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지도들
[역사] '한반도 지도'의 비밀 우연히 접하게 된 구한말의 지도. | ||||||||
마지막 황실’에 관해 이야기하던 이씨가 화제를 바꿔 “궁궐서 나온 지도를 갖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이경길 숙부(작고·의친왕의 여덟째 아들)로부터 한 장의 지도를 건네받았다”며 “(숙부께서) 돌아가시기 전, 내 손을 꼭 잡고 지도를 넘겨주면서 ‘소중히 보관하라’고 당부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뉴스’였다. 물론 이 한 장의 지도가 ‘만주는 우리 땅’이란 물증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한반도 이남에 국한돼 있던 우리의 국토관을 만주 이북으로 넓힐 수 있는 ‘단초’는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의욕이 생겼다. 하지만 이 한 장의 ‘괴지도’로 인해 조선말~구한말에 얽힌 국사 공부를 다시 하게 될 줄은, 그 때까지만 해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라며 “시간이 촉박하면 또 다른 사본을 갖고 있는 사람과 만나게 해 주겠다”고 말했다.
문제의 괴지도 이름은 ‘조선말의 한국지도’였다.<사진1> 이 지도에는 ‘주후(主後;서기) 1824년 9
월 9일(순조 24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오 16세 조선교구 제정’이란 부제가 붙어있었다. 이종진 박사는 길이 80㎝ 가량의 지도를 실물크기로 복사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지요.” 이 박사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기자, 연해주 이북~흑룡강성 일대까지 조선의 영역으로 표기한 지도는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박사는 액자에 보관된 또 하나의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 보세요. 교황청 지도하고 같죠? 이 지도는 아까 지도보다 100여년 전인 1700년대에 제작된 것입니다. 이 지도도 흑룡강성 일대까지 조선의 땅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 박사가 보여준 지도<사진2>는 영문으로 된 고지도였다. 오른쪽 위에 별도의 명칭 없이 ‘Asia, T. Jeffery, Sculp’라고 적혀 있었다. T. Jeffery라는 사람이 작성한 아시아 지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위쪽 구석엔 170 degrees East Long from London이라 쓰여 있었다. ‘런던 동쪽 170도’라는 표기로 미뤄 영국서 만들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도는 이 박사의 말처럼 지금의 흑룡강성 일대를 조선의 영역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동해를 ‘Sea of Coree’라 적은 점이었다. 이것은 당시 해양강국 영국서 이 바다를 ‘일본해(Sea of Japan)’가 아닌 ‘동해’로 불렀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중국 입장에서 간도는 변방에 있는 척박한 땅으로, 일종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땅이었지요. 백두산 정계비가 세워지기 전까진 사람들의 의식상 만주를 조선의 땅으로 간주해 왔습니다. 이 시기까지는 대부분의 지도가 만주를 조선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간도가 조선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백두산 정계비(定界碑)란 1712년(숙종 38년) 백두산에 세운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경계비를 말한다. 이?계기로 조선과 청은 서쪽으로는 압록강을, 동쪽으로는 토문강(西爲鴨綠, 東爲土門)을 경계로 삼게 된다. 170년이 지난 1881년(고종 18년) 청은 간도개척에 착수했다. 조선은 1883년 어윤중·김우식을 보내 정계비를 조사한 뒤, 이중하·조창식 등을 보내 간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하지만 청은 “동쪽 경계로 삼은 ‘토문(土門)’은 두만(豆滿)강을 말한다”고 주장해 해결을 보지 못했다. 백두산 정계비는 만주사변 때 일제가 철거해버렸다. “바티칸에서 작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흑룡강성까지 한인이 이주해 있었다는 사실을 교황청에서 인정한 것이 됩니다. 조선의 영향권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만주 일대가 조선의 행정구역은 아니었어요. 게다가 교구를 그린 지도가 국경을 바르게 표현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그렸다는 세계지도<사진2> 말이에요. 당시 서양 고지도는 국경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 드물어요. 이 지도의 경우, 지금 상태로 봐서는 이 경계가 국경인지 하천인지 불분명합니다.” ‘조선말의 한국지도’에 해설을 붙인 것으로 돼 있는 명지대 출판부의 답변은 상황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관련 자료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괴지도’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한국교회사연구소를 통해서였다. 지도를 검토한 연구소의 최기영 실장은 “이 지도는 1924년 파리 외방정교회가 영문·불문판으로 발행한 것”이라며 “한국의 가톨릭(Catholicism en Coree)이란 인쇄물에 별지로 들어가 있던 지도”라고 말했다. 최 실장은 “원본은 흑룡강성 부분이 지도 오른편에 별도로 붙어있었다”며 “이 사본은 누군가가 그것을 지리적 위치에 맞게 잘라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괴지도의 정체는 ‘유사복제품’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개운치 못한 것은 여전했다. 