주의 조카인 구자엽 희성건설 부회장의 딸로 두 사람은 미 조지타운대 유학도중 학생모임에서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현대그룹 혼맥에서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의 장녀 숙영씨는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 경수씨와 결혼했다. 또 정상영 KCC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 정몽익 금강고려화학 부사장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인 신정숙씨의 딸 최은정씨와 결혼했다.
이처럼 현대그룹의 혼맥도는 3세에 이르러 재계와 통혼하며 2세 때보다 화려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전체적인 그룹 규모와 가족수를 감안하면 타 재벌그룹의 혼맥도에는 여전히 미치지 못하는 단순한 혼맥도가 그려진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2탄> 대상그룹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처가 기업으로 유명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
이훈동 전남일보 명예회장
고재청 전 국회부의장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조미료 전쟁 청산’, ‘영호남재벌의 화합’.
지난 1998년 6월9일 각종 매스컴에서는 한 결혼식을 두고 이같은 제목의 기사를 썼다. 정계와 재계 VIP들의 문전성시 속에 치러진 이날 결혼식의 주인공은 이재용 현 삼성전자 상무와 그의 부인인 임세령씨였다. ‘미풍’과 ‘미원’으로 대표됐던 국내 조미료 시장의 양대축 삼성그룹과 대상그룹(당시 미원그룹)의 3세들이기도 했다.

삼성 황태자와의 결혼

두 사람의 결혼을 계기로 대상그룹의 오너 일가는 각종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철저히 외부노출을 꺼렸던 임창욱 명예회장도 장녀의 결혼식을 전후로 매스컴에 자주 등장했다. 각종 여성지에서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홍나희씨와 함께 임 명예회장의 부인 박현주씨 관련 기사도 줄을 이었다.
이에 당시 대상그룹의 한 관계자는 “마치 삼성그룹과 동일한 레벨로 취급되고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는 말을 털어놓기도 했다.
‘미원’이라는 조미료 외에 딱히 두드러지지 않았던 대상그룹은 임 명예회장의 장녀 세령씨의 결혼으로 삼성그룹의 사돈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며 지금까지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있다. 대상그룹 스스로도 이를 부담스러워하지만 삼성그룹 역시 다르지 않다. 좋은 일에 오르내리는 것은 별문제지만 궂은일에 사돈기업이라 토를 다는 데 대해 마뜩찮다는 반응이다.
국내 최고의 재벌그룹인 삼성그룹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재용 상무와 임세령씨의 결혼은 양가 어머니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알려진 홍나희씨와 박현주씨는 신앙생활을 통해 친분을 맺고 있었다. 또 임세령씨는 이런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홍씨와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세령씨를 눈여겨봐왔던 홍씨는 며느리감으로 세령씨를 점찍어 두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씨 역시 재용씨를 마음에 두고 있던 터라 두 사람은 마치 의기투합이라도 하듯 사위와 며느리 삼기로 하고 아들딸의 결혼을 주선했다.
급기야 이들의 결혼이 발표되자 재계에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쏟아졌고 그 관심도 어느 누구의 결혼 못지않을 만큼 집중됐다. 98년 6월8일 경기도 용인의 호암미술관 앞 정원에서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주례로 치러진 결혼식에는 삼성과 대상그룹의 오너 및 전문경영인을 비롯한 정재계 인사 등 5백여명이 참석했다. 특히 이병철 창업주의 기일에도 모두 한 자리에 모이지 못했던 한솔·신세계·제일제당(현 CJ그룹)·새한그룹의 오너 및 2~3세들이 대거 참석한 한편 당시 이수성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수석부의장, 김석원 쌍용양회회장, 유상부 포철회장, 이웅렬 코오롱회장 등이 하객으로 자리를 함께 했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각종 가십거리를 쏟아냈다.

나서지 않은 경영스타일

그러나 대상그룹은 점차 매스컴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사실 대상그룹은 ‘미원’이라는 상표 외에 딱히 일반에게 크게 알려진 기업이 아니었다. 때문에 결혼식 이후 관심의 대상에서 한발짝 비켜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상그룹의 창업주는 고 임대홍 전 명예회장. 그는 천성적으로 얼굴 내보이기를 싫어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청에도 드나들지 않았고 경제인 모임에 나가본 적도, 직책을 맡아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다만 임씨문중의 중앙협의회격인 ‘임씨대동회’의 회장을 역임해 유일한 기업 외의 직함을 가졌을 뿐이다.
이 같은 창업주의 스타일은 장남으로 경영권을 물려받았던 임창욱 명예회장으로까지 이어졌다. 임 명예회장은 취임 후 부친과 달리 진취성과 능력을 중시하고 인간성을 강조하는 경영을 펼치며 보수성에서 탈피하고자 했지만 재계에서는 커다란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때문에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대상그룹은 마치 ‘미원’이라는 조미료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업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상그룹의 안을 들여다보면 속이 꽉찬 알짜배기 기업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대상그룹은 1956년 조미료 전문기업으로 출발, 5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조미료 및 종합식품사업을 기반으로 축산, 건설, 금융, 정보기술, 종합광고 등 각종 서비스 업종을 영위하고 있으며 13개 계열사에 17개 해외사업장을 거느리고 있다. 2003년 기준 1조9천4백17억원의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 97년 전문경영인 체제를 구축하고 그룹명을 ‘미원’에서 ‘대상’으로 변경하는 그룹 CI작업을 완료하고, 21세기 초일류기업으로 도약을 선언하기도 했다.
특히 IMF의 구제금융 지원에 따른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수익 사업인 라이신사업의 매각을 비롯하여 비주력 사업 및 한계사업의 매각 합병 등 혁신적인 구조조정과 경영혁신을 단행,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타파하고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함으로써 재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상그룹의 50여년에 걸친 역사는 대체적으로 세 단계로 구분해 소개되고 있다.

