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만물창고

***** 미색으로 신라를 지배한 여인 미실(美室)

오늘의 쉼터 2007. 12. 30. 15:36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팥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 되리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이 노래는 화랑 사다함이 부른 청조가(靑鳥歌)이다.

청조가는 "내용이 몹시 구슬퍼 당시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해 전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서라벌의 애송곡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사다함은 이런 구슬픈 노래를 불렀는가?

그건 바로 미실과의 못 이룬 사랑 때문이었다.

사다함과 미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사다함이 전쟁터에 나간 사이 미실이 전군(殿君) 세종의 부인이 된 사실을 알고는 미실을 향한

자신의 사람을 노래로 승화시키려고 청조가를 지어 불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사다함을 죽게 한 미실은 어떤 여인인가?

 

『삼국사기』에는 사다함의 죽음에 대해 친구 무관랑의 죽음 때문이라고 전하지만

『화랑세기』는 그가 죽은 이유가 미실 때문이라 전하고 있다. *

 

뇌쇄(惱殺)란 말이 있다.

여자가 아름다움으로 남자를 매혹시켜 괴로운 상태를 뜻하는 말인데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미실이야 말로 뇌쇄라는 단어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화랑세기는 32명의 풍월주에 관한 역사서인데, 여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미실이다.

이는 그녀가 신라 사회에 미친 영향이 컸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미실은 진흥왕 중기부터 진평왕 초기까지 약 40년 동안 오로지 빼어난 미색 하나로 제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며 정계를 좌지 우지한 여결이었다.

절세가인으로 태어난 미실은 색공(色供)을 통해 진흥왕과 그의 아들 동륜태자,

그리고 동륜태자의 이복동생인 금륜태자(25대 진지왕), 동륜태자의 아들인 진평왕 등

할아버지에서 손자에 이르는 세 명의 임금과 한 명의 태자를 색정의 포로로 만들었으며

뛰어난 화랑인 사다함을 비롯하여 세종, 설화랑, 미생랑 등 네 명의 풍월주를

자신의 치맛자락 속에서 헤매도록 만들었다.

 

미실은 제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로 태어났으며,

그녀와 공식적으로 유일한 남편이었던 세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하종과 설화랑 사이에서 태어난

보종이 훗날 풍월주에 올랐다.

그리고 자신은 두 차례나 풍월주를 폐지하고 원화(源花)로써 그 자리를 대신하여 화랑을 거느렸다.

절세의 미인이요 희대의 색녀요 임금보다 강한 권력을 휘두른 여인 미실.....

그녀의 한 평생은 신라 화랑사와 불가분한 관계였다.

우리는 왜 이런 대단한 여결의 이름을 몰랐을까?

그녀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화랑세기가 세상에 나타난 덕분이다.

지금부터 미실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하겠다.

 

 

미실의 혈통은 대원신통(大元神統)이라고 한다.

대원신통은 신라 왕실에 왕비 등의 여자를 공급하는 혈통을 뜻한다고 한다.

(이종욱 교수의 견해, 대원신통은 인통이라고도 함)

그런데 신라에는 대원신통 이외에 신라 왕실에 왕비를 공급하는 진골정통(眞骨正統)이 있었다고 한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철저하게 모계로 이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즉 어머니에서 딸로, 딸에서 딸의 딸로 이어지는 특이한 혈통인 것이다.

이 두 혈통은 국왕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경쟁관계였다.

화랑세기를 보면 보미(寶美)라는 여성이 대원신통의 대원(大元)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보미는 13세 풍월주 김용춘의 먼 조상이다.

보미는 눌지왕 때 활약한 인물로 그녀를 100~150년 뒤에 활약한 미실과 연결하기는 힘들다.

그래서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이 대원신통의 직접적인 종주라 볼 수 있다.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은 1세 풍월주 위화랑의 장녀이다.

그녀는 영실에게 시집갔으나 얼마 안 있어 법흥왕의 사랑을 받았다.

그녀는 영실과의 사이에서 딸 묘도를 낳았다.

『화랑세기』 하종조를 보면 이 때 법흥제(법흥왕)가 옥진하고 약속하기를

 '네 지아비(영실)와 나는 일체(一體)이니 네가(옥진)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빈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옥진이 딸을 낳으니 바로 묘도(妙道)이다.

이 묘도가 바로 미실의 어머니이다.

법흥왕은 약속대로 묘도를 부인으로 삼았으니 법흥왕의 양기가 너무 센 반면

묘도는 성기가 좁아서 괴로워했다.

그래서 법흥왕은 묘도를 찾기 않게 되었다.

