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51호 여주 파사성

오늘의 쉼터 2008. 2. 20. 22:31


종     목 사적  제251호
명     칭여주 파사성 (驪州 婆娑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35,504㎡
지 정 일 1977.07.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산8-10
시     대백제
소 유 자국유
관 리 자여주군

일반설명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재위 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여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현재는 동문이 있던 자리와 남문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성의 일부가 한강변에 나와있어 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좋은 요새이다.


전문설명


남한강(南漢江)의 동안(東岸)에 있는 해발 230m의 우뚝솟은 산위에서 서남쪽의 작은 계곡(溪谷)을 에워싼 석축(石築)의 산성이다. 남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평야와 구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벽은 조선시대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새로이 개축(改築)된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이미 고산성(古山城)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는 여주(驪州)의 북방(北方) 53리(里)에 있으며, 둘레가 38,825척(尺)의 석축(石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산의 아래까지 포용한 대규모의 포곡식산성(包谷式山城)의 자태(姿態)를 연상케 하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이 산성(山城)의 전략적(戰略的) 중요성(重要性)을 다시 깨닫고 대대적인 수축공사가 진행되어 옛 고산성(古山城)의 실제 모습은 알 수 없게 되었다.

1595년(선조(宣祖)28) 3월에 비변사(備邊司)의 요청으로 승(僧) 의엄(義嚴)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수축(修築)하도록 하였는데 의엄(義嚴)은 성안에 집을 짓고, 성밖의 구릉과 평지는 둔전(屯田)을 마련하고 군사(軍士)의 양식(糧食)을 마련하였으며, 무너진 성벽은 승인(僧人)을 동원하여 수축(修築)하여 1597년에 공사(工事)를 마치었다.

당시의 전략적 개념으로는 이곳이 남한강(南漢江) 상류(上流)의 요충(要衝)으로 용진(勇進)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성원할 수 있고 서울을 지키는 관문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보다 상류의 조령방면(鳥嶺方面)으로 보장(保障)을 삼으려는 계획과 남한산성(南漢山城)의 효용(效用)이 강조되면서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는 수개(修改)가 없이 다시 퇴락되었다.

성벽은 길이 950m쯤이 거의 옛 모습을 보여주며, 성벽의 높이가 4∼5m나 된다. 성벽은 그 상단(상단)이 내외협축(內外夾築)이며, 석재(石材)가 고르게 사용(使用)된 점, 지형(地形)의 이점(利點)을 최대한 고려하고 남문(南門)·동문(東門)의 시설을 두고 있는 점과 수구(水口)의 구조에서도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일반적인 산성양식(山城樣式)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남문(南門)터에는 조선시대 수축(修築)??의 팔각주형(八角柱形) 주초석(柱礎石)이 남아있다.

동문(東門)터는 옹문(擁門)의 구조로 되어 있고, 장대(將臺)터는 너비 17m, 길이 13m의 긴네모꼴로 남아있다. 한강 상류지방에 있어서의 독특한 수구(水口)의 형식을 가진 수구(水口)가 남문(南門)에서 동무방향 10m쯤 떨어진 성벽에 남아있어서 우리나라의 성터들이 가지는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성안 남문터 안쪽에는 넓은 평지가 있고 지름이 5m쯤 되는 저수지 모양의 우물터가 있어 지금도 물이 고여있다.




파사성

파사성

파사성

파사성전경

파사성성벽

파사성성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