‘미원’으로 시작되는 조미료 역사 창조

창업기로 일컬어지는 1950~ 60년대에는 국내 식품문화의 새로운 장을 연 시기다.
임대홍 창업주에 의해 시작된 대상의 역사는 순수 민족자본과 독자 기술로 생산된 국산 조미료 1호인 미원을 통해 우리 식품문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 60년대부터 조미료 대량생산 시대를 연 미생물 발효법 개발로 국내 조미료 시장에서 선두로 나섰으며, 전분 및 전분당, 구연산 등 관련 식품분야로 사업을 확대하여 종합식품기업으로서의 위상을 높였던 시기다.
1970년대는 도약기로 분류되고 있는데 국제화의 선도기업이 된 시기다.
국내 최초로 플랜트를 수출하여 인도네시아에 PT.MIWON INDONESIA Tbk를 설립하고 이어 일본, 미국, 홍콩 등 지역에 무역법인을 세워 국제화를 선도했다. 또한 중공업, 무역, 석유화학 등 비식품분야로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성장기인 1980~90년대는 미래를 준비하는 힘과 경쟁력을 다진 시기다.
제2대 임창욱 회장의 취임과 함께 육가공, 냉식, 커피, 건설 등 분야로 사업을 확대하고 독창적인 기술축적을 위해 중앙연구소를 설립하여 R&D 투자에 집중함으로써 미래를 향한 기술개발에 전력 질주했다.
또 90년대 들어 유통, 정보기술, 종합광고업 등 소프트 사업에 진출했으며 90년대 후반기에는 전문경영인 출신인 고두모 회장 취임과 그룹명을 대상으로 변경했다. 이때 재무구조 개선과 사업구조 전문화 등의 구조조정을 통해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자체 평가하고 있다.

실속 챙기는 경영과 혼맥

대상그룹의 모기업인 대상(주)는 1956년 동아화성공업(주)을 모태로 출범했다. 조미료의 대명사인 ‘미원’을 시작으로 주력사업 분야인 종합식품, 발효, 전분당을 비롯해 건강, 건설, 무역사업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특히 지난 50여년간 축적한 발효기술을 핵심 기반으로 생명공학, 정밀화학 분야에서도 독보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다.
99년 1조1천억원 매출에 3백63억원의 순이익을 내는 양호한 경영실적을 이룬 대상은 98년말 3백22%에 달했던 부채비율이 2000년 현재 1백80%대까지 떨어졌다.
이처럼 폐쇄적이라고까지 평가되는 오너들의 경영스타일과 달리 대상그룹은 실속을 차린 대표적인 기업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혼사도 그룹 규모에 비해 국내 굴지의 재벌 못지않은 화려한 가문과 연결된 혼맥도가 그려져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려함과 함께 평범함이 또 보인다.
임 창업주는 1920년 전북 정읍에서 농부였던 부친 임종구씨와 모친 김순례씨 사이의 5남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정읍군청에서 직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전북도청 직원으로 근무하던 1942년 박하경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인 박씨는 일제 때 전남에서 철도청 역원(현 임원급)으로 일했던 박기환씨의 딸이다.
임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이들 자녀의 혼사를 통해 임 창업주는 재계·금융계 인사와 사돈을 맺게 된다. 그러나 평범한 보통사람과도 통혼했다. 또 사돈들의 출신지는 서울·전남·부산 등으로 지역적 편중성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결혼으로 이룬 호남재벌의 결합

외동딸 경화씨는 동생 임창욱 명예회장 집에 가정교사로 드나들던 서울대 공대 출신의 김종의씨(백광산업 회장)와 혼사를 맺었다.
경남고 졸업후 서울대 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김 회장은 미국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 MBA를 마치고 그룹 경영에 참여, 미원통상 대표이사와 P.I미원 인도네시아 대표이사를 지냈다.
장남으로 부친에 이어 그룹대권을 물려받았던 임 명예회장은 1976년 집안사람의 중매로 금호그룹 창업주인 박인천씨의 3녀 현주씨와 결혼했다.
임 명예회장은 한양대·일본 와세다대학에서 화공을 전공했다. 귀국 후 1973년 미원에 입사해 미원종합개발·한남화학 사장을 역임했다. 부인 현주씨는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한때 미국에 유학, 미술을 전공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전북과 전남을 대표하는 재벌간 통혼으로 당시 화제가 됐다. 특히 이 결혼은 임 창업주 가문의 화려한 혼맥도에 시동을 건 계기가 됐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익기가를 지나 해태그룹 창업주인 박병규가, 교통장관을 역임한 민병권가와 차례로 연결된다. 또 방계로는 전 재무장관인 이정환가와 동양증권 사장을 지낸 정종만가와도 연결된다.
차남 임성욱 세원그룹 회장은 1990년 4월 한국산업은행 부총재보를 역임한 손필영씨의 외동딸 성희씨와 결혼했다. 일본 게이오대학 대학원 유학시절 교회를 다니면 성희씨를 만나 교제후 결혼에 성공했다.
성희씨는 당시 산업은행 도쿄지점장이었던 부친을 따라 일본에 와 도쿄 세이징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이처럼 2남1녀의 자녀로 연결되는 혼맥도는 단촐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5명이나 되는 임 창업주의 동생들과 그 자녀들로 이어지는 혼맥도는 정재계는 물론 의학계 등 다양한 인사들과 연결되고 있다.
임 창업주의 둘째 남동생 임채홍 전 내쇼날프라스틱 회장은 특히 화려한 사돈들을 자랑하고 있다. 대상그룹 부회장까지 역임하며 임 창업주와 함께 대상그룹을 일군 일등공신이기도 한 그는 1979년 대상에서 분가해 호남식품과 내쇼날프라스틱을 독자경영했다.
채홍씨의 부인은 장혜원씨로 3남2녀의 혼사를 통해 1981년 고재청 전 국회부의장 가문과 연결했다. 장남 임익성 내쇼날프라스틱 회장의 부인이 고 전 부의장의 둘재딸 선영씨인 것이다. 또 차녀 현미씨는 1984년 이훈동 전남일보 명예회장의 막내아들 경일씨와 결혼했다.
첫째 남동생 정홍씨의 3남3녀 자녀를 통해서도 화려한 혼맥도를 그려나갔는데 차남 우성씨가 동일방직 사장을 지낸 정종화씨의 딸 혜경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셋째 남동생 수홍씨는 3남1녀 자녀 가운데 장남 병선씨가 전 법무차관 김영천씨 가문과 혼사를 맺었다.
유일한 여동생인 현흥씨는 임 창업주와 창업동지이며 대상그룹 고문을 역임한 한현석씨와 결혼했다. 또 MIT 출신인 막내 남동생 우홍씨는 대학동창인 브라질 출신의 테레사씨와 결혼, 브라질로 이민을 떠났다.