법흥왕과 멀어진 묘도가 2세 풍월주 미진부를 만나 그와 사랑에 빠져 낳은 자식이 바로 미실이다.

 

『화랑세기』는 미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碧花:소지마립간의 후궁)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五道:옥진의 어머니)를 닮아서 백 가지 꽃의 영검함이 뭉쳐 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한 몸매와 빼어난 미모를 갖고 태어난 미실에게 옥진은 전문적인 방사(房事) 기술을 가르쳤다.

미실은 대원신통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방사 기술을 열심히 배웠다.

그는 현란한 방사 기술로 왕실 남성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 생각했다.

화랑세기는 "옥진이 이 아이(미실)는 오도를 부흥시킬만 하다'라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내에게 교태 부리는 방법, 방중술의 비법, 시문과 가무 등 임금에게 색공(色供),

즉 여색으로 봉사하는 궁주로서 갖추어야 할 온갖 절기를 배운 미실은 마침내 절정의 색공(色功)을 갖춘

절세의 색녀로 태어나 숱한 사내를 울리게 된다.

평생 수 많은 남자와 관계한 미실이 정식으로 혼인한 남편은 6세 풍월주 세종 한 사람 뿐이었다.

세종은 진흥왕과 이부동복(異父同腹: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형제) 동생으로

어머니는 지소(只召) 태후였다

 

지소부인은 법흥왕과 소지왕의 딸 보도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법흥왕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삼촌인 김입종에게 시집가서 진흥왕인 김삼맥종을 낳았다.

남편인 입종이 먼저 죽어 과부가 되었는데 부왕이 죽기 전에 박영실을 계부(繼夫)로 지정했으므로

그와 재혼했다.

하지만 지소는 영실에게 애정을 못느껴 대신 이사부를 좋아했다.

이사부는 지소를 섬겨 그녀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이 세종 딸이 황하, 숙명, 송화였다.

이사부는 남편이 아닌 신하의 신분으로 지소 태후를 섬겼으므로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도 신하로 대해야만 했다

 

세종이 장성하자 지소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궁중에 모아 세종을 불러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고르게 했다.

이에 세종은 미실을  선택했다.

하지만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은 미실이 진흥왕의 후궁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미실이 궁에 들어가려 할 때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사도왕후, 진흥왕의 왕비)의 잉첩(시녀)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지

어찌 전군(세종)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 참 일도 얄�게 되었구나"

 

고 하자 미실이 옥진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빈첩(嬪妾)의 도는 색공(色供)에 있는데 궁중에 들어가면 어찌 제(帝:진흥왕)를 모실 기회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옥진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미실의 등을 어루만지며

 

"네가 족히 도(道)를 말하니 나에게는 근심이 없구나" 라고 말했다.

 

대원신통에게 있어 색사(色事)는 곧 道였던 것이다.

 

궁중에 들어간 미실은 옥진에게 배운 방사기교로 세종을 사로잡았다.

미실의 비상한 색공에 세종은 얼마 못가 정기가 고갈되었다.

『화랑세기』 11세 하종조는 "(세종) 전군은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하였다"고 표현하고 있다.

 

미실이 세종을 섬길 무렵, 지소태후가 미실의 숙모인 사도왕후를 폐하려 하였다.

진골정통이었던 지소태후는 같은 혈통인 숙명공주에게 왕후 자리를 주기 위해

사도왕후를 폐하려 한 것이다.

이 정보를 입수한 사도왕후는 진흥왕에게 달려가 울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사도왕후에 푹 빠져있던 진흥왕은 지소태후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를 왕후의 자리에 그대로 앉혔다.

 

사도왕후에 대한 지소태후의 분노가 애�은 미실에게 향하였다.

게다가 세종이 지나친 색사로 피골이 상접한데다가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을 보고

미실을 불러 "너로 하여금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전군이 의복과 음식을 받들라고 했지,

누가 색사로 전군의 심신을 어지럽히라고 했느냐"고 꾸짖고 그녀를 궁에서 내쫓았다.

남편 세종을 즐겁게 해준 죄 아닌 죄로 궁에서 쫓겨난 미실은 눈물을 흘리며 궁에서 쫓겨났다.

한편 미실을 쫓아낸 지소태후는 진종(眞宗) 전군의 딸 융명을 세종의 정실부인으로 삼았다.

 

 

궁에서 좇겨난 미실은 제5세 풍월주인 화랑 사다함을 만났다.

세종이 미실이 상대한 첫 남자라면, 사다함은 그가 만난 첫사랑이었다.