간도를 조선땅으로 그린 수많은 지도들, 국보인 조선방역도, 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의 기록들, 윤관이 쌓았다는 선춘령, 고려지경(高麗之境)이란 비석…. 이 유물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1712년(숙종 38년) 5월, 강희제는 국경을 명백히 하려는 목적으로 ‘오라총관’ 목극등을 파견했다. 오라(烏刺)란 만주 일대를 일컫던 당시 표현이다. 조선은 참판 박권을 접반사(接伴使)로 임명해 일을 처리하게 했다. 하지만 목극등은 “100리가 넘는 산길을 노인이 가기 어렵다”며 박권을 따돌린 채, 군관 이의복 등 조선의 하급관리만을 동행해 정계비를 세운다. 이때 새겨진 비문이 유명한 ‘서쪽은 압록을, 동쪽은 토문을 경계로 한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것이다. 중국과 한국 양측은 ‘토문’의 해석을 놓고 ‘두만강이냐, 송화강 지류인 토문강이냐’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송화강 지류로 국경이 설정될 경우, 만주 일대는 물론 흑룡강성 일부를 아우르는 광대한 지역이 한국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논란을 거듭하던 한·중 국경문제에 끼어든 ‘이방인’은 일본이었다.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만주철도 부설권을 얻는 대가로 1909년 ‘간도협약’을 체결,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이같은 사실은 외교부가 1996년 1월 15일 공개한 ‘외교문서 251건’에 포함된 ‘간도문제와 그 문제점’이란 비밀해제 문서를 통해 사실로 밝혀졌다. 이 보고서는 일본이 ‘간도지방이 조선의 영토라는 점을 전제로 정책을 폈다’는 사실을 명확히 밝히고 ‘일본이 남만주 철도의 안봉선 개축문제로 이해가 대립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간도를 희생시켰음’을 확인해줬다. ‘간도협약의 법적 지위’를 연구하는 인천대학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협약 자체가 무효”라고 주장한다. 노 교수는 “을사조약은 말 그대로 ‘보호조약’의 성격을 갖고 있다”며 “따라서 조선 국익에 저해되는 행위는 조약이 명시한 일제의 권한 밖의 일이므로 유효하지 않다”고 말했다. “간도협약은 조약 체결권자인 대한제국 황제의 비준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카이로·포츠담 선언, 샌프란시스코 조약 등을 통해 일제가 식민지에서 처리한 모든 조약이 무효화 됐습니다. 그런데 유독 간도협약 만큼은 예외로 있는 것이지요.” 노 교수는 “국제법 이론상 통상적으로 100년 이상 어떤 지역을 점유하면 점유지에 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준을 어느 시기로 삼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1909년 간도협약을 기준시점으로 삼을 경우, 2009년이 되면 간도의 영유권은 중국으로 영구히 넘어갈 가능성이 있게 된다. 6년이 채 남지 않은 것이다. “언론이나 학계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 없습니다. 정부가 외교채널을 통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힘겹게 중국과 수교를 맺었는데 굳이 관계를 불편하게 할 것 있냐’면서 간도 문제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노 교수는 “우리 정부는 역대로 역사나 주권, 영토에 관한 문제에 너무 무심했다”며 “중국은 간도에 관한 한국 내 연구상황을 정기적으로 파악,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국경문제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상태 연구관도 “중국은 사회과학원 안에 ‘변방사문제연구소’를 설치, 한·중 국경문제를 심도있게 살피고 있다”며 “한반도 통일 후 생길 수 있는 영토분쟁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방사회복지회의 김득황 이사장은 “1906~1907년 일제 통감부의 사이토 중장이 간도를 답사, 그곳이 조선 땅임을 인정한 바 있다”며 “일제도 인정했던 조선의 영토를 후손인 우리가 외면해서야 되겠느냐”고 말했다.
2. 간도에 관한 역사적 증거물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백두산 정계비는 일제가 1900년대에 철거했고, 윤관이 두만강 건너 700리에 세웠다는 ‘고려지경’도 사라지고 말았다. 언제 누가 훼손했는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였는지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9성의 위치에 관해서도 ‘두만강 이북까지 갔다’는 주장과 ‘함경도지역이었다’는 주장만 팽팽할 뿐, 정확한 사실(史實)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3. 간도가 ‘우리 영역’임을 나타낸 지도는 1737년 프랑스 지리연구가 당빌(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 전도’<사진7>, 청나라가 8년의 측량을 거쳐 1716년에 완성한 ‘황여전람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보관하고 있는 ‘한중삼국접양지도’, 규장각에 보관된 ‘천하총도오라지도 ’ 대한제국이 작성한 ‘대한신지지’, ‘서북피아만리지도’, 국보 248호인 ‘조선방역도’, 1769년 프랑스가 제작한 ‘아시아 지도’<사진3>, 1854년 러시아가 만든 ‘아시아 전도’<사진4>, 1850년 독일이 제작한 ‘동아시아 전도’<사진5>, 제작 연대 미상의 프랑스판 ‘아시아지도’ <사진6> 등이 다수가 남아있다.
|
'뿌리와 역사 > 역사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인류의 발생 과 이동 역사문화 (0) | 2008.11.20 |
---|---|
◈ 새로운 한국 고대 역사 (0) | 2008.11.19 |
♤ 부도지 란 ? (0) | 2008.11.02 |
◈백두산 위치도 조작됐다 (0) | 2008.10.28 |
◐ 만주지도 (0) | 2008.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