톡톡 튀는 둘째딸 홈피, 삼성그룹 폭탄세례

한편 임창욱 명예회장은 두 딸만을 두고 있는데 장녀 세령씨의 동생 상민씨는 지난해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 뉴욕에서 유학중이다.
상민씨는 지난 4월 형부와 언니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부인 임세령씨의 사생활을 인터넷을 통해 공개하면서 한바탕 유명세를 탔다. 커뮤니티 사이트인 ‘싸이월드’에 미니홈피를 개설, 운영하고 있는 상민씨가 조카인 이 상무 부부의 딸 원주양의 사진을 모두 공개해 버린 것이다.
특히 사진아래에 “요즘 제 생활의 활력소가 된 둘째 조카. 같은 공주라 그런지 정말 귀엽답니다. 호호호”라며 원주양을 소개한 한편 이 상무의 장남인 지호군에 대해서도 “언니와 형부를 반반씩 닮은 너무너무 사랑하는 조카”라며 “너무 잘생겨서 친구들이 탐낸다”고 자랑했다.
지난해 ‘한국 50대 여성 부호’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던 상민씨는 “소호에서 20달러짜리 귀걸이를 깎아서 15달러에 샀다”며 좋아하거나 연예인들의 홈페이지 주소를 퍼놓는 등 지극히 평범하고 발랄한 유학생의 모습을 보여줘 재벌가 자녀라는 흔적은 홈페이지만으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상민씨의 홈피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원정출산 등 문제가 발생하자 사진을 모두 삭제했다.

한정곤 기자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0탄> 신동방그룹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관련 의혹 끊이지 않아
 
노태우 전 대통령
천병규 전 재무장관
송인상 효성그룹 고문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화려한 등장, 초라한 퇴장.’
신동방 오너 일가의 최근 근황에 대한 재계의 반응은 이 같은 표현으로 압축된다. ‘해표식용유’로 일약 재벌의 반열에 오른 신동방은 대통령의 사돈기업으로 한때 승승장구하며 재계의 부러움을 샀다. 각종 특혜설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정치지형에서 커다란 문제로 부각되지 않은 채 덩치를 키워나갔다.
그러나 권력은 유한했다. 대통령이었던 사돈이 권좌에서 물러난 지 불과 6년6개월만에 신동방은 부정과 비리의 온상기업으로 전락하며 오너 일가도 사돈처럼 쓸쓸하게 퇴장해야만 했다.

이어받지 못한 창업주의 철학

신동방은 지난 1996년 사명을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동방유량으로 소비자들에게 친숙한 기업이었다. ‘해표식용유’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오너 일가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사돈’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 창업주 고 신덕균 전 명예회장과 신명수 전 회장은 관심의 대상에서 비껴나 있었다.
신 전 회장의 이름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IMF 관리체제 초기 부실기업 정리과정에서였다. 또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에서도 그의 이름은 매일 각종 매스컴을 장식했다.
재벌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신동방의 오너 일가가 일반인들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데에는 신덕균 창업주의 생활신조가 큰 몫을 했다. 그의 아호는 ‘눌원(訥園)’. ‘말은 적게 하고 행동은 민첩하게 하라(訥園而敏於行)’는 뜻으로 논어에서 따왔다. 아호에서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신 창업주는 국내 대두가공업계의 개척자로 불리고 있다. 해방전 정미업과 미곡유통을 했던 그는 아직 식품산업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던 1966년 동방유량을 설립하고 식용유 생산 및 사료업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 사업 하나에 평생을 쏟으며 오로지 식품산업 한 길을 걸어왔다. 흔히 재벌을 향해 쏟아지는 문어발식 확장이라는 비난에서 신 창업주만큼은 예외였다.
식용유 및 대두박의 수입자유화 조치로 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신 창업주는 업종전문화로 승부수를 띄워 꾸준한 성장을 지속했다.

어려움 없었던 창업

이 같은 외고집 경영은 1989년 장남인 신명수 전 회장이 경영대권을 물려받은 초기까지는 그대로 유지가 됐다. 그러나 신 전 회장은 IMF 관리체제를 앞두고 무리한 사업다각화를 꾀하다 2년만에 워크아웃에 들어가 결국 올해초 채권단에 의해 CJ컨소시엄에 매각돼 오너 일가는 재계에서 그 이름이 지워졌다.
신 창업주는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기 한 해 전인 1909년 경상남도 창원군 천가면 동선리(현재 부산광역시에 편입)에서 부친 신태규씨와 모친 조선이씨 사이에서 2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신태규씨는 집안의 전통적인 유교적 관습에 따라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마치면서부터 선대에서부터 가업으로 전해내려온 수산업에 종사, 유복한 집안이었다.
유교적 가풍에 따라 유년시절부터 마을의 서당에서 한학수업을 받은 신 창업주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평범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어 서울의 경신고보에 진학, 유학생활을 하게 된 신 창업주는 이때부터 무엇이든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독립심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당시 오산학교와 더불어 이북 출신 학생이 많고 진보적인 교육을 가르쳤던 경신고보에서 그는 춘원 이광수로부터 영어, 육당 최남선과 이선근으로부터 역사, 조선어학회 이사장 장지영으로부터 한글 철자법 등을 배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1930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로 진학한 신 창업주는 동경 유학시절 일본의 조선 수탈과정을 직접 목격하며 졸업후 고향에서 민족자본 형성을 모색했다.
그리고 1년 후 마산항에 정박중인 일본 화물선을 지켜보다 곡물사업을 해보기로 결심을 한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곡물거래를 겸한 정미업이 사업적으로 유망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정미소로 시작해 식용유로 성공

부친으로부터 결혼을 조건으로 사업자금을 받은 신 창업주는 친지의 중매로 1935년 경남 동래군 구포에서 정미업을 하던 재력가 김정환씨의 장녀 영자씨와 혼사를 치루게 된다. 그리고 결혼과 함께 그의 일생에서 최초의 사업으로 정미소를 시작하게 된다. 현재 부산역 앞 텍사스 거리의 ‘태평정미소’가 그것이었다.
부친에게서 몸으로 배운 신용과 부지런함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태평정미소는 일이 많아졌고 사업가로서의 입지를 세운 4~5년 뒤에는 부산지역에서 이름있는 청년사업가로 서서히 부상하게 됐다. 그 결과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는 부산시 동구 범일동에 ‘부산정미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어 같은 시기에 곡물도매업 및 대규모 도정업과 수산업을 기초사업으로 오늘날 신동방의 모태가 된 동방흥업주식회사를 설립, 1963년에는 서울 진출과 함께 마포에 근대식 제분기를 설치하며 제분사업에도 본격 참여하게 된다.
식품 외길을 걸어온 신 창업주는 한때 철강업에 진출, 외도를 하기도 했다. 농림부 차관을 지내고 당대의 농정가였던 주석균씨로부터 동생인 주창균씨를 소개받은 게 계기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신 창업주는 철강사업에서 손을 떼고 만다. 철강사업 자체가 스스로 창안한 사업이 아닐뿐더러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던 주씨를 도와주겠다는 의도였기 때문이었다. 이에 주씨의 자립기반이 어느 정도 생기면서 신 창업주는 과감하게 손을 떼고 식품산업만을 고집했다.
제분사업으로 쏠쏠하게 재미를 보고 있던 신 창업주가 식용유지 사업에 관심을 가진 것은 1964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민들 사이에서는 식용유라는 개념이 성숙되지 않은 상태였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유지를 식품가공의 기본 원료로 생각하기보다는 조미료의 일종으로 인식해 참깨와 들깨, 고추씨 등을 이용해 자가제조하거나 시장에서 파는 미강유를 이용하고 있었다. 이에 보다 전문적이고 위생적인 식용유를 생산, 판매하기로 작정한 신 창업주는 대전에 공장을 설립해 일본으로부터 반 연속 추출식 제유설비를 도입했다. 그리고 1966년 첫 제품을 생산했다. 오늘날 신동방이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를 자랑하는 화려한 혼맥도