이 때 사다함의 나이는 불과 15~16세 사다함과 사랑에 빠진 미실은 부부가 되기로 약속하였다.

일방적인 색사보다 서로가 주고받는 사랑이 큰 기쁨임을 알게된 것이다.

 

진흥왕 재위 23년인 562년, 왕은 이사부(異斯夫)에게 대가야 정벌을 명령하였다.

이에 사다함 역시 참전하게 되었다.

미실은 출정가를 불러 사다함을 위로하였다.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한되 임 앞에 치지 않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아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치려뇨

 

사다함은 전장에서 용맹을 과시하였다.

그는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기병 5천을 거느리고 대가야 국경선의 성문인 전단량을 기습해

큰 공을 세웠다.

이 승전은 사다함의 명성을 전 신라에 떨치게 했다.

진흥왕이 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가야인 포로 300명과 많은 토지를 줄 정도로

그가 세운 공은 큰 것이었다.

 

사다함이 전선을 누비며 전공을 세울 때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발생하여 둘의 사랑을 어긋나게 하였다.

미실을 그리워한 세종 전군이 상사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처하자,

지소태후가 미실을 궁으로 불려들인 것이다. 지소태후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미실은

사다함이 전선에 가 있는 동안 입궁하였다.

 

미실이 입궁했다는 말을 들은 세종은 너무 기뻐 미친 듯이 달려나가 그녀를 맞았다.

하지만 미실은 세종의 요구에 한사코 응하지 않았다.

융명이 정실부인이고, 자신은 첩의 신분으로 마지못해 입궁했으므로 색사를 거절한 것이었다.

다급해진 세종은 지소태후에게 통사정을 해 미실을 정실부인으로 삼고,

융명을 둘째 부인(차비)으로 삼았다.

졸지에 차비(次妃)로 강등당한 융명은 화가 나 궁에 나가 살겠다고 했다.

그러자 미실은 세종에게 다시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받아낸 후

융명을 내쫓았다.

 

전공을 세운 사다함이 개선했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미실이 세종의 부인이 되어 있는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사다함은 자신의 애통한 마음을 청조가에 실어 남긴 뒤 7일간 굶다 세상을 떠났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팥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神兵) 되리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사다함이 죽자 미실은 세종에게 "사다함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고 말하고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다. 

그날 밤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으니

너의 배를 빌려 다시 태어날 것이다"했다.

미실이 임신하여 뒷날 제11세 풍월주가 되는 하종을 낳았다.

그런데 하종의 생김새가 사다함을 닮았기에 보는 사람마다 사다함의 아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서라벌에는 미실이 이미 사다함의 씨를 받은 후 입궁해 낳은 아들이란 소문이 나돌았는데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조에 보면 미실과 세종의 아들 하종은 564년에 태어났는데,

사다함은 562년에 죽었으니 하종이 사다함의 자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궁에서 쫓겨난 경험, 사다함의 죽음으로 미실은 변했다.

그 이전 미실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수동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사건으로 미실은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결정짓기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권력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뇌쇄적 매력을 이용해 권력 장악의 길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숙모인 사도왕후와 협력을 꾀했다.

미실과 사도왕후는 삼생(三生:전생, 현생, 후생)의 일체가 되기로 약속하는 굳건한 동맹을 맺었다.

둘이 손을 잡은 후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진흥왕과 사도왕후 사이에 난

아들인 동륜태자를 포섭하는 것이었다.

이 때 궁중은 지소태후파와 사도왕후파로 갈려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지소태후는 만호공주(萬呼公主: 진흥왕의 생부요 지소태후의 첫 남편인 갈문왕 입종의 딸이니,

진흥왕과 배다른 남매지간)를 태자비로 삼아 진골정통을 잇고자자 했다.

 

이를 알아차린 사도왕후는 대원신통을 잇고자 미실에게 몰래 약속하기를

 

"나의 아들은 좋은 아이다. 태자와 사귀어 아들을 낳게 되면 너를 태자비로 삼을 것이다"

 

하고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다. 미실이 매우 기뻐하며 태자 사냥에 나섰다.

동륜태자는 미실의 뇌쇄에 흡입되었고, 둘이 상통하여 미실은 태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못한 진흥왕이 미실을 불렀다.

 

사정은 이러했다.

어느날 대왕이 사도왕후에게 이렇게 물었다.

 "그대의 조카 미실은 어찌하여 그대의 잉첩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 갔는가?"

 그러자 왕후가 대왕의 마음이 미실에게 있음을 눈치채고 미실을 삼주(三柱),

곧 부 · 자  · 손 3대를 모시는 첩실로 추천했다.

