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경남문화재자료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호 월영대(月影臺) 지정해지

오늘의 쉼터 2008. 3. 13. 19:43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호
명 칭 월영대(月影臺)
분 류 유적건조물 / 주거생활/ 주거건축/ 가옥
수량/면적 1동
지정(등록)일 1983.07.20
해 제 일 1993.01.08
소 재 지 경남 창원시  해운동 8-4
시 대

?

소유자(소유단체) 마산시
관리자(관리단체) 마산시
상 세 문 의

경상남도 창원시 문화관광과 055-212-2181


 

일반설명

 

신라 말기의 학자인 최치원 선생이 이곳 합포만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최치원은 자가 해운이며, 시호는 문창후이다. 최치원(857∼?)은 가족과 더불어 이곳에 살다가

신라의 멸망을 미리 알고 합천 해인사로 망명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월영대는 그의 학문과 인격을 존경한 고려·조선시대의 문장가·선비들의 순례지가 되었

다.

월영대는 보호축대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안에 최치원 선생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

인 팔작지붕이다. 동쪽에 유허비가 있으며, 최치원이 해서체로 ‘월영대’라고 쓴 돌이 동북쪽에 있다.

 

이곳은 신라(新羅) 말기 문창후(文昌候) 해운(海運)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대(臺)를 쌓고 해변(海邊)을 소

요(逍遙)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다. 조선초 초기 학자 이첨(李첨)의 시에 『숲 끝에 집 짓고 월영대를

거닐었네』하였다. 이는 최치원이 산사(山寺)를 두루 다니시다가 마지막 정착지로 이곳을 택하여 가족과

더불어 살다가 신라 멸망을 예견하고 합천 해인사(海印寺)로 망명(亡命)하였다. 최치원선생이 돌아가시고

그의 학문과 인격을 흠모한 고려, 조선조때 많은 선비들이 이곳을 찾게되니 이곳은 우리나라 선비의 순례지

(巡禮址)가 되었다. 고려때 문신(文臣) 정지상, 명종(明宗)때 학자(學者) 김극기(金克己), 고려 충선(忠宣),

충숙왕(忠肅王)때 채홍철(蔡洪哲), 고려후기 학자 안축(安軸), 조선조때 초기의 대학자 이첨, 태종(太宗)때

문신(文臣) 정이오(鄭以吾), 세조때 문신 박원경, 조선중기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조때의 의사

(義士) 정문부, 조선조 후기의 박사해(朴師海), 손기양(孫起陽), 이민구(李敏求), 신지해 등이 이곳을 순례하

고 남겨놓은 명시(名詩)가 동문선(東問選) 여지승람(與地勝覽)에 남아 있다. 해서체(楷書體)로 월영대(月影

臺)라 새겨진 입석(立石)이 있는데 최치원의 친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월영대

의 입석이 있는데 세자(細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조선조 숙종 17년에 최위(崔瑋)가 창원도호부

사로 부임하여 이 『대(臺)』를 정화하고 『천세만세에 유린되지 말라』고 한 유허비(遺墟碑)를 동편 중앙에

세웠고, 서편에는 1930년경에 최씨 문중에서 추모비(追慕碑)를 세워 팔작지붕 비각안에 안치하였다. 「삼국사기」「보한집」(補閑集)「역옹패설」(轢翁稗設)「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동문선」(東文選)

「읍지」(邑誌) 등 많은 기록(記錄)을 상고(詳考)해 보면 그 경관(景觀)이 아름답고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천

여년동안 많은 선비, 시문학(詩文學)에 대가(大家)들이 최고운(崔孤雲)의 학덕(學德)을 흠모(欽慕)하여 끊임

없이 찾아준 아름다운 바닷가의 대(臺)였던 것이다.

 

 

해지사유: 경상남도 기념물 125호로 승격 



 

월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