신 창업주의 자녀들은 자신과는 달리 대부분 연예결혼을 했다. 그리고 사돈들은 정관계 및 굴지의 재계 인사와 연결된 화려한 혼맥도를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는 대통령을 비롯해 그룹총수와 전직 장관, 그리고 은행장 등이 등장한다.
먼저 신 창업주의 부인 김영자씨는 농림부 차관을 거쳐 대전피혁 회장과 효성기계공업 고문을 역임한 김종대씨의 누나다. 부산의 재력가 집안과 중매로 결혼한 것이다.
신 창업주의 자녀는 3남2녀로 장녀 현숙씨를 제외하면 모두 연애결혼을 했다.
이화여대 가정학과를 졸업한 현숙씨는 친지의 중매로 1959년 동방의료양행 회장인 남해용씨와 결혼했다. 해용씨는 와세다대학 대학원을 졸업해 신 창업주와는 대학 선후배 사이다. 그의 부친은 대구에서 양조장을 경영한 남두현씨.
장남인 신명수 전 회장은 미국유학중 알게된 동양나이론 송인상 회장의 차녀 길자씨와 수년간의 연애 끝에 1968년 결혼했다. 신 전 회장은 1964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콜럼비아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유학했다. 또 길자씨는 이화여대 음대 졸업 후 미국에서 첼로를 계속하다 신 전 회장을 만났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신 창업주 일가의 혼맥도는 이봉서 상공장관,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과 동서간이 됐다.
신 전 회장이 신동방에 입사한 것은 1967년. 신동방 설립 이듬해였다. 당초 기획실에 근무하며 진해공장 건설에 따른 제반 현안들을 입안하고 실무적으로 까다로운 업무들을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7년간 실무업무를 경험한 신 전 회장은 1974년 사장에 취임, 2세 경영인으로서의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입사 22년만인 1989년 신 창업주의 명예회장 취임과 함께 경영대권을 물려받았다.
신 전 회장은 취임 이후 곡물가공업을 전문분야로 동양 최고, 최대의 회사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감추지 않았다. 이는 부친과 같이 대기업의 전형적인 사업확장 방법인 문어발식 경영방식을 피하고 사업분야를 전문화하여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경영방법을 선택함으로써 한 분야에서 최고를 이루겠다는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신 전 회장은 오래지 않아 이 같은 경영철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됨으로써 불행한 미래를 예고한다.

3세에 이르러 완성미 플러스

신 창업주의 차남 영수씨는 1970년 재무장관을 역임한 천병규씨의 1남3녀 가운데 셋째인 난주씨와 결혼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영수씨는 기업경영과는 거리를 둔 채 현재도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난주씨는 미국 워싱턴대학을 졸업했다.
이화여대를 졸업한 차녀 정숙씨는 지난 1980년대초 도미, 미국인 마이크 바세트씨와 결혼해 현재 뉴욕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고려산업 회장으로 재직중인 3남 성수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남화진씨와 연애결혼했다. 화진씨의 부친은 재무차관을 역임한 뒤 중소기업은행장과 서울신탁은행장을 지낸 남상진씨. 성수씨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고려산업에 입사, 경영자로서 기반을 구축했다.
신 창업주 일가의 화려한 혼맥도는 3세에 이르러 한층 그 빛을 발한다. 신 전 회장의 맏딸 정화씨가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와 혼사를 치룬 게 대표적이다. 서울대 음대를 다니던 1987년 미팅에서 서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인 노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씨를 만난 정화씨는 졸업을 앞둔 4학년 여름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처럼 신 창업주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직계자녀들과 손녀에 이르는 3대의 혼사를 통해 국내에서 내노라 하는 정재계 인사들과 사돈을 맺어 대표적인 명문가문으로 그 이름을 올렸다. 신 창업주 자신의 결혼으로 김종대 전 대전피혁 회장 가문을 통해 효성그룹 창업주인 조홍제가, 동양나이론 회장인 송인가, 이봉서 전 상공장관의 부친인 전 국제화재 이필석 명예회장 가문, 전 내무장관 김치열가, 재무장관을 지낸 서봉균가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장녀 현숙씨를 통해 중앙일보를 창간한 홍진기가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가와 연결되고 차남 영수씨를 통해서는 법무장관을 역임한 오탁근가와 한 다리 건넌 사돈이 된다.
또 3남인 영수씨의 혼사로 1950년대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최정우가와 통하기도 한다.
손녀인 정화씨로는 노태우가와 연결되면서 SK그룹 최종현가와 김복동 전 국회의원 가문과 연결이 된다.