 

미실은 왕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고 진흥왕에게 나아갔다.

진흥왕이 미실과 몇 차례 정사를 하도 나더니 그만 푹 빠져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아비가 다른 동복아우인 세종에게는 융명을 부인으로 다시 맞아들이게 하고,

미실에게는 왕후궁 전주의 칭호를 내리고 총애를 아끼지 않았다.

이제 미실의 권세는 왕후와 맞먹을 정도로 되었다.

『화랑세기』는 "미실은 음사(陰事:색사)를 잘했기 때문에 (진흥왕의) 총애가 날로 중해져 황후궁

전주(殿主)에 발탁되었는데 그 지위가 황후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실은 진흥왕과 동륜태자 모두 상대하면서 남편 세종도 버리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세종을 자신의 신하처럼 만들었다.

미실은 궁에 머물며 '사람을 시켜 세종이 밖에서 공을 세우도록 설득했다'

세종은 미실의 명에 복종하였다.

그가 사다함의 뒤를 이어 6세 풍월주가 되어 많은 낭도들을 거느리고 지방에 가 있을 때 미실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30여 년 전에 폐지된 원화(源花) 제도를 부활시키켜 한 것이다.

자신이 원화가 되면 자연히 풍월주는 없어지고 자신이 화랑들의 우두머리가 되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원래 화랑도는 여성 원화가 이끌던 조직이었다.

화랑도의 첫 원화이자 마지막 원화인 준정(俊貞)과 남모(南毛) 두 미모의 여성이

300여 명의 낭도를 이끌던 조직이 화랑도였다.

준정은 삼산(三山) 공의 딸이었고, 남모는 법흥왕의 딸이었는데,

남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시기한 준정이 남모를 술로 유혹해 물에 빠뜨려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원화제도가 폐지되었다.

원화 대신 선화(仙花)에게 화랑을 이끌도록 했는데 그가 바로 풍월주였다.

 

미실은 원화가 되기 위해 화랑이었던 동생 미생(美生)과 또 다른 화랑 설원랑(薛原郞)을 끌어들였다.

설원랑은 제1세 풍월주 위화랑과 보도부인 사이의 둘째딸로서 진흥왕의 후궁이 된 금진궁주가

설성이라는 낭도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며, 미실의 죽은 연인 사다함과는

아비가 다른 형제지간이기도 했다.

『화랑세기』를 보면 미실이 설원랑은 물론 자신의 동생인 미생과 정을 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실은 두 화랑에게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가졌는데, 만약 낭도들의 중망(衆望)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째서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느냐?"

라며 자신을 받들라고 명령했다.

 

이처럼 두 화랑을 앞세워 여론을 형성한 미실은 진흥왕에게 원화제도의 부활을 요청했다.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인 진흥왕은 세종을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

느닷없이 풍월주를 폐지하고 천하에 이름난 요녀 미실을 원화로 내세우자 세종의 낭도들이

크게 반발을 했다.

이에 세종은 낭도들에게 " 새 원화는 나의 옛 부인이니,

그대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고 타일렀다.

『화랑세기』는 '(이때) 많은 낭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물러가지 못했다'고 기록할 정도로

당시 원화제도의 부활은 낭도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원화가 된 미실은 화랑 설원랑과 친동생 미생을 봉사화랑으로 삼았다.

이로써 원화제도는 폐지된지 29년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진흥왕은 미실 궁주와 함께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고

큰 잔치를 베풀었다.

게다가 진흥왕은 이를 기념해 연호를 대창(大昌)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기록된 이 날의 잔치 장면은 고대 신라인들의 자유로운 성 풍속을 잘 보여준다.

 

「이날 밤 진흥제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正宮)에서 합환하였다.

낭도와 유화(遊花)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가득찼다.

밝은 등불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에 끓어 넘쳤다.

진흥제가 원화와 함께 난간에서 구경했는데 낭도들이 각기 원화 한 명을 이끌고 손뼉치고 춤추며

그 아래를 지나갔고, 그때마다 만세소리가 진동 하였다.

진흥제는 매우 큰 기쁨을 느끼고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채색된 동전)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저들도 각기 자웅(雌雄:암컷과 수컷)이고 나와 너도 자웅이다"

라고 말했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진흥왕의 품에 파고들며

"숙모(사도황후)의 존귀함으로도 이런 즐거움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

 

마치 집단 섹스를 연상케하는 이 잔치 장면을 적으면서 화랑세기는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영혼이 늘 미실의 가슴 안에 있으면서 좋은 계책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라고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미실이 숙모의 남자 진흥왕과 나누는 사랑은 고대 신라인에게는 불륜이 아니었다.

