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국가민속문화재

국가민속문화재 제231호 홍성 노은리 고택

오늘의 쉼터 2008. 5. 10. 14:10


종     목

국가민속문화재 제231호

명     칭홍성 노은리 고택 (洪城 魯恩里 古宅)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 주거건축 / 가옥
수량/면적

1필지/3,088㎡

지 정 일

1996.02.13

소 재 지

충남 홍성군 홍북면 최영장군길 11-26 (노은리)

시     대조선시대
소 유 자

홍성군 

관 리 자

홍성군 

일반설명

이 고택은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 분인 성삼문과 관련된 집으로 성삼문의 외손자인 엄찬이 살았던 집으로 1676년 전까지 성삼문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병자사화** 당시 성삼문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처형되어 성삼문의 둘째딸(효옥)이 이곳으로 와 부친의 제사를 지내며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

약간 높은 대지에 경사진 지형을 활용하여 서쪽을 바라보도록 하였는데, 안채를 ’⊓‘자로 놓고, 그 앞에 행랑채를 ’−‘자로 놓아 전체적으로 ’ㅁ‘자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안마당은 외부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안채의 큰 마루인 대청은 탁 트인 공간이므로 내부는 넓게 느껴진다.

안채 큰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은 안방과 부엌을 두었고, 오른쪽은 건넌방, 출입을 위한 중문을 두고 있다. 행랑채는 헛간과 창고, 작은방을 두고 있다.

이 고택은 충청지역과 경상지역의 건축기법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대지의 단차에 의해 안채가 행랑채보다 높아짐에 따라 다락을 가지는 점은 경상지역의 특징이며, 안채에서 돌출된 양쪽 익사**의 폭이 다른 점은 충청지역의 특징이다.

*사육신 - 단종을 임금으로 받들려다 목숨을 바친 6명의 인물로 성삼문, 이개, 박팽년,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를 가리킨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충성과 의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병자사화 - 조선 세조2년(1456)에 성삼문 등이 세조의 왕권 강화책에 반발하여 단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세조를 축출하고자 한 사건.(사육신사건)

**익사 - 한자는 날개 익(翼)자로 안채의 큰마루를 중심으로 날개처럼 돌출된 부분을 말한다.

※ 위 문화재는 일반적으로 관람이 가능하나, 소유주 등의 개인적 사정으로 관람이 제한될 수도 있습니다.


전문설명


홍성읍에서 예산으로 가는 국도 10㎞ 지점에서 마을길로 2㎞ 들어가 노은리 마을에 소재하고 있다. 건립당시에는 문간채, 안채 등이 있었으나 문간채는 지금은 없다. 1670년대에 성삼문의 외손인 엄찬의 고택으로 전하는 고옥이나 지금은 연고가 없는 개인의 소유가 되어 있다. 1939년 까지 이능우(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4-7번지)의 소유였다가 1992년에 서기봉(홍성군 홍복면 대인리 589번지)의 소유가 되었다. 건물상태는 지붕기와가 많이 이완되고 연목 일부가 파손되어 있으나 중요부재(기둥, 보등)은 좋은 상태이다.

이 마을(엄찬 고택으로 부터 약 500m 거리)에는 성삼문 관련 유적으로 노은단(성삼문 위패를 모신 단), 노은서원유허비 등이 있으며 충청남도에서 이 마을을 전통문화보존마을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성삼문(사육신 1418년∼1456년, 태종 18년∼세조 4년)의 외손인 엄찬의 고택으로 전래된다. 송시열의 "성선생신주천봉기"에 의하면 이 집에서 1672년부터 1676년 까지 4년간 성삼문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렸다고 한다. 성삼문의 위패는 서울 인왕산에서 발견되었는데 성선생의 둘째 딸이 친정 아버지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렸다고 전한바에 따르면 이 건물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문간채 정면

중문간채 측면

안채 안마당

안채 대청에서 바라본 모습

서익랑 광의 상부다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