대통령의 사돈, 득이 아닌 해

그러나 화려한 정관계 인사와 재계 인사들을 사돈으로 두고 있는 신동방은 1999년 워크아웃에 들어감으로써 기업은 살았지만 오너 일가는 퇴출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특히 대통령과 사돈을 맺음으로써 특혜시비 속에 사업을 다각화했지만 결국은 사돈이 신동방의 몰락을 돕는 기이한 인연을 또 맺고 있다.
신 창업주에 이어 경영대권을 물려받은 신 전 회장은 식품전문기업으로서의 전문성을 포기한 채 무리한 사업다각화를 시도했다. 92년 동방페레그린증권 설립을 시작으로 93년 해표유니레버 설립 등 증권, 유통, 외식, 화장품제조업 등에 뛰어들었다. 특히 지난 97년 대농그룹의 미도파에 인수를 시도하면서 동방페레그린증권과 성원건설 등을 동원, 적대적 M&A에 나섰지만 전경련의 지원을 받은 대농의 방어로 실패하면서 급격한 자금난을 겪어야 했다.
당시 신동방이 미도파와 대농 주식을 매집하는 데 쏟아부은 자금의 규모는 알려진 것만도 1천억원대, 우호세력까지 합하면 2천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여기에 막대한 주식매집 자금의 출처를 둘러싸고 비자금 의혹까지 불러진 가운데 결국 미도파 인수도 포기해야 했다.
이후 IMF 관리체제에 따른 고금리 소용돌이에 휘말려 1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감당하지 못한 채 신동방은 다시 회생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신동방은 대통령의 사돈기업에 대한 특혜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는데 증권업 진출이 대표적이었다. 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서울 소공동 서울센터 빌딩을 매입하고 테헤란로의 18층짜리 동남빌딩을 건축한 사실이 밝혀져 검찰에 소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99년 12월 신 전 회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국외도피 및 업무상 배임, 증권거래법·외환관리법 위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는 치욕까지 겪어야 했다.
결국 신동방은 채권단에 의해 지난해 8월 동원컨소시엄에 매각되는 듯 하다 올해초 CJ컨소시엄에 지분 56.28%가 매각됨으로써 신 창업주 일가는 신동방에서 완전히 퇴출됐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재벌가 얽히고 설킨 혼맥 24탄> 삼성그룹
인위적인 결혼에 의한 혼맥보다 사돈의 사돈으로 연결된 혼맥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재벌들이 혼사의 대상으로 꼽는 집안은 대체 어떤 부류일까.
최근 재벌들의 혼맥도가 공개되면서 세간의 관심은 혼인의 대상 집안과 미치는 영향에 쏠리고 있다. 실제 혼맥도를 보면 국내 재벌들이 어떤 식으로든 얽혀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혼맥도를 보면 이해관계에 얽힌 혼사가 이뤄졌다는 의구심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그들만의 공화국’이란 말로 빗대기도 한다. 유력한 집안과의 혼인관계를 통해 자신들만의 성(城)을 더욱 견고히 쌓아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통혼을 통해 부와 권력, 명예의 결정체를 도출해내고 있다는 얘기다. 일요시사에선 이에 재계를 움직이고 있는 재벌가문의 혼맥 실체를 집중 재조명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편집자 주>

명실상부한 국내 최고의 재벌로 삼성그룹을 꼽는 데 주저하거나 이견을 내놓을 이들은 아무도 없다. 90년대말까지 매출액 기준으로 수위를 차지하며 재계를 이끌었던 현대그룹의 몰락 이후 삼성그룹은 2000년 1위 자리를 탈환하며 재계가 아닌 한국경제를 이끌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성그룹을 빼놓고선 한국경제 자체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대한 거미줄 혼맥도

그룹의 덩치도 덩치지만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각종 유무형의 자산과 파워는 이미 국내를 넘어서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삼성’이라는 브랜드는 국제적인 상표가 되어 있는 한편 세계 어느 곳에서도 삼성의 흔적을 찾는 게 어렵지 않다. 삼성의 독주란 재계의 시샘어린 말이 나올만 하다.
세계 지도를 놓고 대한민국 서울 태평로의 삼성본관을 기점으로 전세계에 산재한 삼성의 해외 지사·공장·지점 등을 하나의 선으로 그려보면 마치 부채살과 같은 촘촘한 거미줄 그림이 그려진다.
생산과 영업, 그리고 관리로 대표되는 삼성의 이 같은 거미줄은 혼맥도에 그대로 옮겨진다. 국내 최고의 재벌답게 혼맥도 역시 재계와 정계, 그리고 관계와 언론계에까지 국내의 거의 모든 재벌과 권문세가를 포괄하며 방대한 지도를 그리고 있다.
이 같은 삼성그룹의 혼맥도는 타 그룹과 달리 삼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다. 인위적인 사돈관계라면 LG그룹의 창업주인 고 구인회 회장과 법무장관·내무장관을 지낸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은 삼성그룹의 혼맥도를 화려하고도 방대하게 거미줄화 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한다.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1910년 경남 의령군 정곡면에서 경주이씨 문중의 부친 찬우씨와 안동권씨 문중의 모친 재림씨 사이에서 2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열여섯 살 되던 1926년 부친이 정해준 박두을씨와 결혼했다. 박씨는 순천박씨로 조선 초기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이다.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
김병관 전 동아일보 회장
구인회 LG 창업주
노신영 전 국무총리
임창욱 대상그룹 명예회장
‘의인물용 용인물의’

청과물 판매상에서 오늘날 세계적인 기업으로 삼성그룹을 키워낸 이 창업주의 창업과정과 숱한 일화들은 그간 다양한 매체를 통해 일반에 소개됐다. 특히 최근에는 MBC TV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함께 이를 드라마로 방영하고 있어 굳이 언급할 이유가 없다. 다만 이 창업주와 다른 경영인의 차이점이라면 그는 천부적인 투시력과 재능을 갖춘 사업가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정보수집과 분석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용병술에 있어서도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용병술과 관련 1938년 대구 견동에서 첫 사업으로 삼성상회를 경영할 때 사업이 정상궤도에 오른 1년 후부터 지배인이었던 이순근씨에게 인감과 수표책을 모두 맡겼던 사례가 자주 거론된다. 사람을 한 번 믿으면 모든 것을 위임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스타일, 즉 부하직원에 대한 상상을 뛰어넘는 신뢰를 보냈던 것이다. 이 같은 용병술은 이 창업주가 경영에서 손을 뗄 때까지 지속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이 창업주는 신입사원을 선발하는 면접 때 장안에서 제일 가는 관상가를 옆에 앉혀 놓고 응시자들의 인성을 자기 나름대로 평가, 당락을 결정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때문에 ‘이병철 경영철학’의 중심사상이 ‘의인물용 용인물의(擬人勿用 用人勿疑):의심가는 사람은 쓰지 말고 한번 쓴 사람은 의심하지 말라)로 전해지고 있다.
이와 함께 이 창업주는 뛰어난 정보수집가였다.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완벽한 정보수집을 하도록 지시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8년 삼성상회를 열어 건어물·청과물을 취급하는 무역업을 하기로 결정내리기 전에 이 창업주는 2개월 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 베이징, 상하이를 여행하면서 적합한 업종선택에 고심했다. 또 반도체 사업 시작 전에는 도쿄와 미국 실리콘밸리에 정보센터를 설립하고 온갖 정보를 수집하며 관련 서적을 섭렵했다. 이 과정을 거쳐 사업결정을 내리면 그는 또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하며 밀어붙였다. 이때 이 창업주는 사돈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1968년 사돈기업이었던 LG가 독점하다시피 한 전자부문에 삼성이 진출, 두 집안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었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이 창업주는 사돈이었던 LG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기로 구인회 창업주와 약속했지만 산업의 조류를 살피던 그는 전자·전기산업과 나아가 반도체사업에 승부를 걸지 않을 경우 삼성이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라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사돈들 대부분 그룹경영에 참여