진흥왕은 『화랑세기』에서

"천하를 뒤집을만큼 사랑했다"

고 표현할 정도로 미실에게 반해 있었다.

미실이 진흥왕을 사로 잡은 것은 그녀의 미모와 색공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장을 잘 지었다"는 표현대로 그녀는 학문에도 능했다.

진흥왕이 업무를 볼 때 그녀는 옆에서 모시며 문서를 보고 참결해서

'조야의 권세를 옥진궁으로 돌아가게 했고, 대원신통이 다시 성하게 일어나게 했다'

자신을 내쫓았던 지소태후의 진골정통과 맞서 거둔 완벽한 승리였다.

그러나 그의 거침없는 남성편력과 권력에 위기가 닥쳤다.

동륜태자의 변사(變死)였다.

  

미실은 진흥왕과 동륜태자와 사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실은 진흥왕이 이 사실을 알까봐 두려워 태자와 만나는 것을 꺼려했지만,

미실의 진가를 맛본 동륜태자는 걸핏하면 미실을 찾아와 색공을 강요하였다.

그래서 미실은 자기가 거느린 유화 중에서 빼어난 미인들을 골라 동륜에게 붙여주었다.

동륜은 설원랑, 미생 등과 어울려 엽색행각을 일삼았다. 

이를 어색(漁色)이라고 한다.

 

게다가 동륜태자는 부친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寶明) 궁주와도 사통하였다.

보명궁주는 추문이 두려워 응하지 않았으나 이미 색광이 되어 버린 동륜태자를 막을 수 없었다.

게다가 미실이 진흥왕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것을 보고 태자를 받아들였다.

그 후 동륜태자는 걸핏하면 보명궁을 찾아 보명궁주와 관계하였다.

그러다가 진흥왕 33년(대창 4년, 572) 3월 동륜태자가 보명궁을 넘다가 큰 개에 물려 죽고 말았다.

 

진흥왕은 태자의 종인(從人)들을 조사하여 결국 동륜태자의 엽색행각이 밝혀졌고,

그 과정에 설원랑과 미생을 비롯한 화랑들의 개입이 밝혀졌다.

또한 그 중심에는 원화 미실이 있었다. 종인들의 입에서 미실의 추행(醜行)에 관한 증언들이 속출하였다.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진흥왕이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미실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 목놓아 울면서

전주 자리를 내놓고 궁을 나갔다.

미실에게 화가 미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 때 미실을 구원하기 위해 나선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동륜태자의 생모이자, 미실과 '삼생의 일체'가 되기로 맹세한 사도왕후였다.

 

"미실이 비록 잘못은 있지만 삼주의 맹세가 있습니다.

어찌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만 듣고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시려는 거지요?"

 

친모가 나서서 '아들의 혼령'을 언급하며 미실을 두둔하자 진흥왕은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렸고,

사건은 가라앉았다.

진흥왕이 사건을 봉합한 것은 사도왕후의 권고 때문이지만, 미실에 대한 사랑이 식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진흥왕이 미실의 사제(私第)까지 찾아갔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진흥왕이 사건을 불문에 부쳤음에도 불구하고 미실은 뉘우칠 줄 몰랐다.

그녀는 세종이 풍월주가 된 것이 못마땅했다.

그래서 그에게 압력을 넣어 풍월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한 다음 자신의 정부인 설원랑을 그 자리에 앉히고 동생 미생를 부제로 삼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죽은 동륜태자 대신 금륜태자와 상통하기 시작했다.

다음 제위에 오르면 반드시 왕후로 삼겠노라는 약속을 받고 나서였다.

 

미실이 출궁하고, 미실이 그리워진 진흥왕은 다시 미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미실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가 너무 커 왕을 모실 수 없다고 했다.

진흥왕은 그녀를 다시 전주로 임명했지만, 미실은 이를 거부하고 남편 세종을 선택했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전략이었다.

화랑세기는 세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스스로 그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한 소송도 그릇되게 판결하지 않았다"

 

김대문은 세종을 '화랑 중의 화랑'으로 묘사하였다.

하지만 그는 몸은 물론 마음까지 미실의 종이었다. 

오랜만에 세종은 미실과 뜨거운 정분을 나누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실은 세종과 해궁(海宮)으로 이주해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미실이 진흥왕을 완전히 떠나 세종에게 돌아간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실이 진흥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수종(壽宗)을 데리고 간 것은 진흥왕을 유인하기 위한

계략의 일환이었다. 수종이 어리다는 명분으로 데려갔으나, 수종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미실이 궁을 나가자 그가 보고 싶어진 진흥왕은 수종을 본다는 핑계로 여러 차례 미실을 불렀으나

거절당했다.

미실은 자신의 죄를 적은 글을 올려 진흥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죄를 지었으므로 왕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 실제의 목적은 진흥왕 길들이기였다.

 

결국 진흥왕이 몸소 해궁에 거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미실에게 돌아와 달라고 간청했다.

그제서야 미실은 못 이기는 척 진흥왕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이 때 미실은 세종의 아이를 임신중이었다.

그래서 해산 후 입궁하겠다고 했으나 미실 없이 하루도 견딜 수 없게 된 진흥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미실이 입궁해서 낳은 이 아이가 옥종(玉宗)이다.

 

세종은 또 다시 사랑을 빼앗긴 외로운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미실은 세종을 버리지 않았다.

미실은 진흥왕에게 청하여 세종에게 병부우령(兵部右令)을 제수하고 궁에 입궁해 살게 했다.

게다가 예전 심복들을 모두 끌여들여 요직에 앉혔다.

이로써 그녀의 권세는 전보다 더 높아졌다.

 

이와는 반대로 진흥왕은 몸이 갈수록 쇠약해졌다.

겨우 40대 초반이었지만 그 동안 지나친 색사로 몸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천하의 음녀 미실을 불러들여 매일같이 색사를 즐겼으니 명을 재촉한 셈이었다.

결국 진흥왕은 중풍에 걸려 거동도 못하게 되고 내정(內政)은 미실과 사도왕후가 장악하고,

외정(外政)은 세종, 설원랑, 미생등이 좌우했으니 결과적으로 미실의 천하가 된 것이었다.

 

진흥왕이 풍질에 걸려 사도왕후가 남녀관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미실은 이를 딱하게 여겨

세종에게 사도왕후의 사랑을 받으라고 권했다.

세종은 아직 왕이 살아있는데 황후와의 통정을 하는 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했지만,

 미실의 거듭된 강요에 할 수 없이 황후와 사랑을 나누었다.

미실에게 성교는 배타적인 금기가 아니라 모두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오락이었다.

진흥왕이 병에 걸렸다고 해서 그 즐거움을 누리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화랑세기는 병석에 누운 진흥왕이 "내외의 정사를 보지 못하고 오직 사도, 미실, 보명, 옥리, 월화의

다섯 궁주와 더불어 즐거움에 탐닉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병석에서도 색을 탐한 것이 건강을 급속도록

악화시켜 진흥왕은 재위 36년인 576년 8월 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실은 진흥왕이 붕어하자,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신 권력 확대를 위한 계기로 사용했다.

미실은 사도왕후, 세종, 미생과 함께 진흥왕 사망 사실을 비밀에 부쳤다.

미실은 사도왕후와 짜고 태자 금륜과 정을 통한 후 다른 마음을 먹지 않기로 약속 받고 왕위에 오르게 했다. 이렇게해서 왕위에 오른 금륜이 진지왕이다.

 

왕위에 오른 진지왕은 미실을 왕후로 삼겠다는 약속을 어김은 물론, 정사조차 돌보지 않은 채

오로지 엽색행각에만 몰두했다.

심지어는 민간의 부녀자까지 닥치는대로 범해 백성의 원성을 샀다. 당시 궁중에는 진흥왕의 왕후였던

사도태후, 동륜태자의 정비였던 만호태후, 그리고 진지왕의 정비인 지도태후 등 3 태후가 있었지만

아무도 진지왕의 엽색행각을 말리지 못했다.

마침내 미실은 사도왕후와 논의해 진지왕을 폐위시키기로 결정했다.

 

사도왕후와 미실은 세종과 사도왕후의 오빠인 노리부(努里夫)를 진지왕 폐위 거사를 주도할 인물로 정했다. 그런데 문노(文努)가 이끄는 가야계 낭도들이 불복할 우려가 있었다.

문노는 비조부(比助夫)와 가야국 문화공주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의리를 중히 여기고 용감했으며

검술에 능했다.

일찍이 이화랑의 부탁으로 사다함의 스승이 되어 화랑들을 가르쳤고,

화랑도의 토대를 닦음으로써 모든 화랑의 존경을 받고 있는 화랑도의 대부였다.

 

당시 화랑은 설원랑파와 문노파로 양분되어 있었다.

문노 일파는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가야계라는 이유만으로 합당한 지위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문노가 이끄는 가야계 낭도들은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따로 일문(一門)을 세웠다.

이는 낭도들이 둘로 갈렸음을 뜻하였다.