국내 재계의 쌍벽이었던 이 창업주와 구 창업주는 10대 초반 함께 진주 지수보통학교를 다니면서 친분을 쌓은 죽마고우로 사돈까지 됐다.
이 창업주는 부인 박두을씨와의 사이에 3남4녀를 포함해 모두 4남6녀를 두었다.
장남으로 한때 삼성그룹 대권을 물려받았으나 물러나 현재 야인생활을 하고 있는 맹희씨는 1958년 손영기 농림부 양정국장의 딸 복남씨와 결혼했다. 손영기씨는 이후 경기도지사를 역임하다 1961년 당시 안국화재(현 삼성화재) 사장으로 영입됐으나 1976년 타계했다.
이 창업주의 맏며느리 손복남씨는 한때 안국화재 최대주주로 상무이사 직함을 가지고 경영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CJ(주) 대표이사 회장인 손경식씨는 손복남씨의 동생이며 CJ그룹 이재현 회장이 아들이다. 즉 맹희씨 일가는 삼성그룹에서 분가해 CJ그룹을 독자적으로 경영하고 있다.
맹희씨는 안국화재 업무부장을 시작으로 삼성물산, 미풍산업,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을 거치며 경영수업을 쌓았다. 이에 차기 대권은 당연히 장남인 맹희씨에게 넘어갈 것으로 전망됐다. 그러나 이 창업주는 1971년 ‘경영능력’을 이유로 맹희씨를 그룹경영에서 퇴출시키고 만다.
맹희씨는 2남1녀의 자녀를 두었지만 평범한 집안에서 사위와 며느리를 맞았다.
차남인 창희씨는 일본 와세다대학 유학시절 만난 아이치현 출신인 일본인 여성 나카네 히로미씨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 23년만인 1986년 이영자라는 한국이름으로 개명했다. 이씨의 부친은 일본 미츠이물산에서 중역으로 일했던 나카네 쇼지씨로 알려졌다.
창희씨는 한비사건(사카린밀수사건)으로 삼성그룹을 떠나 1973년 설립한 마그네틱미디어코리아사와 1977년 인수한 특수세라믹사를 통합하여 새한미디어를 설립, 독자운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백혈병으로 건강이 급격히 악화돼 1991년 7월 미국에서 치료중 별세했다.
창희씨 사망 이후 부인 이영자씨는 새한그룹 회장으로 취임, 장남 이재관씨와 경영에 참여했다. 그러나 부회장으로까지 승진하며 새한그룹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됐던 이재관씨가 분식회계를 통해 1천억원대의 불법대출을 받아 구속돼 경영권을 상실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이영자씨도 경영에서 손을 뗐다.

“건희에 비해 너무 큰 키 아니냐”

두 형을 제치고 삼성그룹 경영대권을 거머쥔 3남 건희씨는 법무장관·내무장관을 거쳐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홍진기씨의 장녀 나희씨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부친이 서로 의기투합, 사돈을 맺자는 합의 아래 추진돼 성사됐다.
이병철-홍진기 두 사람의 교분은 4·19 후 고 홍 회장이 3·15 부정선거와 관련돼 옥고를 치루고 있을 때 시작됐다. 자유당 시절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역임한 고 홍 회장의 능력을 높이 산 전 국무총리 신현확씨가 이 창업주에게 고 홍 회장을 천거하자 이 창업주가 형무소로 면회가고, 또 집으로 찾아가 가족들을 위로한 게 인연이 됐다. 고 홍 회장은 출감 후 삼성에 몸담아 1965년 라디오서울(동양방송 전신)을 개국하면서 경영을 맡았다.
이 회장과 부인 홍나희씨는 일본 하네다 공항에서 첫 대면한 뒤 7개월 후인 1967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 회장의 모친인 박두을씨는 홍나희씨를 처음 보고 “건희 키(1백68cm)에 비해 너무 큰 키(1백65cm) 아니냐”며 걱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어머니를 닮아 손자손녀들의 키가 큰 것을 보고 “2세를 위해 큰 여자가 괜찮다는 건희 말이 맞았다”며 좋아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이병철 가문의 혼맥도는 바야흐로 거미줄망을 형성하게 된 계기를 맞는다. 이 회장의 처가인 홍진기 가문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와 신직수 전 중앙정보부장과 사돈을 맺고 있다. 또 노 전 총리는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과 사돈을 맺고 있어 이병철 가문은 현대 정주영 가문과도 혼맥으로 연결되고 있다.
이 회장의 자녀는 1남3녀. 한창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장남 재용씨는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장녀 세령씨를 부인으로 맞았다(본보 443호 ‘대상그룹과 임대홍 창업주’ 편 참조). 또 차녀 서현씨는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의 아들 재열씨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이병철 가문은 중앙일보에 이어 동아일보와도 사돈을 맺게 됐다.

엘리트 사위들

이 창업주의 맏딸인 인희씨는 고려병원(현 삼성강북병원) 고문을 지낸 조운해씨와 결혼했다. 그는 경북지방의 대지주였던 조범석가의 자제로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한 의사출신이다.
차녀 숙희씨는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3남 구자학 아워홈 회장과 결혼했다. 당시 이들의 결혼을 두고 “한국 재계의 쌍두마차인 삼성과 LG가 사돈을 맺는다”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삼성의 전자부문 진출로 LG와 불협화음이 일자 양가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되기도 했다.
셋째딸 순희씨는 남편과 이혼한 것으로만 알려지고 있다.
이 창업주가 애틋하게 여겼다는 넷째딸 덕희씨는 이정재씨의 아들 종기씨와 결혼했다. 이종기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중앙일보 사장을 거쳐 제일제당 부회장과 삼성화재 회장을 역임했다.
다섯째딸 명희씨는 4·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 및 삼호무역 회장을 지낸 정상희씨의 차남 재은씨와 결혼했다. 현재 조선호텔 회장으로 재직중인 정재은씨는 삼성그룹 경영에 깊숙이 참여하기도 했다.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수학한 당시로서는 보기드문 엘리트였다.
명희씨의 장남 정용진 신세계 부사장은 탤런트 고현정씨와 결혼해 한때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나 최근 이혼했다.
이 창업주는 이들 자녀 외에 일본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4남 태휘씨와 6녀 혜자씨가 있지만 모두 일본인과 결혼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다. 다만 태휘씨는 일본 게이오 대학 출신으로 이 창업주 생존시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와 제일제당 상무까지 지냈지만 부친 별세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빌딩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지고 있다.