설원랑 �는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주장한 반면 문노 일파는 청의(淸議)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청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진지왕을 지지하고 나선다면 오히려 미실이 수세에 몰릴 수가 있었다.

 

미실은 사도왕후와 상의해 두 파를 하나로 합친 후 거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미실이 다시 원화가 되어 두 파를 하나로 통합한 후 거사하기로 한 것이다.

이로써 원화제도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사도는 왕후의 명으로 미실을 다시 원화로 임명했다. 원화 미실은 남편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랑을 좌봉사화랑(左奉事花郞), 비보랑을 우봉사화랑(右奉事花郞), 미생을

전방봉사화랑(前方奉事花郞)으로 삼았다.

 

하지만 미실은 문노를 확실한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문노를 제8세 풍월주로 삼았고, 

자신의 종형제 윤궁(允宮)을 문노와 맺어주었다.

그러나 문노가 윤궁과 맺어지기에는 신분이 낮았다. 문노의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였지만,

아버지 비조부가 신분이 높지 않았다.

문화공주는 원래 호조(好助)의 첩이었으나 비조부와 몰래 정을 통해 문노를 낳았기 때문에

윤궁과 신분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미실은 둘의 결합을 강행하였다.

결국 미실은 혼인으로써 문노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사전 정지작업은 마친 미실은 세종에게 밀지를 내려 거사를 감행하였다.

앞장선 사람은 노리부였고, 동원된 병력은 세종의 낭도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방탕한 세월을 보내던 진지왕은 재위 2년 11개월 만에 재위에서 끌려내려와 유폐되었다가

죽음을 당했다.

그 때가 579년 7월이었다.

 

거사에 성공한 미실과 사도왕후는 사도왕후의 손자요,

죽은 동륜태자의 아들인 김백정(金白淨)을 왕위에 앉히니 곧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당시 13세의 어린아이였다.

그래서 미실이 조정의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신라 사회는 이제 국왕까지 갈아치우며 남편 세종 뿐만 아니라 설원 등 풍월주 들의 절대적 충성을 받는

미실의 수중에 있었다.

10세 풍월주가 미실의 동생 미생, 11세 풍월주가 아들 하종,

그리고 16세 풍월주가 미실과 설원랑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 보종(寶宗)이었던 점은

그녀가 당시 화랑에게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음을 뜻한다.

 

*미실은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 옥새를 관장하는 새주(璽主)가 되어 정당(政堂)에서 정사를 보는 중

백양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낮 꿈을 꾸었다. 이것이 길한 꿈이라 생각한 미실은 얼른 진평왕을 끌로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진평왕은 아직 어려서 미실의 기분에 따라주지 못했다.

그래서 미실은 설원랑을 불러 정을 통했고 이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보종이었다.

 

사도왕후는 진평왕이 즉위한 뒤 진흥왕의 후궁이었던 보명과 미실에게 진평왕을 모시도록 했다.

미실은 이미 나이 30이 넘었고, 골품도 보명에 비해 낮은지라 보명에게 양보를 했다.

하지만 보명은 이 때 임신 중이었으므로 사양했다.

따라서 미실이 13세 소년 진평왕을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영광을 차지하였다.

『화랑세기』 22세 풍월주 양도공전에는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진평제가 즉위할 때 나이가 열세 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가 보명과 미실에게 진평제를 이끌도록 했다.

 미실은 위가 낮고 골이 천하여 보명에게 상도(上道:먼저 이끄는 것)를 양보했다.

그러나 보명은 그 때 석명(昔明)을 밴 지 3개월이었기에 굳이 사양했다.

이에 미실이 먼저 사랑을 받았다.

진평제는 이제 양기가 통하게 되자 스스로 보명궁에 이르러 이끌어 달라고 청했다."

 

미실은 열세 살의 어린 진평왕에게 '신국의 도'라는 일종의 성교육을 시킨 것이다.

진평왕이 즉위했을 때 미실의 나이는 32세였다.

진평왕이 스스로 보명을 찾아가 성교육을 시켜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미실의 가르침은 탁월했다.

신라에서 국왕의 남녀관계는 단순한 육욕 만족 차원이 아니라

왕실의 번영을 희구하는 필수적인 의식이자 신국의 도이기도 했다.

미실은 이런 교육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미실에 의해 옥진을 종주로 모시는 대원신통은 왕가보다 높아졌다.

11세 풍월주 하종이 12세 풍월주 보리와 함께 신궁(神宮)에서 법흥왕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에 절할 때 있었던 일이 이를 잘 보여준다.