난세의 지혜, 혼사에 반영

이처럼 이 창업주의 4남6녀 자녀들의 혼사에서 손에 꼽을 만한 권세가는 생각보다 적다. 이는 이 창업주의 평소 생활철학 혹은 처세학이 만들어낸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 일제하에서 사업을 시작해 일제의 멸망까지 목격한 후 한국전쟁과 4.19, 자유당 몰락, 5.16 등 숱한 풍상을 겪는 과정에서 “특정 정치세력과는 지나치게 가깝지도, 지나치게 멀지도 않은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난세를 사는 지혜를 터득해 이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창업주 가문에서는 정계와 재계, 관계와 언론계 등 내노라 하는 권세가가 모두 등장한다. 이 창업주 스스로 이를 만들려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권문세가와의 통혼이 이뤄졌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창업주 가문의 혼맥도를 살펴보면 구인회가와 홍진기가를 거쳐 사돈의 사돈을 따지다보면 무려 50여 개의 권문세가들이 이병철가의 혼맥도 하나에 집대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사돈의 사돈이 직접 이병철가와 사돈을 맺는 경우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 창업주의 차녀 숙희씨가 구인회가로 출가한 이후의 혼맥도에서 구인회→허정구→김동조→정주영→노신영→홍진기→이병철가로 이어지는 순환형태가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또 두 명의 대통령이 이병철가 혼맥에서 등장하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과는 다섯 다리를,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네 다리를 건너면 사돈으로 연결된다.

혼맥도 단골 김복동, 삼성 혼맥에도 등장

재계 혼맥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몇몇 가문은 이병철가에서도 어김없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이들은 많은 가지를 내놓고 재벌가문의 혼맥도의 동맥역할을 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즉 여기저기 널린 여러 가문들을 최단거리로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가문으로 이병철가를 비롯해 김복동 전 육사교장,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주, 구인회 LG그룹 창업주, 송인상 효성 고문,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주, 허정구 전 삼양통상 명예회장, 홍진기 전 재무장관, 노신영 전 국무총리, 양택식 전 서울시장 가문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김복동 전 육사 교장은 김한수 한일합섬 창업주의 4남 중산씨와 강성진 전 증권업협회장의 2남 흥구씨를 사위로 맞았고, 그의 여동생 옥숙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정숙씨는 금진호 전 상공장관에게 출가해 혼맥도에서 등장 빈도가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 사돈가인 김한수가와 강성진가는 다같이 양택식 전 서울시장 가문과 통혼하고 있다. 따라서 김복동가의 혼맥도에서 삼성은 물론 LG, 현대, SK, 두산 등 재계 인사들의 이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어쨌든 삼성그룹은 2대 이건희 회장에 이어 3대로의 경영대물림을 위한 정지작업을 한창 진행중이다. 걸림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회장의 장남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로의 후계구도를 뒤집을 만큼은 아니라는 게 재계의 공통된 관측이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얽히고 설킨 두산그룹의 4세 경영권 레이스
형제들에 의한 집단경영체제, 4세에서도 이어질지 관심
 
두산그룹이 4세 경영체제로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경영권 향배와 형제들에 의한 지분분할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두산그룹 오너진영 4세들의 경영 전면배치가 두드러지고 있다. 4세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아직 경영전권 이양을 운운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빠르다는 반론이 우세하지만 황태자 책봉을 둘러싼 내부 경쟁체제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했다는 분석은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만 두산그룹이 향후 경영체제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와 같이 집단경영체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4세 가운데 경영전권을 물려받을 황태자가 탄생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두산그룹의 경영체제는 여느 그룹과는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박승직 창업주에 이어 경영권을 물려받은 고 박두병 회장 시절엔 1인 경영체제가 확고했다. 3세에 이르러서도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았을 때까지만 해도 장남 승계 원칙에 따른 전통적인 경영체제가 이어지는 듯 했다.

형제에 의한 집단경영체제

그러나 박 명예회장이 지난 96년 그룹회장직에서 물러나 손아래 동생인 박용오 회장에게 경영전권을 넘긴 이후 1인 경영체제는 변화를 가져왔다. 즉 박용오 회장이 그룹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는 명목상일 뿐 형제들이 각 계열사의 최고경영자로 독립적인 경영을 하고 있는 한편 계열분리를 하지 않는 집단경영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두산그룹의 오너 일가인 박용오 회장의 형제는 모두 6남1녀. 이 가운데 직간접적으로 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형제는 모두 4명이다. 박용곤 명예회장을 비롯해 박용오 그룹회장,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 박용만 두산 사장 등이 그들이다. 여기서 박용곤 명예회장은 실질적인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박용오 회장을 중심으로 두 형제가 그룹경영에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두산그룹의 경영체제에 대해 재계 관계자들이 집단경영체제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룹회장이 존재하지만 형제들에 의한 독립경영, 그렇다고 계열분리는 하지 않은 독특한 경영구조가 두산그룹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들은 두산그룹 3형제에 의한 집단경영체제는 지난 90년 두산그룹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페놀사건 당시 굳어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당시 두산은 장남인 박용곤 명예회장이 그룹회장직을, 차남인 박용오 그룹회장이 그룹부회장을, 3남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이 기획실장직을 맡아 3형제 협의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같은 3형제 협의체제는 페놀사건으로 박용곤 당시 그룹회장이 물러나면서 깨지는 듯 했지만 5남 박용만 사장이 성장, 경영인 대열에 합류하면서 박용오-용성-용만 3형제 체제로 복귀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형제간의 경영권 수평이동

두산그룹이 형제 협의체제에 의해 그룹경영을 할 수 있는 데에는 박두병 선대회장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박 선대회장은 기업과 가정에서 유난히 인화를 강조했다. 형제간 분쟁없이 1백년이 넘는 기간 동안 화목한 기업경영을 하고 있는 것 역시 이 같은 선대의 유지와 관련이 있다.
때문에 그룹경영권이 대를 잇는 게 아니라 형제간에 수평적으로 이양되는 사례가 흔치 않은 우리 기업사에서 두산그룹이 주목을 받았던 이유 역시 이에 따르고 있다. 물론 SK그룹과 금호그룹의 사례가 없진 않다. 그러나 SK의 경우 갑작스런 형의 사망으로 나이어린 조카를 대신해 아우가 그룹경영권을 넘겨받았을 뿐이다. 금호그룹 역시 경영에 큰 뜻이 없는 형이 물려받았던 경영권을 보다 적극적으로 기업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동생에게 물려줌으로써 선친의 유지를 이어가고자 했던 게 더 강했다.
그러나 두산의 경우 이들 그룹과는 달리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아우에게 물려주는 한편 아우들과 함께 집단경영체제를 갖추면서 기업을 이끌어가는 사례는 아직까지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4세대가 넘겨받을 두산그룹의 경영권 역시 현재와 같은 집단경영체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대부분의 그룹들이 2세 혹은 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겪어야 했던 계열분리라는 과정을 겪지 않고 4세에서도 독립경영을 기반으로 한 집단체제, 즉 두산그룹이라는 큰 틀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관측이다.

박정원
(주)두산 상사부문 사장
박경원
전신전자 회장
박진원
(주)두산 상무
4세대 경영체제 관심

그러나 일부에서는 계열분리를 하겠지만 그룹의 틀이 유지되면서 4세 가운데 1명은 황태자로 책봉을 받아 그룹경영의 전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현재의 집단경영체제는 형제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사촌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이다. 특히 지분관계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촌으로까지 집단경영체제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욕심이라며 자칫 사촌들간의 경영권 분쟁도 감수해야 할 것이라는 경고도 내놓는다.
두산그룹 경영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4세들은 모두 9명.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오너 일가의 장자인 박정원 (주)두산 상사부문 사장과 친동생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부사장, 차남인 박용오 그룹회장의 장남 박경원 전신전자 회장과 차남 박중원 두산산업개발 경영지원본부 상무, 3남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장남인 박진원 (주)두산 상무와 차남인 박석원 두산중공업 차장, 그룹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중인 4남 박용현씨의 장남 박태원 네오플럭스 상무와 차남인 박형원 (주)두산 차장, 그리고 3남인 박인원 (주)두산 과장 등이 그들이다. 모두 5명의 4세들이 두산그룹의 임원으로 포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차기 두산그룹의 경영대권 경쟁에 유력하게 거론되는 4세는 박정원 사장과 박경원 회장, 그리고 박진원 상무.
박 사장은 고 박승직 창업주-고 박두병 회장-박용곤 명예회장-박정원 사장으로 이어지는 두산그룹 로열패밀리의 장자로 가장 유리한 고지에 올라있다. 장자승계의 원칙이 지켜진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박 사장이 그룹회장직을 거머쥘 수 있다.

재계 최초의 4세 최고경영자

지난 2001년 재계 사상 처음으로 4세 최고경영자 시대를 연 박 사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85년 두산실업(현 두산상사) 사원으로 그룹경영에 첫발을 내딛었다. 93년 동양맥주(현 OB맥주) 차장으로 자리를 옮긴 박 사장은 부장·이사대우·상무로 승진했으며 99년 12월부터 두산 부사장으로 착실한 경영수업을 받아 사장에 올랐다. 사원부터 시작해 직급을 빠뜨리지 않고 경험한다는 두산그룹의 후계자 수업 원칙을 박 사장도 그대로 밟은 것이다.
특히 두산그룹은 집안내 서열을 중시하는 가풍이 이어지고 있어 4세 경영체제로의 전환이 본격화될 경우 두산그룹의 회장은 단연 박 사장의 몫이 될 것이라는 게 재계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박 사장의 경영대권 행보에서 최대 경쟁자로 예상되는 4세는 박용오 그룹회장의 장남인 박경원 전신전자 회장이 꼽히고 있다. 연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대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박 회장은 두산상사 입사를 시작으로 그룹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두산건설 영업본부 상무로 근무하다 지난 2002년 3월 코스닥 등록기업인 전신전자를 인수해 벤처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최근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돼 대권 레이스에서 위태로운 상황에 몰려있다. 지난 2001년 4월 부도가 난 (주)이룸(현 케이아이티브)이 경영정상화를 위해 유상증자와 별정통신업체인 제니시스멀티미디어(현 잇츠티브)의 인수를 앞두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차명계좌를 개설, 이룸의 주식을 매입해 시세차익을 얻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이다.
박 회장은 당시 이룸이 인수에 나선 제니시스멀티미디어 회장으로 미공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지난 6월21일 박 회장과 현직 변호사 박모씨가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의해 약식 기소돼 벌금 2천만원을 냈다.
이 사건은 재벌 4세와 현직 변호사의 부당 내부거래라는 점에서 충격을 주었다. 특히 그 수법이 전형적인 재벌일가의 모럴 해저드를 보여줘 강도는 더했다.
이와 함께 박 회장이 두산그룹에서 독립해 독자적인 전신전자 경영에 매달려 있다는 점도 대권 레이스에서 약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너일가라 해서 외부의 경영인을 그룹회장으로 영입한다는 게 전혀 사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박진원, 차세대 주자로 급부상

박 사장과 박 회장의 양자 대결로 진행되던 두산그룹의 4세 경영권의 향방이 이처럼 박 회장의 불미스런 사건 연루와 두산그룹에서의 독립경영 등으로 대오 이탈이 예상되고 있는 가운데 최근 박진원 상무가 급부상하고 있다.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의 장남인 박 상무는 최근 (주)두산 전략기획본부 TRI-C팀 부장에서 상무로 승진, 그룹경영권을 넘보고 있다. 특히 박 상무는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주)두산의 인사와 재무 등을 총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외환위기 때부터 그룹의 구조조정을 사실상 진두지휘해온 핵심 조직인 전략기획본부 TRI-C팀을 맡고 있어 박 사장과의 경영권 레이스에 힘이 실리고 있다.
특히 박경원 회장이 부당 내부정보에 의한 주식 매매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시점에 발표된 박 상무의 승진은 의미가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제기되고 있다.
보성고와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뉴욕대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수료한 박 상무는 외환위기 이전부터 재계에서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바 있는 두산의 구조조정을 실무적으로 진두지휘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때문에 재계 관계자들은 박 사장의 강력한 경쟁자로 박 상무를 지목하고 있다. 그룹 내부에서도 박 상무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향후 두산그룹을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4세의 경영권 승계 차원에서 박 상무의 향후 역할론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고 있다.
이는 아직 두산그룹 경영권의 형태에 대한 논의가 마무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하고 있다. 또 장자인 박정원 사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박정원-지원-진원 삼각편대

현재와 같은 형제들에 의한 집단경영체제가 굳어질 경우 두산그룹의 향후 경영권은 박정원 사장-박지원 부사장-박진원 상무로 연결되는 3형제 체제가 지배적인 관측이다. 현재 60대의 박용오 회장-박용성 회장-박용만 사장 체제의 삼각편대가 4세대에 이르러서는 이들 3명의 형제들에게 이양될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룹 일부에서는 차세대 경영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박용성 회장의 가족이 그룹에서 분리, 독립한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즉 박용성 회장과 박진원 상무에 의해 두산중공업이 계열분리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산그룹은 형제들 간의 지분관계가 다소 복잡한 데다 IMF 관리체제를 거치면서 9개 계열사가 한꺼번에 (주)두산으로 합병되는 등 사업부문까지 얽혀있어 교통정리가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자칫 현대그룹과 같은 ‘왕자의 난’까지도 충분히 예견된다는 것이다.
4세 체제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두산그룹의 향후 경영권 향배와 형제들에 의한 계열분리가 재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한정곤 기자 allen@ilyosisa.co.kr

 

 

 

 

 

 

<출처;gall.dcinsi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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