미실의 아들 하종이 법흥왕보다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을 하자

보리가, "오늘날 우리들이 귀하게 된 것은 모두 선제(先帝:법흥왕) 께서 내려주신 것인데

어찌 그 분을 뒤로 합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하종은 "선제가 말씀하시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으로 여기지만 나는 옥진을 신으로 여긴다'고

말씀했으며, 영실(英失: 옥진의 첫 남편)고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제(帝)에게 절했다.

대개 미실궁주께서 가르친 바이다"라고 대답했다.

화랑세기는 지소태후의 손자였던 보리가 '부득이 따랐다'고 적을 정도로 한 때 그를 쫓아냈던

지소태후의 진골정통은 미실의 상대가 아니었다.

 

지나친 색사로 진흥왕의 죽음을 재촉하고, 색공의 대가로 약속한 왕후 자리를 주지 않았기에 진지왕을

패�였으며, 사도태후와 더불어 진평왕을 내세운 여인 미실. 미실궁주야말로 여걸이라면 여걸이요,

요화라면 요화였다. 미실은 명색이 후궁이었지, 실제로는 여제(女帝)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훅들은 말할 것도 없고 태후 만호부인과 왕후 마야부인도 미실의 시퍼런 서슬 아래 눌려 지냈다.

또한 그녀는 신라 최강의 군대 조직이요,

인재 양성제도인 화랑도까지 좌지우지했으니 진평왕이 즉위한 579년부터 그녀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606~607년까지 20여년 간은 가히 미실의 시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진흥, 진지, 진평 세 왕을 모신 미실은 진평왕 28년(606) 병에 걸렸다. 『화랑세기』는

그녀의 병을 이상한 병(奇病)이라고 표현했다.

그녀가 병이 들자 설원랑이 밤낮으로 옆에서 간호했다.

설원랑은 나아가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이면 밤마다 간절히 기도했다.

설원랑은 마침내 미실의 병을 대신해 자신이 병에 걸려 죽었다.

설원랑이 죽자 미실은 자신의 속옷을 넣어 함께 장사지내며

"나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라며 슬퍼하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나이 58세였다.

 

우리 역사를 보면 다수의 여성들에게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시킨 남성은 많아도 다수의 남성들에게

일부종사(一婦從事)를 시킨 여성은 미실이 유일하다.

그것도 자발적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한 여성은 미실뿐이다.

미실이 주도하던 시절 신라는 진정한 여인천하(女人天下)였던 것이다.

 

신라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신국(神國)아라고 불렀고,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고 말했다.

제22세 풍월주 양도(良圖)는 아버지가 모종(毛宗), 어머니는 양명공주(良明公主)였다.

모종은 미실궁주와 세종의 아들로서 제11세 풍월주였던 하종과 설화랑의 딸 미모(美毛)의 아들이요,

양명공주는 진평왕의 딸이다.

양명이 처음에 미실과 설화랑의 아들로서 제16세 풍월주였던 보종에게 시집을 가

보라와 보량 자매를 낳았다.

따라서 양도와 보량은 아비가 서로 다른 남매간이었다.

양명이 양도와 보량을 결혼시키려 하자 양도는 누나인 보량에게 장가들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보량은 상사병이 들었다. 이에 양명공주가 양도를 꾸짖자 양도가 말했다.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됩니다.

제가 오랑캐의 풍속을 따르면 부모와 누나 모두 좋아하겠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부모와 누나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그러자 양명공주가 양도를 껴안으며 말했다.

 

"참으로 내 아들이다. 신라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

 

신국의 도, 미실궁주가 60평생을 걸어온 길이 바로 이러한 신국의 도였던 것이다.

빼어난 미색으로 진흥왕을 뇌쇄시키고, 진지왕을 폐위시켰으며,

진평왕을 어른으로 만들어준 여인, 원화제도를 부활시켜 자신이 원화가 되어

화랑들을 호령한 여인 그녀가 바로 미실이다.

미실은 한국 역사상 여인의 몸으로 나라를 좌지우지한 여걸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남성적, 유교적 잣대에서 벗어나 신라인의 눈으로 신국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진실로 그녀는 여인의 몸으로 한 나라를 좌지우지한 위인이었다.

 

 

 

참고: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황원갑,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 



'종합상식 > 만물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0년전 우리나라 어린이 모습  (0) 2008.01.05
김일성시체궁전 해부  (0) 2008.01.04
♤ 여자의 얼굴은 시시각각  (0) 2008.01.03
어디로 가는가...  (0) 2008.01.02
292. 성녀 소화 데레사  (0) 2008.01.02